389화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돌계단 위에 우두커니 섰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흠차 대인이 놀랐다고 생각한 마해는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 내며 씁쓸한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차라리 잘됐지 않습니까.”
3대 작업장에서 파업을 시작했다니······ 이건 경국이 황실 금고를 운영하기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사실 범한의 방법은 처음부터 칼을 휘두른 장 공주와 비교하면 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파업이라는 강경 수단을 사용한 것일까. 문제는 그가 사흘이라는 시간을 줬다는 것과 장 공주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감찰원의 힘을 이용해 금고 관리인들이 재산을 빼돌릴 기회를 막았다는 점이다. 이에 그동안 착취한 은전을 모두 뱉어 내게 된 금고 관리인들이 최후의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은전이란 무엇일까? 은전은 사람의 목숨이었다. 금고 관리들은 자신의 목숨과 같은 은전을 지키기 위해 파업이라는 경천동지할 만한 수단으로 범한에게 맞섰다.
마해의 말에 잠시 놀란 범한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가 놀란 이유는 금고 관리들이 파업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도 노동 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인, 이제 어찌합니까? 사흘령을 철회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부터 범한이 내린 사흘령에 찬성하지 않았던 마해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금고 관리들이 파업을 시작해 황실 금고 3대 작업장이 모두 멈춘다면 조정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텐데 그 책임을 누가 진담? 범씨 집안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이 일은 폐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마해를 비롯한 관리들의 예상과 다르게 범한은 흥분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과연 본관을 실망시키지 않는군. 반항이 크면 클수록 좋지. 본관이 가서 모두 깨끗이 죽이면 그만인 것을!”
“네?”
이슬비 속에서 관리들이 멍하니 서 있는 가운데, 멀리 관문 밖에 제비 한 쌍이 춤을 추며 날아갔다.
* * *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을 뚫고 검은색 감찰원 복장을 한 범한이 이십여 명의 전운사 관리들을 이끌고는 처음 파업을 선언한 갑 작업장의 어느 큰 공방으로 갔다. 평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던 모습과 다르게 공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가 범한을 바라보며 이렇게 조용한 반항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다렸다.
이들은 범한을 따라 강남으로 내려온 계년조와 6처 검수들이 큰 공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좀 더 떨어진 곳에서는 섭 참장이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소문무와 잡담을 나누면서도 그의 마음은 온통 오늘 파업을 시작한 큰 공방에 가 있었다. 두 사람 뒤에는 무기를 손에 쥔 관병들이 정자세로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갑 작업장 파업에 동참한 사람들은 모두 이 큰 공방에 모여 있었다. 이곳은 원래 유리를 제작하는 곳으로 아직도 어젯밤 작업 열기가 남아 있었다.
침착하게 공방 안으로 들어간 범한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방수가 잘되어 있군.”
노동자들은 맨 뒤편에 삼삼오오 모여 겁에 질린 얼굴로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하층 노동자인 그들은 오늘 갑자기 작업을 멈춘 이유도, 흠차 대인이 직접 이곳에 온 이유도 알지 못했다.
공방 맨 앞에 서 있는 청색 옷을 입은 십여 명의 금고 관리들이 마지못해 범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왜 작업을 하지 않는 거요?”
“대인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 몸이 낫지 않은 갑 작업장 소 주사가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어젯밤 너무 많은 비가 내린 탓에 아궁이가 식어 버렸고 모형도 망가져서 작업할 수 없습니다.”
주사와 금고 관리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대놓고 파업을 했다가는 화가 난 범한이 자신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핑계를 대며 파업함으로써 상대를 위협할 생각이었다.
이것이 협상의 예술이라 한다면 범한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예술을 파괴하는 데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주위 분위기를 살핀 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형이 망가졌고 아궁이에 습기가 찼다는 건가? 그럼 을 작업장은 어떠한가? 설마 사람도 녹일 정도로 뜨거운 쇳물도 빗물에 식었다는 겐가? 방적기 그것도 녹슬었나?”
소 주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쳤다.
“금고 관리인이란 자들이 이렇게 아둔하다니!”
범한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관리인들을 교체하기로 결정한 그는 오히려 빌미를 제공할 만한 소란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이번 파업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봐라, 소 주사의 머리를 쳐서 그의 피로 용광로를 데워라.”
범한이 한쪽 손을 휘두르며 담담히 말했다.
흠차 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소 주사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범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비를 입은 감찰원 관리들이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이 의자를 들고 와 범한을 앉게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소 주사를 널브러뜨리고는 약 댓 장 정도 떨어져 있는 용광로로 끌고 갔다.
범한이 얼른 하라는 듯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의 뒤에서 우왕좌왕하는 전운사 관리들을 뚫고 마해가 나와 급히 나서 소리쳤다.
“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소 주사는 아궁이 앞까지 끌려간 뒤에야 비로소 흠차 대인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있는 힘껏 발을 바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잘못했습니다. 대인, 용서해 주십시오!”
상황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용서를 비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소 대인과 평소 교분이 있던 창고 관리들은 울먹이며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쳐나가 소 주사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황해 발을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눈에 서슬 퍼런 칼날이 보였기 때문이다.
곧이어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머리가 땅에 떨어지더니 데구루루 굴러 아궁이 안으로 들어갔고 붉은 피가 아궁이 벽에 튀었다.
순간 큰 공방 안이 놀란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금고 관리인들은 선홍색 피로 물든 아궁이를 보자마자 살고자 하는 본능이 솟구치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아궁이 앞 시체를 힐끗 보고는 공방 맨 뒤에 모여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본관이 사람을 죽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네.”
비가 천장을 때리면서 나는 소리가 조용한 공방 안에 울려 퍼졌다.
겁에 질려 맨 뒤쪽에 몰려 있던 공방 노동자들이 놀라 무의식적으로 주변에 있는 삽이나 나무판자를 들었다.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한편 맨 앞에서 파업을 주도하던 금고 관리인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흠차 대인을 바라봤다. 그들은 아궁이 앞에 널브러져 있는 머리 잘린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못한 채 겁에 질린 눈으로 범한의 얼굴만 바라봤다. 이윽고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 열 사람,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일제히 뒷걸음질을 치자 벌레가 사막을 기어가듯이 슥슥 소리가 났다. 공방의 규모가 크긴 했지만 뒤에는 얇은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바글바글했으니 청색 옷을 입은 금고 관리인들이 숨을 곳은 없었다.
범한은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본관은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르는 잔악무도한 사람이 아니네. 조사를 통해 금고 관리인들의 횡령에 노동자들은 관련이 없다는 걸 알고 있네.”
그 말을 들은 노동자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란 말에 조금은 안심되었지만 젊은 관리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기에 쥐고 있던 삽이나 나무판자를 놓지는 못했다.
“조······ 조정의 명을 받은 관리가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죽여도 되는 건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금고 관리인 한 명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전운사 부사 마해는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범한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다짜고짜 갑 작업장 주사의 목을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이와 같은 큰일을 앞으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지만 너무나도 당혹스럽고 두려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흠차 대인, 왜······ 왜 이러신 겁니까? 잘 상의해서 처리해야 할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다니요. 이제 어찌합니까. 이렇게 해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해가 생각했을 때 황실 금고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바로 자신의 앞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금고 관리인들이었다. 이들이 있어야만 황실 금고가 유지될 수 있었다. 범한이 오늘 사람들의 목을 쳐서 금고 관리인들을 강제로 굴복시킨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원한을 품은 금고 관리인들이 황실 금고를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마해가 떨리는 눈으로 주변 상황을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다른 곳에서 파업 중인 주사들이 갑 작업장 소 주사가 죽은 사실을 안다면 파업이 장기화될지도 몰라. 흠차 대인이 정말 다 죽일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그럼 황실 금고 운영은 누가 하라고? 설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저 노동자들이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고 계신 건가?’
범한은 전전긍긍하고 있는 부사는 본체만체하고는 소문무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고는 작업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모두 잘 들으시오!”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소문무가 옷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조사에 따르면 황실 금고 전운사 3대 작업장 중 갑 작업장 주사인 소경은 이전부터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해 온 것으로 드러났소.”
소문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힐끗 겁에 질린 금고 관리인들을 바라보고는 계속 읽어 나갔다.
“경력 2년 3월 소경은 동광에서 일어난 사고를 은폐한 뒤 무려 5년 동안 사망한 사람들의 임금을 가로채 총 1만 3,700냥을 착복했다. 경력 4년 7월 9일 소경은 소주 주부에게 뇌물을 주고 비옥한 토지 7백 묘를 헐값에 사들였다. 경력 6년 정월 소경을 필두로 한 3대 작업장 주사와 금고 관리인들이 노동자들의 임금 지급을 미뤄 체불된 임금이 만 냥을 넘었으며 이에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열네 명이 사망했고 쉰여 명이 다쳤으며······.”
열거된 죄상이 어찌나 많은지 읽어 내려가던 소문무의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쉼 없이 읽어 내려가던 그가 마침내 마지막 줄을 읽었다.
“용서하기 힘든 죄를 저질렀으니 경국 법률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
그런 뒤 그가 품속에서 토지 매매 계약서와 뇌물을 받은 소주 주부의 진술서 및 관련 증거를 꺼냈다.
“이 정도면 증거가 충분하지.”
범한이 만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인적 증거도 있고 물적 증거도 적지 않소. 본관이 황실 금고를 관리하는 이상 소경과 같은 악랄한 놈은 절대 남겨 두지 않을 거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노동자들은 소경이 지은 죄상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그가 평소 자신들에게 저질렀던 포악한 짓들이 떠오르면서 죽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금고 관리인들의 원망하는 눈빛은 갈수록 더 짙어져 갔다. 그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죄를 다스리려면 법정에서 사건을 심사해야지······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니까 함부로 죽이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범한 뒤에 서 있는 부사 마해도 소문무가 읽은 죄상들은 모두 이들을 죽일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소경이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어도 경국 법률로 처벌해야지······ 이렇게 멋대로 죽이다니!’
마해는 사촌 동생 임소안과의 관계 때문에라도 범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범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도 의문을 가지지 않고 단호하게 실행했다.
하지만 전운사 안에 남아 있는 장 공주의 심복들은 이처럼 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대인,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리 뇌물을 받고 법을 어겼다 하더라도 법정 재판을 통해 스스로 죄를 뉘우치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죄를 지은 놈들에게 진정으로 본때를 보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금고 관리인들에게 사흘의 시간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직 사흘이 다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시면······.”
전운사 관리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자 금고 관리인들은 벌벌 떨면서도 여전히 의지를 꺾지 않고 한층 용기를 냈다.
반면 범한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희미하게 냉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본관은 감찰원 제사이자 전운사 정사를 맡고 있소. 감찰원은 조사할 책임이 있고 전운사는 경국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 특수한 기관이오. 그러니 정사인 내가 직접 사건을 판단해 참수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아요? 게다가······ 본관은 그가 이런 죄를 지었다고 참수한 것이 아니오.”
그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오금을 저릴 만큼 무서운 미소를 지었다.
“노동자들을 동원해 파업함으로써 폐하의 뜻에 저항했지 않소. 이런 상황에서 본관이 이런 오만방자한 자를 참수하지 않는 게 더 문제가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