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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72화 (372/1,108)

372화

해당타타는 조금 심란한 마음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큰 권력도 쥐고 문무도 겸비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왜 나하고 있을 때만 이렇게 시정잡배 같은 무뢰한이 되는 거야?’

이에 해당타타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몇 군데 고쳐 줄게요. 스승님께서 손을 써두셨어요. 그대로 익히고 바보가 되면 나는 책임 안 질 거예요.”

범한은 깜짝 놀라 서책을 꺼내 주고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아까 심법을 읽을 때 막히는 구절을 발견 못 해서인지 고하의 경계에 절로 탄복했다. 가짜도 이리 완벽하게 만들어 내다니. 하지만 이내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그 까까머리가 독하긴 독하다고 속으로 욕했다. 그리고 아까 ‘진정성 보이기’라는 최고의 묘수를 동원해 고하 여제자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이유도 모르고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처음부터 나를 바보로 만들 작정이었던 거예요?”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격노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여전히 차분했다.

“안지와 내가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황당한 거예요. 외부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가 놀랄 텐데 당연히 신중해야지요! 관건은 당신과 내가 서로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거지만요. 조금이라도 속이는 게 있다면 나도 섣불리 당신을 믿어서는 안 되잖아요.”

“조금 전에 정기를 전부 잃어버렸다고 털어놓지 않았다면 바보가 되더라도 그건 자초한 게 되는 거죠.”

범한은 경악했지만 착하게 행동했더니 좋은 보답을 받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해당타타가 중요 구절의 몇 글자를 고치자 범한은 그것을 다시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아주 미묘하게 아름다웠던 그림이 단청 장인이 중요한 몇 군데에 덧칠을 하자 아까보다 훨씬 더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며 온갖 생명체들이 생기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천일도 무상심법의 진면목을 보게 된 범한은 가슴이 떨려 왔다. 이대로 수행을 해나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천인합일의 도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구멍이 숭숭 뚫린 체내 경맥도 자연스레 낫게 될 것이었다. 자신에게서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던 경지가 드디어 돌아올 수 있게 되자 범한은 감개무량했다. 그리고 순간 마음이 움직여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따가 그림 한 장 그려 줄게요.”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오지랖 넓게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낭자에게 패도 비급을 주었지만 그림에 나오는 정기의 길을 따라가며 연마해야 해요. 대충 감으로 연마하다가는 십여 군데가 넘는 곳에서 피를 쏟을 거예요.”

해당타타가 멍하니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 천천히 입을 뗐다.

“언제쯤 이 세상 인재들이 서로 속이는 짓을 덜할까요? 최소한 당신과 나 사이만큼은 말이지요.”

범한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열심히 배우리다. 물론 낭자도 같이 배워야 해요.”

* * *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난처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일 수도. 해당타타가 먼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얼마나 다쳤는지 봐줄게요.”

범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다. 수술은 섬세하게 잘 마쳤지만 가끔은 제삼자가 봐줬을 때 더 정확히 진단되기 때문이다. 특히 해당타타처럼 상급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더 쉽게 문제점을 발견하고 또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줄 수 있다.

해당타타가 범한 곁으로 다가갔다. 한데 자세를 잡고 기를 끌어 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범한의 등에 있는 유문혈에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가져다 댄 게 다였다.

서재 안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고 책상 위에 있던 촛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공기 중에 갑자기 부드러운 힘의 파동이 나타났다.

해당타타는 두 눈을 감고 자기 체내에 있는 정기를 조심스레 범한의 몸 안으로 주입해 그의 상처를 살폈다.

그 순간 주변 환경이 갑자기 안정을 되찾았다. 바람도 한 점 불지 않았고 촛불도 꼿꼿이 서 있었다. 공기가 응고되어 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렇다고 진득한 느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청량했다.

9등급 상인 강자의 몸에서 정기가 밖으로 흘러나오자 주변 환경이 순식간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가 되었다. 천일도 문파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기운은 과연 신묘함 그 자체였다.

한참 후 눈을 감고 있던 해당타타의 이맛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한 상황과 맞닥뜨린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범한은 이상한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넘쳐 편안하다는 느낌뿐. 맑은 기운이 자신의 허리 뒤쪽에서 흩어지더니 빠른 속도로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따뜻한 물이 담긴 목통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랄까. 하와이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온몸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 곧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뒤에 있던 낭자가 작게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범한은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 하품을 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들면 안 돼요.”

“알았어요. 천일도는 과연 대단하네요. 병 치료를 하면서 대화까지 가능하다니 말이죠.”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치료해 주는 거라면 그냥 매일 다칠까 봐요. 마사지받는 것보다 훨씬 편하네요.”

“입 좀 다물어 줄래요?”

해당타타가 평온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갑자기 힘이 들어갈 수 있어요.”

해당타타가 위협하는데도 범한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무례하게 한마디 던졌다.

“설마 자기 남편을 죽일 셈이에요?”

* * *

끄응, 하는 소리가 동시에 두 사람 입에서 흘러나왔다. 서재 공기가 갑자기 폭발하는 것 같더니 무수한 정기가 소용돌이가 되어 체내에서 흘러나와 잠시 후 사라졌다. 그런데 전임 재상 임약보의 소장용 서적 사이로 정기가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책이며 종이가 허공에 날렸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범한과 해당타타는 모두 안전했다. 하지만 깜짝 놀라 바닥에 흩어진 종이 더미 위에 털썩 주저앉은 범한은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낭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죽이려고 했던 거예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화를 억누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내 마음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고요.”

범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욕을 퍼부었다.

‘진작 제대로 말해 줬어야죠! 나는 당신이 치료하는 동안 재밌게 대화하면 좋아할 줄 알았다고요!’

해당타타가 살짝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범한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정기가 장기로 흩어지기는 했지만 당신 설산에 쌓여 있는 정기는······ 여전히 웅장했어요. 더군다나 전에 나와 겨뤘을 때보다 더 사나워졌고요. 지금 정기를 순환시킬 경맥이 없어서 계속 쌓이기만 하는 중이에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제때 와서 다행이네요. 반년 정도 늦게 왔다면 설산과 명문이 폭발해서 정말로 끝장났을 테니까요.”

지금껏 범한에게는 스승이 둘 있었다. 하나는 오죽 아저씨고 다른 하나는 비개였다. 한 사람은 무채 써는 법을 가르쳤고 다른 한 사람은 독약을 만드는 걸 가르쳤다. 정기 수행은 줄곧 독학으로 해왔다. 그러니 정기 연마와 관련한 세부적인 지식은 정파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모자랐다. 이에 범한은 정작 자기에게 닥친 최대 위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해당타타의 말을 듣고는 자신이 줄곧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두려움이 일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현공 사당 사건이 있은 후 수련을 멈췄어요. 그런데 왜 설산에 정기가 쌓이는 거죠?”

해당타타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대답해 주었다.

“아마도 혼자 수행을 해오느라 자연스레 습관으로 굳어져 그럴 거예요. 그래서 잠잘 때도······.”

범한이 오른쪽 팔을 들어 해당타타의 말을 끊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서였군.”

범한에게 명상과 수면은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여가 생활이었다. 다른 수행자였다면 분명 그런 그를 흠모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그게 오히려 이런 험악한 지경을 초래한 원흉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범한이 음울한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도 비개 스승님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홍 태감은 알아챘단 건가?”

“네?”

범한이 어떤 높은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해당타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고생했어요.”

서재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종이가 날리고 있었다. 범한은 종들을 불러 치우라고 하기가 뭐해 해당타타와 함께 잠시 정리에 들어갔다. 진귀한 심법이 적힌 책자가 각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종이들은 그냥 무시했다.

“내일부터 연마할 거예요.”

범한이 간절함을 담아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일에서는 내가 득을 많이 봤어요. 번거롭겠지만 해당타타가 이번 달 동안은 나를 좀 보호해 줬으면 좋겠어요.”

해당타타는 잠시 호위 무사가 되어 달라는 범한의 요청이 크게 거슬리지 않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안지, 사실대로 말해 줘요. 내 사형께서 상경 서산 절벽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치셨는데, 당신 맞죠?”

범한이 잠시 침묵했다. 해당타타가 드디어 자기 체내에 있는 포악한 정기와 랑도가 경험한 정기가 매우 유사하다는 걸 알아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은 소은과 신묘와 관련되어 있어서 너무나도 큰 사안이었다. 이에 한참 후 범한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날 아침에 당신이 나를 사절단 숙소로 찾아왔었잖아요. 그때 뭔가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영원히 인정 못 하는 게 있다는 것도 알 거예요.”

“스승님께서 무언가 눈치채신 것 같아요.”

해당타타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과거 당신 어머니께서 그분께 은혜를 베푸셨다고 하셨어요.”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가짜 심법을 줘놓고도 은혜를 갚는 거랍니까?”

“아까 줬던 심법이 가짜이기는 해도 나쁠 건 없었어요. 더군다나 스승님께는 당신이 경국 황제······ 아들인 걸 아신 후 부득이하게 내리신 결단이거든요.”

해당타타가 정색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심법은 우리 문파 내부에서도 최고의 비급이에요. 그러니 범한 대인, 부디 조심해서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이따가 그거 그냥 들고 가요. 없애 버리든 말든 나는 상관없어요. 이미 전부 다 외워 뒀거든요.”

상대방의 변태 같은 기억력에 놀란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괴물 놈, 대체 어렸을 때 누구한테 교육을 받은 거야?’

이렇게 딴생각을 하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해당타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스승님께 들었는데 당신 곁에 눈먼 대사님이 계시다던데요. 제가 한번 만나 뵙고 인사라도 드릴 수 있을까요?”

해당타타는 무공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자였다. 그러니 스승인 고하 종사를 다치게 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맹인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였다. 그러니 방금 요청은 순수하게 후배로서 오죽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르침을 구하고 싶어 꺼낸 것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고하 국사 앞에서는 정말로 비밀이란 게 있을 수 없군요. 한데 어쩌죠? 한동안은 아저씨를 만나 뵐 수 없어요. 요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섭류운 흉내를 내고 다니시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혼자서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다니시는 중이에요.”

해당타타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말해 주었다.

“안지, 스승님께서 내게 확실히 말씀해 주신 건 아니지만 그분 말 속에 정보가 있었어요. 당신 어머니께서는 신묘와 관련된 분이실 거예요.”

고하가 해당타타와 대화를 나눌 때 이 일에 대해 명확히 언급한 건 없었다. 하지만 소은에 대해 언급하면서 실마리가 될 만한 것 몇 가지를 노출했었다. 그리고 총명한 해당타타는 그 안에서 일부 내용을 예측해 낸 것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딱 잘라 말했다.

“신묘는 너무 멀어요. 그러니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부터 먼저 논의합시다.”

해당타타는 살짝 화가 났다. 유난히 꼴불견인 범한의 품성이 맘에 들지 않아 싸늘하게 받아쳤다.

“세상의 어떤 일이요?”

범한이 껄껄껄 웃었다.

“예를 들어······ 타타, 올해 몇 살이에요? 우리가 안 지 꽤 됐는데. 서한도 여러 번 교환하고요.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정보도 모르고 있었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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