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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87화 (387/1,108)

387화

줄곧 가만히 앉아 있던 세 명 중 한 명이 정중한 자세로 일어났다.

“대인, 하관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범한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급되지 않은 임금이 있어도 액수가 크지는 않고 가끔은 장부에 명확히 기록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소리를 내며 웃다가 다시 말했다.

“대인께서는 멀리 경도에서 오셔서 이곳 지방 사람들의 성미가 얼마나 포악한지 모르실 겁니다. 가족들까지 줄줄이 데리고 와서는 작업장에서 일은 한 명만 하면서 세 명의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고, 임금을 체불하지도 않았는데 조정의 돈을 갈취하려 난동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노동자들이 농간을 부렸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범한이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듯 반색하며 계속 말했다.

“대인, 여기 노동자들은 백성을 아끼는 조정의 마음을 이용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간악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일을 게을리하거나 어떤 놈들은 작업 순서를 망치기도 합니다. 요 몇 년간 이런 일들 때문에 조정에서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아마 대인은 상상도 못 하실 것입니다.”

그는 노동자에 대한 험담을 한껏 늘어놓으면서 범 제사의 청렴한 명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범한도 관리인 이상 천한 노동자 편에 서지는 않을 거라 짐작했다.

범한이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노동자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 폐하가 이처럼 어질고 총명하신데 노동자들이 만족을 모르고 설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그 사람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임금이 체불된 일은 하관이 돌아가서 자세히 조사를 해보겠지만 소란을 벌인 노동자들을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에 눈이 먼 간악한 자들이니 대인께서는 절대 그들의 말에 속으셔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대인은 누구시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전운사 부사가 재빨리 나서서 소개했다.

“저 사람은 갑 작업장을 책임지고 있는 주사, 소 대인입니다.”

“소 대인?”

범한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 작업장 주사란 말인가?”

성이 소(蕭)씨인 갑 작업장 주사가 급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하관, 그렇습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는 보잘것없는 금고를 관리하는 주사일 뿐이고 조정에서 품직을 내리지도 않아 관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계속 자신을······ 하관이라 칭하는 것인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온화했던 범한의 목소리가 점차 싸늘하게 변했다.

“입을 열 때마다 하관이라 하는데 다른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본 관아가 오늘 처음 문을 열었으니 보잘것없는 주사인 자네는 관아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거늘 감히 이곳에 들어와 거드름을 피우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 앉아 있다니······ 정말이지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군! 이건 또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정당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래고래 화를 내는 범 대인을 바라보는 관리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금고가 황실 소유가 된 뒤로 지금껏 3대 작업장 주사 앞에서 화를 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장 공주도 황실 금고를 관리하게 되고 맨 처음 민북 관아에 왔을 때 3대 작업장 주사들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대했을진대 범 대인은 뭘 믿고 저리 질책을 한단 말인가.

갑 작업장 주사 소 대인 역시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범 대인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진 않더라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감히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기에 화를 삭이며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뒤에서 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주사의 자리를 치워라.”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온화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본관이 있을 때는 자네 자리는 없을 거네.”

“범 대인!”

궁둥이를 붙일 의자까지 빼앗기자 다시 일어선 주사가 목구멍까지 치솟는 화를 애써 삼켰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범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섭 참장과 전운사 부사와 대화를 나눴다.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의 옆에 있던 감찰원 관리가 소 대인을 한쪽 구석으로 밀쳐 낸 뒤 의자를 치웠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아래 관원들까지 연이어 중재하려 나섰고 옆에 있던 섭 참장도 범한을 타일렀다.

“범 대인, 저들의 체면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 체면을 생각해 주란 말입니까?”

범한이 당당한 표정으로 웃었다.

“오늘 반드시 저들의 체면을 깎아 버릴 것입니다.”

그의 말에 말문이 막힌 섭 참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황실 금고가 열린 이후 전운사에는 항상 3대 작업장 주사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특별한 지위를 가진 그들을 지금껏 이렇게 모욕한 사람은 없었다. 이에 다른 두 명의 주사도 일어나서 소 대인의 옆에 서서는 상석에 앉아 있는 범한을 향해 말했다.

“대인께서 관아에 저희의 자리가 없다고 하시니 그럼 모두 치우시기 바랍니다. 3대 작업장 주사들은 별 볼 일 없는 비루한 사람들이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것은 도발이 아니라 3대 작업장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위협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주사를 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함께 치워야지. 자네들 자리는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 본관은 3대 작업장 주사들이 비루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만 자네들이 그렇게 말하니 본관도 그런 줄 알겠네.”

“대인!”

본래 3대 작업장 주사들은 처음 황실 금고에 온 범한이 권위를 세우려 일부러 자신들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자신들에게 면박을 주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들을 정말 몰아낼 작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뭘 믿고 이러는 것일까. 정말로 3대 작업장의 생산을 멈추려는 것일까.

“3대 작업장 주사들이 대인께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주사가 한기가 느껴질 만큼 무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임금을 착취하고 백성들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 조정을 협박하고 본관을 공경하지 않았다. 물론······.”

주사의 질문에 범한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잘못을 쉼 없이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네들은 본관에게 잘못한 게 아니라 3대 작업장 노동자들과 조정 그리고 천하의 만백성들에게 잘못을 저질렀네.”

“저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십니까?”

주사가 버럭 화를 내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경국 규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범한이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

‘규정이라고? 내가 바로 규정이다.’

사실 이 말은 범사철이 경도에서 포악무도한 짓을 저질렀을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관리나 불량배나 상황이 모호하고 혼란스러울 때는 거친 방법을 사용하는 게 가장 편리했다.

“이봐라, 3대 작업장 주사들이 관아 정당에서 소란을 피우니 곤장 열 대를 때려라.”

범한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관용을 베풀어 달라 요청하는 관리들의 말을 무시했다. 그의 입가에 은은하게 걸린 미소는 더는 누구도 딴소리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해 보였다.

퍽! 퍽! 퍽! 퍽!

이곳 곤장 소리는 경도 황궁에서 도찰원 어사들이 맞을 때 들렸던 묵직한 곤장 소리와는 달리 리듬감이 강해서 누구든 박자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곤장 열 대를 맞게 된 주사들은 다행히 범사철처럼 맞기도 전에 졸도해 버리지는 않았다.

그 장면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범한은 주사들의 예상치 못한 기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곤장 열 대를 맞으면서 그들은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그의 부하들이 있는 힘을 다해 때렸을 텐데도 말이다.

상의를 위로 걷고 바지는 벗은 채 곤장대에 엎어져 있는 세 명의 주사들의 엉덩이와 등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분명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범한에게 용서해 달라 빌지 않았다. 의연하게 곤장대에 누운 그들은 매질이 시작되자 통증도 통증이지만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굴욕감이 몰려왔다. 어느덧 그들의 눈가에 원한이 담긴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정말이지 불쌍하고 처량한 모습이었다.

곤장 열 대를 다 맞자 범한이 손을 흔들어 명령했다.

“데리고 나가게.”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일제히 대답하고는 세 명의 주사들을 부축해 관아 밖으로 데리고 갔다. 주사들이 고통과 굴욕감에 힘겨워하며 나가자 범한이 뒤에서 소리쳤다.

“사흘이네, 사흘. 잊지 말게나!”

관아가 순간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고 범한을 바라보는 관리들의 눈빛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천하 사람들은 범한의 명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경도 사람들과는 달리 그 청렴한 명성 뒤에 숨겨진 무서운 모습을 모르고 있었다. 하기야 전운사 관리들은 2 황자 측 관리들이 겪은 고통을 직접 체험해 볼 기회가 없었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오늘에야 범한의 무서운 면을 보게 된 관리들은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소롭게 생각했다. 무섭게 호통을 치고 매질을 하는 범한의 모습이 관리들의 눈에는 황실 금고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범한이 아무리 박식해도 3대 작업장 주사들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앞으로 상황을 관리하기는 힘들 거라 생각했다.

반면 범한은 자신의 부하인 관리들이 사흘 뒤 펼쳐질 상황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사흘 안에 체불된 임금을 모두 처리하고 어떤 불법적인 일이든 조사하라고 지시한 뒤 관리들을 물렸다.

그러고는 섭씨 가문 출신인 참장과 자신을 가까이서 도와준 전운사 부사를 남게 했다. 사흘 뒤 벌어질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이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후원에서 그가 이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범한의 말을 듣던 두 명의 관리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 범한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인.”

소문무가 감찰원에서 보낸 정보 보고서를 건네자 범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받았다. 생각해 보니 4처 관리는 쓸모가 있어 보였다. 그동안 장 공주와 금고 관리 사이에 끼어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공문서에 파묻힌 그를 바라보던 소문무가 방금 일을 떠올리고는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3대 작업장 주사들은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죽여야지. 하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네.”

“아까는 대인이 너무 온화하게 처리하신 것 같습니다.”

감찰원 1처 소속인 소문무는 잘못을 저지른 관리들을 매섭게 다루는 걸 자주 봐왔기에 조금 전 범한의 행동이 지나치게 인자해 보였다. 더구나 어차피 죽일 사람들이라면 굳이 반나절 동안 혼을 내고 곤장은 때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범한의 안색을 살피던 소문무가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곤장 열 대는 너무 가벼운 처벌입니다. 이 정도로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손에 들고 있던 감찰원 보고서를 흔들었다.

“알고 있네. 수중에 증거가 있으니 언제든 주사를 참수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걸세.”

소문무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증거가 있는데도 국법을 어긴 세 명의 주사를 풀어 준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범한이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주사들을 참수했다면······ 관리들과 금고 관리인들은 속으로 나를 원망하면서도 칼날이 두려워 사흘은커녕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체불된 임금을 모두 지급했을 거네.”

“그게 바로······ 대인께서 원하시는 결과가 아닙니까?”

소문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범한이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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