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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73화 (373/1,108)

373화

경력 6년에는 연초부터 북제와 남제 두 나라에서 신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일단 날씨가 추운 탓에 논에 있는 곡식은 싹이 트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알곡이 두 배로 열리는 벼, 흰 물고기, 기린 같은 상서로운 징조를 암시하는 것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주에서 산을 깎을 때 동으로 만들어진 벽이 발견되었다. 사주에서는 하천 제방을 수리하던 백성들이 구름무늬를 가진 거대한 검은 거북이를 발견했고, 강남 논에서는 매와 붉은 기러기가 하늘 가득 나는 일이 일어났다.

동으로 된 벽이든, 구름무늬 거북이든, 매든 모두 상서로운 것임은 분명했다. 이에 각지 관원들은 속속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아첨을 해댔다. 하지만 경도에 있는 황제는 콧방귀가 뀌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상서롭다고 하는 후안무치한 풍조는 작년에 북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산에서 첫눈이 내린 후 어느 나무꾼이 흰 사슴, 흰 늑대, 흰 여우를 보았다며 나라에 길조가 들었다고 북제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4대 종사 중 하나인 고하는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 준 징조라고 했다. 각국의 군주가 나라를 잘 다스렸음을 하늘이 인정해 준 것으로 인간과 하늘의 마음이 합일된 현상이라고 했다. 이에 그는 다시 산을 열고 상경성 밖에 있는 한 사당에서 여자 제자 하나를 거두어들였다. 그 여자 제자는 바로 훗날 황궁으로 들어가게 될 사리리였다.

시간이 지나 이 풍조는 남쪽으로 내려왔고 경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경국 황제는 귀신 따위는 숭배하지 않는 강건한 인물인지라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다 흠천감 감정이 하늘을 관측할 때 ‘경성경운(景星慶雲)’을 보았다며 매우 신이 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경국 황제는 그제야 그 사건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상서로운 징조는 길조라고도 부르며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경문(經文)에는 하늘이 인간계 통치자에게 만족했을 때 보여 주는 작은 조화라고 주가 달려 있었다. 백성들은 길조가 하늘의 뜻이 전달된 것이라 믿고 있었다. 상서로운 징조는 그 종류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예를 들어 비와 바람이 순한 것, 알곡이 배로 생기는 벼가 나타난 것, 감천(甘泉)이라는 물이 솟는 것 등등이 있었다.

상서로운 징조는 모두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기린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서(嘉瑞)에 속했다. 이를 뺀 나머지의 등급을 매기면 각각 대서(大瑞), 상서(上瑞), 중서(中瑞), 하서(下瑞)였다.

흰 늑대, 흰 여우는 상서에 속했고 매, 붉은 기러기는 하서에 속했다. 흠천감은 이를 두고 크게 기뻐하며 ‘경성경운’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하늘에 신기한 구름이 나타났다는 의미였다. 이는 확실히 대서에 속하는 상서로운 징조였다. 더군다나 ‘경운’이라는 말에는 경국의 ‘경’ 자가 들어가 있으니 경국 황제는 조심하고 의심하려 했어도 점점 득의양양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황제도 사람인지라 이러한 아첨은 좋았던 것이다.

그러니 올해는 분명 비바람이 순한 한 해가 될 것이리라.

그렇다면 좋은 한 해가 되려면 당연히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될 터.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북제와 경국은 더욱 긴밀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양국은 곧 국혼을 치를 예정이었다. 1 황자와 북제 큰 공주의 화촉동방이 임박해 오자 북제에서는 큰 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이번 북제 사절단 때문에 경국 사람들은 놀라움과 영광스러운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왜냐하면 이번 혼인의 증인으로 북제 국사 고하가 사절단과 함께 왔기 때문이었다.

고하 대종사가 천하에서 초월적인 지위를 지닐 수 있었던 건, 우선 무공의 최정상에 있는 4대 종사 중 한 사람이어서였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천일도가 천하 각지 사원과 세상을 주유하는 고행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였다. 신묘는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암암리에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며, 고하는 무공 강자로서의 지위보다 신묘와 관련되었기에 더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번 일로 경국 사람들은 자랑스러워했지만 접대 관련 절차를 다시 짜야만 했다. 섭류운이 종적을 감춘지라 고하를 맞이해야 할 사람으로는 경국 황제 한 사람뿐이었다. 황제께 직접 나서 달라고 요청해야 했지만 경국의 홍려사 관원들에게는 그만한 담력이 없었다.

관원들이 우왕좌왕하자 결국에는 보다 못한 황태후가 직접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녀는 과거 장묵한 대가에게 적용했던 규율을 적용했다. 즉 고하 대사를 황궁으로 초청해 황태후가 직접 맞이하기로 한 것이다.

한데 고하 국사는 경도에 도착한 후 황태후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경묘로 갔다. 자신의 신분에 맞게 처신을 한 것이었다.

고하는 어찌 되었든 대종사였다. 그러니 아무리 타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국 사람들은 그에게 그에 맞는 존경심을 표했다. 그런데 존경심을 넘어서서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이에 사람들은 ‘양국이 국혼을 치르는 게 대사이기는 하나 저 노인이 여기까지 올 일은 아니지 않은가?’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북제 사절단이 경도로 들어온 지 수일이 지났을 때 고하 국사는 직접 경국으로 온 진짜 이유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제 황제가 친히 국서를 보내서였다. 국서에서 북제 황제는 경국과 친선을 도모하길 바란다며 작년에 초안으로 정한 협정의 기한을 만년으로 연장했다. 그리고 양국이 상하를 따지지 말고 서로 형제로 부르며 우의를 다지고 대대손손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중요한 협상 자리니만큼 고하가 직접 나서야 했다. 경국 황제는 북제 동업자가 보낸 서한을 손에 쥔 채 수일간 망설이다가 드디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쩌면 고하의 체면을 3할 정도 봐주었을지 모른다.

소식이 알려지자 천하가 기뻐했다. 경국 사람들은 무를 숭상했지만 평화롭고 태평한 날을 더 좋아했다. 다만 군 측에서는 은근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지금의 경국 조정은 천하 통일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맞았을 정도로 강성한데 종이 몇 장으로 자신들을 묶어 놓았다며 기분 나빠했다. 비록 불만의 정도는 심하지 않지만 씩씩거리기는 했다.

한데 진씨 가문의 군 측 우두머리만은 세상 돌아가는 판도를 분명히 보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최측근 몇몇에게 가끔씩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지금 북제의 회복세가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고 있네. 몇 년 지나면 군대로 그들을 이기기 쉽지 않을 걸세. 이 협정은 종이 몇 장에 불과한 것이니 때가 되면 찢어 버리게 될 거야. 우리 황제 폐하께서 과거에 그러신 적이 또 있지 않은가!”

한편 고하가 경도까지 온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이 일로 경도 관원과 백성들을 깜짝 놀랐다. 그가 상서의 외동딸, 즉 범씨 가문의 아가씨를 제자로 거두러 왔기 때문이었다.

고하 국사가 제시한 이유는 충분했다.

음양이 교합하는 날로부터 앞뒤 몇 달 동안 하늘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내려왔으니 이는 하늘의 어짊을 베풀어 주신 것이었다. 천일도는 천인합일의 도를 따르므로 하늘의 뜻에 따라 인간사의 일을 행해야 했다. 이에 인간 중에서 진기한 꽃인 자를 선택해 정성껏 길러 만백성에게 복을 주어야 했고 이것이야말로 정도(正道)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행동이었으므로 국경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북제에서 상서로운 일이 있어 제자를 거두었으니, 남쪽 경도에서도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는 건 곧 이곳에서도 제자를 하나 더 거두어야 하는 뜻이었다.

그래서 고하는 자신이 친히 경도까지 온 것이라고 했다.

천일도 종사 고하가 다시 산을 열고 제자를 받은 일은 이미 작년부터 천하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을 자국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경국 사람들은 ‘천일도의 마지막 여자 제자가 경도에서 나올 줄 어찌 알았겠어?’ 하며 신기해했다.

그러고는 이내 ‘왜 범씨 가문의 아가씨일까?’라며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저 멀리 강남에 내려가 있는 범한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범한이 아무리 잘나간다 해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고하 국사를 사주할 능력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고하는 제자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중을 들던 일부 내관들이 사람들에게 흘린 이야기는 있었다. 고하 국사가 경도로 여행을 왔다가 태의원 문 앞에서 머문 적이 있단다. 그때 그가 반나절 정도 가만히 있다가 얼굴에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는 “태의원의 어느 아낙의 심성이 선하고 온화하고 지혜가 남다르니 참으로 좋은 인재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 범약약은 태의원에서 ‘실습’ 중이었다. 몇 달 동안 배운 간호 지식과 의료의 도를 바탕으로 태의원에 있는 위중한 환자를 세심히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를 돌보느라 입술은 말라 있었고 땀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해 고생이 말도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문무는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북제 장묵한 대가의 제자가 경국에서 높은 관리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북제 국사 고하가 경국까지 제자를 데리러 오자 경국 사람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큰 동요가 일기보다는 오히려 낙관적으로 보는 측면이 더 강했다.

그런데 고하가 제자를 거두는 건 원래 큰일이었다. 더군다나 높은 관료 집안의 아가씨를 데려가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녀의 집안 어르신께도 의견을 물어야 했다. 한데 이번 일은 감히 범건 선에서는 결정해서는 안 되는, 입궁해 황제 폐하의 명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깊고 깊은 황궁 안에서 경국의 황제는 용상에 앉아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한마디 물었다.

“안지가 홍성이를 그리도 싫어하더냐?”

범건은 모골이 송연해져 어찌 답해야 할지 몰랐다.

황제의 눈에서 웃음기가 언뜻 비쳤다 사라졌지만 그는 범한이 손을 뻗고 있는 범위와 능력에 놀란 상태였다. 또한 고하가 해당타타라는 여인을 무척 아끼니 별로 걱정할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한을 강남으로 쫓아 버린 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터라 손을 내저어 허락을 해주었다.

1 황자가 혼례를 올리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무렵, 고하는 사절단은 내버려 둔 채 범약약만 데리고 경도에서 떠났다.

이렇게 되자 범씨 가문과 정왕가의 혼사는 무기한 연기되어 이제 파혼하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정왕 세자 이홍성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갑자기 흠모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에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왕은 입궁해 한바탕 난리를 쳤고 황태후가 직접 나서서 달랜 후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왕은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에 왕부에서 부리는 일꾼과 병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평소 친하게 지낸 범건 상서의 집으로 쳐들어가 앞채 뒤채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때려 부수었다. 집 안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버린 건 물론이거니와 범건이 수년간 애지중지 보관해 온 골동품들까지 무수히 망가지자 여종들은 놀라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대미를 장식한 건 서둘러 돌아온 범건 상서의 눈을 향해 정왕야가 던진 사나운 주먹 한 방이었다. 범건 상서의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들자 그제야 가슴속 독기가 조금 가셨는지 정왕은 일꾼과 병사들을 이끌고 거만하게 왕부로 돌아갔다.

* * *

강남 서호 주변에 봄이 찾아오고 실 같은 가랑비가 내렸다.

범한 일행이 항주성에서 머문 지도 근 한 달이 다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휴가를 보내고 있었지만 봄기운이 찾아온 강남에서 이렇게 죽치고 있는 건 다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그동안 감찰원의 주강남 지부는 전면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모든 일을 경도를 거쳐 처리하지 않고 서호 근처에 있는 장원으로 직접 전달했다.

이에 장원은 경도의 감찰원 본부 다음가는 감찰원 제2의 권력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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