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378화 (378/1,108)

378화

향을 피울 탁자가 놓이고 성지를 청했다. 검이 번쩍하자 죽붕 안에서 관원들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모든 의식이 끝나자 범한은 서둘러 강남로 총독 설총을, 다음으로 순무 대인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런 후 3 황자와 함께 공손하게 설청에게 인사를 했다.

설청은 팔을 들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고 허리를 깊숙이 굽혀 하는 인사를 3 황자에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신분은 되었다. 그런데 강남로 총독은 말로만 듣던 범한 제사가 의외의 인물이어서 잠시 기쁨의 눈빛을 반짝이던 중이었다. 범한은 권력을 쥔 신하이나 다른 문인들처럼 고상한 척도 하지 않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도 기꺼이 해서였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순무가 서둘러 몸을 굽혀 답례를 했다. 그러자 설청도 앞에 있는 ‘친구’가 답례를 마칠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서둘러 두 사람을 부축하며 말했다.

“범 대인, 부디 허물없이 대해 주게나.”

범한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는 옆에 있는 셋째가 설청 대인과 마주한 상태에서 난처해하고 있어 범한은 순간 곤란했다.

그러자 설청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관은 강남으로 오기 전 서각에서 학사로 있었습니다. 한데 형편없는 품계는 아니었지요. 3 황자마마께서 지금보다 더 어리셨을 때 그때 본관에게 자주 장난을 치셨지요. 한데 이미 몇 년 지난 일이라 마마께서 기억을 하고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3 황자가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고는 설청에게 다시 제자의 예로 인사를 올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께서 매년 경도로 돌아와 보고를 하면 부황께서 제자인 나에게 댁으로 가 인사를 하도록 하셨지요. 그러니 어찌 잊었겠습니까?”

범한은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어 속으로 찬찬히 따져 보았다. 경도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설청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나와 범 대인도 연결된 게 있었군.”

범한이 이 높은 관리 앞에서 다 아는 체할 수 없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인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후배는 대인이 초면입니다.”

설청은 상대방의 시원시원한 점이 마음에 들어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본관이 향시에 급제했을 때 시험관이 임 재상이셨네. 그러니 항렬을 따진다면 자네는 나를 형이라 불러야 할 걸세.”

범한은 이제야 이해를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미 총독이란 높은 직위에 있었으니 과거의 인연은 그냥 해본 말일 것이다. 더군다나 범한이 아무리 철면피에 속이 검고 대담하다고는 해도 여기에 맞장구를 치기엔 쑥스러웠다. 총독과 호형호제라니. 아무리 충분히 그럴 만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는 해도 나이와 경력 면에서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났다.

일행은 죽붕 안에서쉬고 있었다. 범한과 설청은 길을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설청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황제 폐하께서는 건강하신지 물었다. 결국에는 다 형식적인 쓸데없는 말뿐이었지만 둘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지고 친해졌다. 범한은 1품의 고위 관료를 바라보고 있다가 상대방의 수척한 얼굴에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수심을 발견했다. 이에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금세 이유를 알았다.

그가 총독으로 있는 강남에 갑자기 상주 흠차 대신이 나타나서였다. 이 일은 어느 총독일지라도 견디기 힘들 터. 하물며 이번 흠차 대신은 황실 금고까지 이어받지 않았나. 어쩌면 경도 귀인들과 큰 마찰이 일 텐데, 아무리 총독이 고위직이고 황제 폐하께 신임받고 있어도 결국에는 중간에 낀 입장이니 총독 본인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설청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심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은 범 대인, 2년 동안 강남에 있어야 하니 고생이 많을 거네. 비록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는 건 매한가지라도 강남보다는 경도에 있는 게 좋지. 강남이 번화한 곳이기는 하나 오래 머물 곳도 아니고. 2년 후 나도 황제 폐하께 퇴직을 신청하고 경도로 돌아가 낚시나 할까 한다네. 황제 폐하 근처에 있는 게 강남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거든.”

범한은 상대방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듣고는 웃으며 대꾸했다.

“황제 폐하를 대신해 이곳을 책임지며 대인께서 고생도 많이 하시고 공도 많이 세우셨지요.”

설청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범 대인, 어디 머물 곳은 정했는가? 소주성에는 염상이 많은데 누구든 기꺼이 저택을 내줄 걸세. 그중에서 한 군데 고르게나.”

염상이 부유한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화려한 저택을 공손히 바칠지는 범한도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거절했다.

“그건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일이 경도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이 후배, 늘 마음이 불안할 것 같습니다.”

범한이 소탈하게 말하자 설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시인은 이런 게 안 좋다니까. 뭘 하든 다 가리려고 하니 말이야. 그런데 뱃길에서 은전을 거둬들인 건 왜 대놓고 했을꼬?’

범한이 간절하게 부탁했다.

“대인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과거에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는······ 어떻게 묵을 곳을 정했습니까?”

설청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 대인, 자네 신분은 과거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와 비교할 수 없네. 어떻게 정했느냐고 묻는다면 일단 황실 금고가 정해 놓은 관저는 저 멀리 민(閩) 지역에 있다는 것부터 말해야겠군. 한데 요 십여 년 동안 정사 대인 중 그 누구도 그곳에서 머물지 않았다네. 자네 전임인 황 대인도 오랫동안 신양에 머물렀거든.”

신양이란 두 글자를 내뱉을 때 강남 총독은 무심코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범한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조정에서 정한 관저에서 머물지 않아도 된다고요?”

질문같이 들리지만 실은 염탐해 보는 것이었다.

설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대인께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항주에 있었습니다. 소주에 계신 대인을 찾아뵙지 않은 건 제 불찰입니다. 하온데 그 저택이 꽤 괜찮거든요. 만약 머물 곳을 제가 고를 수 있다면 저는 항주에 있고 싶습니다.”

설청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상대방이 항주에 머문다고 말할 줄 생각도 못 하고 있던 터다. 그는 침묵하고 있는 범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제일 잘나가는 권신(權臣)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강남 총독의 관저인 강남 총독부는 소주에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는 범한이 소주에 머무는 걸 꺼렸다. 정무에 간섭받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높은 서열의 관리 둘이 한 지역에 있으면 강남로 관원들은 골치 아파할 것이고, 자신도 사무를 처리하는 데 여러모로 방해가 될 테니.

범한의 간절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설청이 눈에 이채를 띠더니 미소 지었다.

“당연히 무방하지. 범 대인이 묶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묶으면 되는 걸세.”

범한이 웃었다.

“물론 항주에서 지내더라도 자주 소주에 와야 하니 대인께 몇 끼 얻어먹게 될 것입니다. 대인 관저에 북제의 유명 요리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도 사람들이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저도 한번 맛보고 싶습니다.”

설 총독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본관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데 범 대인도 같은 취향일 줄이야. 무엇 하러 다음을 기약하는가. 오늘 저녁에는 일단 여러 동료들이 대인과 황자마마를 위해 환영회를 준비해 뒀다네. 그러니 내일 대인을 우리 집으로 초대함세.”

범한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은근히 약속하자 강남 총독도 홀가분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웃음소리는 죽붕이 있는 곳까지 퍼져 나갔다. 강남로 관원들이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총독 대인과 제사 대인이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순간 한시름을 놓고는 속으로 작은 범 대인은 과연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감탄했다. 은근히 걱정했던 힘겨루기 국면에 접어들지도 않았을뿐더러, 대체 범 대인이 어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총독 대인을 저리도 기분 좋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범한 대인이 설청 총독 대인의 귓가에 작게 몇 마디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설청이 살짝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잠시 엄숙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조금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싸늘하게 말했다.

“범 대인, 너무 걱정 말고 본관의 체면도 따지지 말게. 내 평소 황제 폐하의 인(仁)과 화(和)의 도리를 항시 유념하고 있으니 내 잠시 용인함세. 범 대인의 생각이 지극히 옳아.”

범한은 상대방이 동의해 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소주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인심을 베풀어 설청도 그에 상응하는 화답을 한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진심을 담아 고마운 마음을 전한 후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 * *

범한이 몸을 일으키자 죽붕 내부가 잠시 조용해졌다. 강물에 반사된 햇살이 안으로 들어와 아름답게 반짝이고 살짝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모두 범한을 주시하며 흠차 대인께서 부임 선언을 어떻게 할지 궁금해했다.

“본관은 남들과는 다릅니다.”

범한이 주변에 있는 관원들을 둘러보고는 웃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비록 대인 여러분들과 함께 일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나에 대해 알려진 바가 있어 모두 그 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내 성격의 장점이라면 참신한 게 있고, 단점이라면 소란을 좀 잘 피우고 경중을 모르는 젊은 놈이랄까요.”

그러자 관리들이 껄껄껄 웃으며 흠차 대인은 소탈하니 말을 참 재밌게 잘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범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혀 겸손하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이따위 체면 챙기는 빈말은 그만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옥체 강녕하시니 여러분은 그분의 안부를 물을 필요 없습니다. 황태후마마께서도 강녕하시어 경도에 그 온화함을 비춰 주고 계시니 이 점에 대해서도 더 첨언할 필요 없습니다. 대인들은 조정에서 강남이란 중요 지역을 다스리란 중임을 부여받은 분들입니다. 요 몇 년간 세수가 모두 이곳에서 나왔지요. 오는 길에 본 민생과 시장 풍경은 진짜였습니다. 모두 힘들게 살고 있으니 내가 더 말할 필요는 없겠고······.”

강남 관원들은 범한이 줄곧 잠행했음을 아는 터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가 몇 마디 더 해주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 올리는 비밀 상주문에 그 말도 함께 언급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범한이 또 태도를 바꾸었다.

“대인 여러분의 장점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잘못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범한은 미소를 지었지만 죽붕 안에는 순간 싸늘한 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인정 없는 행동이기는 하나 왜 그런지 말은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대인 여러분이 본관의 신분을 잊은 것 같아서입니다.”

범한의 신분이 뭔데 이럴까? 시선, 거중랑, 태상사 이런 게 아니라······ 시커멓고 음산한 감찰원을 뜻하는 거였다. 한데 관원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몰라 깜짝 놀랐다.

‘우리가 보내 드린 은전은 제대로 간 거 같은데 대체 뭘 더 하시려 그럽니까?’

‘감찰원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죠!’

“육로로 오는 동안 사주와 항주를 거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는 큰 강을 따라왔지요.”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을 이어 갔다.

“듣자 하니 큰 강을 은강(銀江)이라고 불렀더군요. 여러 대인이 그 배로 적지 않은 선물과 은전을 보냈다지요. 또한 적지 않은 백성들을 동원해 줄을 끌도록 했다던데······ 대인 여러분들의 두터운 마음, 본관은 고맙습니다. 한데 그렇게 대놓고 뇌물을 주시기에 본관은 정말 탄복했습니다. 여러분의 담력이 정말로 어마어마해서요!”

관원들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범한은 몸을 돌려 강남 총독 설청을 향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 쥐고 예를 표하고는 미소 지어 보였다.

“오늘 총독 대인께서 본관과 계실 때 격노하시며 본관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본관은 영문을 알지 못해 두려웠을 뿐이죠. 다행히 총독 대인께서 본관이 그간 사정을 모른다는 걸 아시고 사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여러분이 본관 몰래······ 그런 대담한 일을 벌였더군요.”

범한이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며 싸늘하게 웃었다.

“감찰원은 조정 관료들을 감찰하고 탐관오리를 잡아들입니다. 모두 담이 크게도 본관에게 뇌물을 보냈으니······ 내가 경도를 떠났다고 해서 이 손에 쥔 칼로······ 아무도 못 죽일 줄 아셨던 것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