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사천립은 심복인 만큼 범한이 북제 쪽을 말한다는 걸 알아듣고는 긴장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곰곰이 북제 쪽을 생각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곧 있을 황실 금고 공개 입찰 일이 떠올랐다. 만약 범한이 명씨 집안과 하서비가 낙찰 경쟁을 하는 데 금전적으로 도와주려 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금이 있어야만 했다.
“대인, 황실 금고 일로 들어갈 돈이 많으니 기생집 개업하는 일은 늦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게 필요한 돈과 황실 금고 낙찰에 필요한 돈은 자릿수부터가 다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네. 그리고 개업을 빨리 서두르려는 이유는 첫째로 그 일에 흥미가 있으신 3 황자마마가 소주에 계실 때 하면 일을 편리할 수 있고, 둘째로······.”
그는 경도에 남아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 말했다.
“둘째로 강남 기생들이 우리 범씨 집안에서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하루라도 일찍 할 수 있으면 일찍 해야 하네.”
이 말을 거짓이 아니었다. 경도 포월루는 규칙을 정하고 석청아가 관리하면서 여건이 상당히 좋아졌다. 기생들이 몸을 파는 장사를 하는 건 바뀌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기생들은 내야 할 공제금도 줄었고 정기적으로 의원에게 진찰도 받았으며 듣도 보도 못한 ‘노동 계약’도 맺었다. 이에 포월루 기생들은 범한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었고 이 일이 밖에 알려지면서 경도 기생집들에 진취적이고 건전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니 포월루가 만약 강남에 분점을 연다면 강남 기생들도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었다.
* * *
범한은 소금 상인이 내어 준 장원에 돌아와서 사사가 건네준 뜨거운 국을 마시니 술도 깨고 몸도 따뜻해졌다. 그는 먼저 책상에 놓인 보고서를 읽고 별일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사사에게 먼저 방에 들어가 자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나가 다른 방문을 두드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호위 무사와 6처 검수들이 급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해당타타가 자다 깬 듯한 얼굴을 내밀자 범한은 놀라 물었다.
“이렇게 일찍 자는 겁니까?”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표시를 한 뒤 연기가 나지 않는 등잔을 밝혔다.
“이 상인 집의 물건들은 전부 아주 고급스러운 것들뿐입니다. 이 침대도 어찌나 편한지. 대인이 오늘 밤에 환영 연회에 갔으니 분명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올 거라 생각해 먼저 잠들었습니다.”
해당타타의 모습을 눈여겨 바라보던 범한은 그녀가 얇은 옷만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많이 껴입어야 합니다. 낭자의 경지가 높은 건 알지만 찬바람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해당타타가 대꾸하기 귀찮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온 이유나 빨리 말해요.”
자신이 뭘 말하러 왔는지 잊어버린 범한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그가 배에 오른 뒤 해당타타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오후에 신출귀몰하게 정원에 나타났었다. 그는 자신이 해당타타가 방에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북제 성녀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려고 온 것인지 생각했다.
“나는 취하도록 마시는 게 쉽지 않아요.”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난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낭자도 내가 죽는 걸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이 아니면 취하지 않아요.”
“그럼 대인은 집 안에서만 취하게 마십니까?”
해당타타가 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에 묻자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취했을 때 지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 앞에서만 취할 수 있지요.”
범한의 의도를 알아채고 미소를 짓던 해당타타는 순간 그가 불쌍해졌다.
“굳이 거짓말할 것 없어요. 지난번 상경성에 있는 술집에서······ 취한 적이 있잖아요.”
그때 북제 상경성에서 해당타타와 술을 마시던 범한은 인사불성이 되어 춘약에 중독되는 바람에 다시 태어난 이래로 가장 큰 일을 치를 뻔했었다.
그때 일이 떠오른 범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낭자를 믿고 그런 건데······.”
말을 하던 그는 해당타타가 맘 편히 취할 수도 없어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위풍당당하게 큰소리를 쳤다.
“어렸을 때는 항상 취했었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물었다.
“그때는 그럼 그······ 장님 대사가 항상 옆에 있어 줬던 건가요?”
범한이 대답하지 않자 해당타타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대인은 고주망태가 되면 시흥이 폭발한다고 하던데. 경국 황궁에서 취했을 때 시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지었잖아요. 설마 그것도 거짓으로 취한 척했던 건가요?”
범한이 이런 재미없는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은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해당타타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일어나더니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8월부터 준비를 시작하셨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일 때문에 아버지께서 국고 은전을 꺼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인은 십여만 냥의 은전이 있으면서 너무 어리석게 행동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대인이 강가 환영회에서 위엄을 보이려고 그랬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그 말에 범한은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부득이하게 그렇게 한 건데 그 자세한 내막을 어떻게 자세히 말해 줄 수가 있겠어?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고.’
“하지만 쓸모없는 은전을 가지고 있어서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
“대인은 출세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이렇게나 많은 은전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해당타타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대인과 대인 아버지의 봉록을 꼬박 백여 년은 모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인데 관리들에게는 어떻게 해명하려 하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범씨는 명문가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집안 사업이지요.”
“뭐요? 집안 사업으로 이렇게 많은 은전을 쉽게 얻을 수 있다니······ 설마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겁니까? 도찰원 어사가 대인을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설사 집안에 이렇게 많은 돈이 없다고 해도 2년 동안 내가 장사를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기생집 하나에 서점이 십여 개면······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 거죠?”
범한이 운영하는 상점을 세어 보다가 해당타타가 호기심에 물었다.
“제 아우의 재물을 긁어모으는 능력을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물론 제가 2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요. 모두 그 상자 안에 담아 놨습니다. 경도에서 떠나면서 은괴를 마련할 때 아버지께서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저도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범한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설명했다.
“일이 끝난 뒤 뇌물 받은 은전을 깨끗한 은전과 함께 섞는다면 조정에서도 제가 뭐라 하지 못할 겁니다. 은전을 충분히 모으기 위해서 제 명의로 된 상점에서 은전을 모두 긁어모아서 지금 경도 금고가 텅텅 비어 있거든요.”
범한의 계획을 알게 된 해당타타가 경멸하는 눈빛을 지었다.
“대인과 같은 지위에 있는 분이 어떻게 뇌물을 세탁할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마다······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것이지요.”
“은전을 상자에 넣는다고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 상태라서 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그 돈을 어쩔 생각입니까?”
범한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낭자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귀여운 황자마마도 계시고요. 이번에 마마께서 태평전장에서 상당한 금액의 돈을 융통하셨는데 제가 필요할 때 꺼내 써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지금에야 비로소 책략과 같은 방면에서는 자신이 범한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실감했다. 교활한 수단을 활용해 돈을 긁어모으는 방면에서 그녀는······ 범씨 집안사람들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주시할 수는 있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인물이라 알려진 범한과 해당타타가 깊은 밤에 방 안에 앉아 은전, 은표, 전장, 돈세탁과 같은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황당하면서도 웃기는 장면이었다.
한편 촛불이 높이 걸린 저택 정당에는 앞으로 강남에서 범한이 펼칠 정무 을 보여주는 상자가 보란 듯 놓여 있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마다 이 상자에 저절로 시선이 갔지만 어둠 속에서 지키고 있을 호위와 6처 검수들이 두려워 십여만 냥의 은전을 건드는 사람은 없었다. 천하에 악명 높은 도둑이나 돈 욕심 많은 좀도둑도 정당에 놓인 상자를 건드느니 차라리 관아 창고에 든 은전을 훔치는 게 더 안전하다는 걸 알았다.
활짝 열려 있는 상자는 조금의 숨김도 없이 모두에게 솔직한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 가득 담긴 눈처럼 하얀 은괴는 사람을 혼을 빼앗을 만큼 밝은 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 * *
며칠 뒤 강남로 전체를 시끌벅적하게 만든 흠차 대인 범한이 마침내 소주에서 떠났다. 부하들을 이끌고 관도를 따라 남서쪽 황실 금고 전운사 소재지로 길을 나선 것이다. 3 황자는 소주성에 남았지만 관리들로서는 범한보다는 어린아이 하나 상대하는 게 더 쉬웠기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3 황자는 관리들이 자신을 어린아이로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걸 몰랐다. 만일 그 사실을 알았다면 거친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관리들의 혼을 쏙 빼놓았을 것이다.
사실 3 황자는 범한이 자신을 황실 금고로 데리고 가지 않아 약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과거 섭가의 것이었던 황실 금고는 경국의 안정과 발전을 간접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니 경국은 황실 금고에 기대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실 금고는 조정에서 가장 엄격하게 관리하는 곳이었고 심지어 황궁보다도 경비가 삼엄했다. 이에 백성들은 벼락이 바깥을 지키고 천신이 안을 지키고 있다고 알려진 황실 금고를 한 번 보는 걸 평생의 바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3 황자는 비록 황자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황실 금고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제가 특별히 허락하지 않는 이상 황자들도 황실 금고를 볼 자격이 없었다. 이에 3 황자는 이번에 범한을 따라 강남에 내려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황실 금고를 볼 수 있다고 들떠 있었는데 범한이 자신을 소주에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
퍽! 소리와 함께 학식이 풍부한 중년의 서생이 울며 기어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3 황자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부황께서 내 스승으로 지정한 범한이 도망을 쳤으니 너라도 맞아!”
집안 종들은 숨을 죽인 채 속으로 생각했다.
‘흠차 대인이 떠났으니 누가 3 황자를 벌할 수 있겠어? 심지어 총독부에서 초청한 교사 선생도 발길질을 당하고 있는데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분풀이를 하던 3 황자는 사람들이 복도 밖으로 도망치자 화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그의 눈에 범한의 제자인 사천립이 보였다. 3 황자가 아무리 성격이 더럽다고 한들 범한이 아끼는 제자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사 선생은 왜 자리에 남아 있는 겐가?”
사천립이 짐짓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소신과 함께 나가 바람 좀 쐬시지요.”
3 황자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소주성에는 놀 만한 곳이 없는 거로 아는데.”
사천립이 송구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마마, 스승님이 요 며칠 동안 해야 할 공부를 모두 계획해 두시고 반드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마께서 다 하지 않으시면 어찌 되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마마를 데리고 놀러 갔다는 걸 스승님께서 아신다면 불같이 화를 내실 것입니다.”
3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그거야 하면 되는 거지.”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사천립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사 선생은 왜 스승님을 따라 황실 금고에 가지 않고 소주에 남은 것인가? 여기서 뭘 하려고?”
사천립이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우물쭈물하더니 잠시 뒤 씁쓸한 미소를 띠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서도 스승님께서 제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3 황자가 두 눈을 반짝이며 슬며시 떠보았다.
“그렇다면······ 포월루를 소주에서 열겠다는 건가?”
사천립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3 황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사천립이 소주에서 기생집을 여는 걸 도와주는 게 이 집에서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경도 포월루 지분을 뺏긴 데다가 범한도 겉으로만 도덕군자인 척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3 황자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