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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82화 (382/1,108)

382화

하늘과 땅이 아무리 커도 군자만큼 크지 않으니 군자가 없으면 스승이 크고 스승이 멀리 떠나면 군자가 가장 크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란 소인의 반대말이 아니라 진짜 군주의 아들을 말하는 것으로 어린 3 황자는 지금 소주성 안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3 황자의 모습에 사천립은 거짓으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마지못해 따라 나가겠다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신이 난 3 황자는 유모와 태감들을 모두 집 안에 내팽개쳐 둔 채 거드름을 피우며 사천립과 호위병 몇 명을 데리고 장원을 나갔다. 어린 주인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태감과 유모들은 이제 곧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전전긍긍하면서 제사 대인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이 모든 게 3 황자의 신분을 이용하려는 범한의 계획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어렵사리 놀 기회를 얻은 3 황자는 절대로 조급해하지 않았다. 신분을 숨기고 여행 온 부잣집 공자로 위장한 그는 사천립에게 맏형 역할을 맡게 하고 자신은 아우 역을 맡았다. 마차를 타고 소주성을 한 바퀴 돌며 아름다운 풍경과 호수에 떠다니는 놀잇배를 바라보던 3 황자가 지루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기생들이 옷을 너무 두껍게 입었군. 이래서는 놀 분위기가 생기지 않을 텐데.”

귀티가 흐르는 부잣집 공자로 변신한 3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먼저 장소를 잘 골라야 하네. 모름지기 스승인 범 대인께서 하시는 장사이니 나도 신경을 써야겠네. 그러지 않으면 자네가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기만 했다고 혼날 게 아닌가.”

아무 말 없이 있던 사천립이 속으로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서 이들은 먼저 소주성에서 시끌벅적한 장소 중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를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돌아다녀 보았다. 주변 기생집들을 살펴보고 장사 상황과 대체적인 위치도 파악해 두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가장 밝고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곳은 기생집이 아니라 호화롭게 치장한 3층짜리 술집이었다. 웅장한 건물에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대지 면적도 꽤 커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3 황자가 작은 손으로 그 건물을 가리켰다.

“더는 둘러볼 필요가 없겠군. 이 위치가 가장 좋아 보이네.”

그 말을 들은 사천립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경도 포월루에서 장사를 해봤지만 이처럼 지점을 고르는 일이 빠르게 진행된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속으로 돈과 세력뿐만 아니라 3 황자까지 옆에 있으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거라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술집 문 앞에서 안을 살펴보던 사천립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소가 너무 좋은 곳은 항상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습니다.”

3 황자가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천하에 나보다 더 힘이 센 세력이 있는가?”

사천립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만일에······ 총독부의 지분이나 순무가 지분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마마야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관리들의 체면을 신경 써야 합니다.”

3 황자는 나이가 어렸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총독 설청은 자신이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강남 관리들의 체면을 깎아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술집의 위치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고 욕심이 났다.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이렇게 좋은 자리를 그냥 지나치면 범 대인도 아까워할 테고 나도 배가 아파 한참 고생할 것 같으니까.”

게다가 이들은 한참 동안 술집 밖에서 머무른 터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주성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술집 문 앞에서 음식 냄새만 맡으며 수군대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귀티가 흐르는 차림새에 위풍당당한 호위병까지 이끌고 나타난 외지인들을 보며 곧 있으면 시끄러운 일이 생기겠다고 짐작했다.

그때 건물 안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술집 지배인이 나와 직업으로 단련된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셔서 저희 가게 요리를 맛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 죽원관은 강남거와 함께 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인 만큼 음식 맛이 아주 좋습니다.”

지배인은 가게 문 앞에 있는 외지인들이 보통 신분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조심스럽게 응대했다. 죽원관도 뒤를 봐주는 세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찾아온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에 그의 말에는 자신의 가게 앞을 막고 있는 걸 탓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천립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합니다. 고의로 가게 앞을 막은 건 아니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지배인이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3 황자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일행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던 그가 지배인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조용한 방으로 주시게. 의논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러자 지배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형은 가만히 있고 어린 아우가 왜 지시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사천립이 마른기침을 하며 아무 말 없이 술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일행이 방에 앉기도 전에 지배인이 들어와 인사하자 성격 급한 3 황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배인, 이 건물 팔 생각이 있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지배인은 속으로 어린 공자의 태도가 버르장머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일들은 겪어 온지라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게 웃었다.

“보시다시피 장사가 잘되고 있어 아마도 사장님께는 파실 마음이 없으실 겁니다.”

“여기 사장의 성을 알려 주실 수 있읍니까?”

사천립은 속으로 3 황자의 급한 성미를 욕하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배인이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장님은 전(錢) 씨입니다.”

* * *

지배인이 나가자 사천립은 미간을 찌푸리며 3 황자에게 말했다.

“소주는 처음 와서 사정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천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때 3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더니 무언가 신기한 거라도 본 것인지 화들짝 놀라며 감탄했다.

3 황자가 서 있는 창가에 다가간 사천립도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죽원관 후원과 연결되어 있어 창밖에는 잔잔한 호수가 있었다. 호수는 크지 않았지만 양쪽에 담장이 쳐져 있어 시끄러운 도시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아직 초봄이라 정원에는 잔디가 돋아나지는 않았지만 화창한 봄날이 되면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낼 게 분명했다.

“정말 닮았네.”

두 사람이 동시에 감탄을 내뱉었다. 여기서 닮았다는 말은 죽원관이 경도 포월루와 상당히 닮았다는 의미였다. 만약 이곳을 수리할 수만 있다면 경도 포월루와 똑같이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포월루의 전임 사장인 3 황자와 현재 사장인 사천립은 죽원관 후원을 보자마자 같은 생각을 했다.

“반드시 인수해야 해!”

3 황자와 사천립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소리치고는 객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일은 돌아가서 죽원관 뒤에 있는 세력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배경이 그리 크지 않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에 고위층 관리가 연루되어 있다면 일은 복잡해진다.

3 황자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범사철 형님이 있었다면 술집 사장에게 소송을 걸어 상대방이 포월루를 베껴 가게를 차렸다고 따졌을 거네.”

사천립은 백작가 둘째 도련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는가?”

3 황자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둘째 사촌 형님은 첫째 사촌 형님보다 악랄······. 하긴 두 사람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하나는 일이 잘못되니까 흔적도 없이 도망을 치고 다른 하나는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 보고 지분을 빼앗았으니까. 자네도 그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있네!”

3 황자가 갑자기 발끈하자 겁을 먹은 사천립이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나온 음식은 지배인의 말대로 맛이 훌륭했다. 식사를 마친 뒤 떠나려 할 때 지배인이 급히 들어와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수 일에 대해 마음이 바뀌지 않으셨으면 다시 의논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3 황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술집은 한눈에 봐도 장사가 잘되는 듯했다. 그런데 아까 물었을 때는 분명 안 될 거라더니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바꾼단 말인가.

사천립이 넌지시 떠보았다.

“무슨 의미입니까?”

지배인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방금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최근에 장사가 이전만큼 좋지는 않다고 하시면서 손님들이 부르는 값으로 팔겠다고 하셨습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또······ 인수한 뒤에도 이곳을 잘 관리해 주신다면 팔 마음이 있으시다네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제안에 사천립이 다시 뭐라고 질문을 하려 하자 3 황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우리도 장사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잘 관리할 거네. 다만 적당한 가격이라 하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지배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나보고 가격을 부르라는 건가? 하지만 사장님께 들은 바가 없는데 어떡하지? 상대방은 사장님은 아무 가격에나 팔려 하는 걸 모르고 있으니······ 나라도 손해 보지 않는 가격을 불러야 하는 건가?’

초봄이 아니라 한여름이 된 것처럼 지배인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렸다. 한참을 주저하며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손가락 네 개를 폈다.

사천립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던 호위병까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4만 냥이라고? 아무리 자리가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다니!’

눈치를 살피던 지배인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잽싸게 손가락 세 개를 접고 집게손가락 하나만 폈다.

사천립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가격 한번 이상하게 매기는군. 아무 말도 안 했는데 4만 냥이 순식간에 1만 냥으로 변하다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나쁜 가격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1만 냥이면 나쁜 가격은 아닌데······. 하지만······.”

사천립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지배인이 휘청거리며 울먹였다.

“대인, 계산이 틀렸습니다. 그게 아니라······.”

사천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틀렸다는 겁니까?”

“그게······ 제가 말한 가격은 1만 냥이 아닙니다.”

지배인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1천 냥을 말한 것입니다.”

사천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사천립을 대신해 3 황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계약하지.”

전혀 놀라지 않은 모습을 보니 3 황자는 이미 마음속에 모든 계획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지배인은 이미 가게를 팔려고 모든 준비를 마친 듯 관부 인가를 받은 중개인에게 들어오라고 하더니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매매 금액을 쓸 차례가 되자 3 황자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금액은 1만 6천 냥으로 적게. 그 정도 가격이면 너무 싸게 파는 건 아니지.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금액의 2할을 먼저 주겠네. 팔 마음도 없었던 술집을 파니 자네 사장의 속이 얼마나 쓰라리겠는가. 2할의 은전으로 쓰린 속을 달래 줄 약을 사서 먹도록 하게.”

평민 복장을 한 3 황자에게서 존귀한 자태가 드러나자 놀란 지배인은 감히 뭐라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약서에 양측이 지장을 찍고 내일 남은 대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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