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사실 범한은 해당타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은근히 불안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진정성 보이기’라는 원칙을 지키고 있던 터라 해당타타와 있을 때는 최대한 흉금을 털어놓고 진심으로 대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게 말하기도 했다. 범한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해당타타라는 친구를 정말 소중히 여겨서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여인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어 자신의 강력한 조력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서였다. 어찌 되었든 처음에는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기에 범한은 해당타타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호숫가에 다급하게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보니 준마 한 필이 호숫가에 깔린 석판 길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날 동안 감히 관원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팽씨 장원 입구에 당당하게 서버렸다. 낯익은 사람인 것 같은 관원은 말에서 내리더니 몹시 화를 내며 문을 두드려 댔다.
배에서 내려 호수 기슭으로 올라온 범한은 궁금한 마음을 안고 장원을 향해 걸어갔다. 해당타타는 범한 뒤를 따르다가 호숫가에서 낚시 중인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범한은 인사를 나눌 마음이 없어 저 멀리 보이는 준마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을 타고 온 관원은 이미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끈으로 묶어 두지도 않고 밖에 내버려 둔 걸 보니 급하긴 급했나 보다.
말은 돌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콧김을 뿜으며 바닥에 난 파릇한 풀들의 향을 맡고 있었다. 풀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인데 안타깝게도 입에 채운 마구를 벗겨 주지 않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대인.”
문 앞에 있던 호위 무사가 범한에게 인사를 했다. 수하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잠시 상황 설명을 하려 하자 범한은 손을 내저어 저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자신을 찾아온 관원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1년 동안 못 봤는데 성정은 그대로인 걸 보니 살짝 짜증이 밀려들었다.
장원 깊은 곳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전해져 왔다. 가림벽을 돌자 소리가 갑자기 더 크게 들려왔다. 온통 질책하는 말들로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실망감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향해 자조적으로 웃어 보였다.
“별일 아니에요. 내 체면을 봐서 들어오지 말아 줘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쪽으로 난 정원과 이어진 작은 길로 들어갔다.
범한은 옷을 고쳐 입고는 한동안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인내심을 발휘해 들어 보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두 번 기침을 한 후, 스승의 위엄을 한껏 담아 뒷짐을 진 자세로 높은 문턱을 넘어 대청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청에는 두 사람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마치 닭 두 마리가 꼿꼿하게 서서 대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은 사천립이었고 다른 한쪽은 오랜만에 보는 양만리였다.
작년 춘시에서 양만리는 3갑(三甲: 3등) 안에 들었다. 모두 그를 범한의 직계 일파로 여기는 터라 이부(吏部) 주사가 그를 강남 지역의 모 부유한 현의 지현(知縣)이라는, 수입을 짭짤하게 올릴 수 있는 자리에 바로 임명해 버렸다. 이렇게 된 건 이부 상서 안행서의 훼방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만리는 범씨 가문의 위엄에 기대어 곧장 주동(州同)이나 운판(運判) 자리에 갈 수도 있었다.
양만리는 스승 범한을 위해서라도 분발했다. 열심히 정사를 펼쳐 백성을 돌보고 꾸준히 학문을 닦았다. 그리하여 겨우 1년 만에 그가 통치하는 지역은 질서정연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백성들은 길가에 떨어진 물건은 줍지도 않았고, 한밤중에는 문을 닫지 않아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고을이 되었다. 가을에는 이부로부터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리사로부터는 ‘상하(上下)’라는 심사 등급을 받았다. 비록 연한이 차지 않아 진급은 할 수 없었지만 그는 현재 당당한 6품 관원이었다.
한편 범한 문하생 4인방 중 후계상과 성가림은 현재 각각 교동로와 남방에서 관리로 지내고 있으며 들리는 바에 따르면 매우 괜찮은 관리였다.
범한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서로 다투고 있는 사천립과 양만리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양만리의 기세가 사천립을 압도하고 있었다. 잠시 들어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아 범한은 소리 내어 싸늘하게 웃었다.
양만리가 고개를 돌렸다. 범한이 보이자 잠시 멍하니 주춤거리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범한의 예상과 달리 바로 몸을 돌리고는 계속 사천립을 공격했다.
“천립 형님, 벼슬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스승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이 모자란 게 있으면 채워 주고 힘써 일하는 것도 만백성들을 위한 일이니까요. 하나 지금 스승님께서는 분명 잘못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곁에 있으면서도 일깨워 드리지 않는 겁니까? 제자 된 도리로 우리가 간언과 직언을 하는 게 정도입니다. 그런데 강남 일대를 돌면서 왜 이리 심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입니까? 모두 범한 제사 대인이 능력 있는 관리라고 칭송하는데 어찌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아직 모르실 수가 있냐고요. 은전을 그리 독하고 광명정대하게 걷어 들이고 계시는데 말이죠!”
양만리는 분명 반어법으로 말하는 중이었다. 그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큰 강이요? 제가 보기에는 은전 깔린 강이니 은강이라 불러야겠더군요. 뱃길을 지나면서 은전을 싹싹 쓸어 담고 있는데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뭍을 밟지도 않고 말입니다!”
양만리는 갈수록 더 심하게 화를 냈다. 급기야는 소맷자락을 내젓기까지 했다.
“관리로 임명되었으면 그 지역민을 위해 일해야죠. 작년에 스승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서한에 좋은 관리가 되고 좋은 사람이 되라 하셨거늘······ 한데······ 한데 그 좋은 관리란 게 그런 식으로 하는 거요? 나는······ 이제 사람 볼 낯도 없다고요! 사천립! 당신은 날 너무 실망시켰어! 이런 부패한 벌레! 앞잡이 같으니!”
부패한 벌레와 앞잡이라는 말에 사천립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요 어린놈은 청렴한 관리가 돼 행복에 겨운 상태니 경도에서 기생집 주인 노릇을 하느라 이 몸께서 얼마나 힘든지 알 턱이 없겠지. 앞잡이라고? 지금 스승님께서 백성들의 골수나 빼먹는 호랑이라고 욕했다 이거지! 나 원 참, 양만리 이놈 관리 된 지도 얼마 안 됐으면서 간덩이가 부었군!’
순간 피가 솟구친 사천립이 반격에 나섰다.
“너는 백성의 고통도 모르는 궁상맞은 책벌레 아니더냐! 스승님께서 경도에 계시지 않았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듯싶으냐? 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아!”
양만리가 얼굴을 치켜들고는 도도하면서도 침통하게 말했다.
“내 비록 일개 현이나 다스리지만 1년 만에 내 고을 산적들을 모두 없애 민생을 안정시켰소. 작은 범 대인께서 처음에 기대하셨던 걸 이루었단 말이오.”
사실 사천립도 양만리가 왜 분노했고 직접적으로 공격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다. 그들은 작은 범 대인을 따라 경국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선비였다. 범한은 지금 감찰원에서 대권을 장악한 상태인 데다 하고 있는 일들도 누가 봐도 권력을 장악한 신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명예를 추구하는 신하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지는 중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천립은 범한 곁에 있으면서 스승이 얼마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도 더 깊어진 터라 저도 모르게 냉소를 머금으며 양만리에게 반박했다.
“산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만약 주의 병영을 자네의 부춘현 쪽으로 12리나 더 가깝게 옮기지 않았다면 그때도 자네는 성인과도 같은 말에 산적들이 놀라 도망갔을 것 같은가? 12리가 별 것 아닌 것 같지? 한데 자네 같은 보잘것없는 지현이 배겨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양만리가 놀라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니?”
사천립이 고개를 돌려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감찰원 호위 무사들이 왜 이 자를 막지 않아서 외부인에게 자신과 양만리의 언쟁을 고스란히 듣게 만들었는지 불만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 * *
이 순간 가장 무고한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범한이었다. 제자들이 싸우는 데 정신이 팔려 진짜 주인공을 한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해서였다. 범한은 사천립이 자신을 보고 말한 틈을 타 웃으며 끼어들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네. 아버님께서 자네들을 아끼시기에 주(州)를 지휘하고 있는 지인분께 서한을 써주셨을 뿐이네.”
두 사람은 그제야 범한의 음성을 듣고 동시에 놀라 펄쩍 뛰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의아해하며 물었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범한이 태양혈 주변에 손을 대고 두어 차례 문질러 눈썹꼬리에 붙여 놓은 고무를 떼자 원래의 말갛고 잘생긴 얼굴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변장한 걸 지우지 않아 흥분해 싸우는 두 사람이 범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싸우려면 문이라도 닫고 싸울 것이지. 내가 들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어쩔 뻔했나? 우리 범씨 가문에 무슨 스승과 조상을 욕되게 할 만한 큰 사건이 터진 줄 알았을 거네.”
* * *
장원 대청은 순간 안정을 되찾았다. 자신들이 언쟁을 하면서 한 말이 몽땅 범한의 귀에 들어갔으니 사천립이든 양만리든 모두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범한에게 착석할 것을 청하고는 옆으로 가서 섰다. 두 사람 다 범한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지만 스승과 학생이라는 이 황당한 조합의 사람들은 어찌 되었든 다시 제 역할로 돌아갔다.
양만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문질렀다. 그러다 갑자기 범한이 한 말 중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스승과 조상을 욕되게 한다 하셨지?’
양만리가 느닷없이 고개를 들어 크게 소리쳤다.
“대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범한이 웃긴다는 듯 양만리를 바라보았다. 양만리는 민(閩) 지역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탐관오리를 가장 싫어하는 데다 성격까지 직선적이고 화끈해 무턱대고 쳐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범한도 잘 알고 있던 터라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부춘현은 항주에서 2백 리 떨어진 곳이야. 문관인 자네가 하인도 안 달고 이리 급히 와 본관에게 대놓고 탐욕스럽고 잔혹한 호환(虎患) 같은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나. 그게 스승을 기만한 게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나?”
범한은 농담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농담의 무게는 양만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하지만 양만리는 본디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라 이를 악물고 범한 앞으로 가 양팔을 들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 쥐고 허리를 깊이 굽히는 예를 올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대인 뒤에서 시시비비를 논하는 망언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범한은 이자가 왜 이렇게 빨리 태세 전환을 하는지 의아했다.
한데 양만리는 바로 태도를 바꾸어 다시 뻣뻣하게 말했다.
“하오나 이제는 스승님께서 돌아오셔서 제 앞에 계시니 이 제자,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제가 윗사람에게 기탄없이 직언한다는 걸 아실 테지요.”
“말해 보게.”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마디 더했다.
“이런 괴팍한 인사 같으니.”
그러나 양만리는 자신의 성격에 대한 범한의 품평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대인, 이번에 강남까지 내려오신 건 조정의 재정을 관리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제자, 대인께서 하시지 말아야 할 게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
범한은 깜짝 놀랐다. 소문무 그 찢어 죽일 놈이 은전을 거두고 다니는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할 줄 알았는데 무려 세 가지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