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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70화 (370/1,108)

370화

정오가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서호와 마주 보고 있는 어느 장원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장원 내부에서만 그런 것이라 외부에서 보면 여전히 조용한 것 같았다. 장원은 화려하면서도 질리지 않게 꾸며져 있었고 산과 호수를 낀 절묘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장원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가 은전으로 십몇만 냥에 달했다.

장원의 주인은 팽씨로 그 누구도 그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옛날에는 여름에만 사람들이 찾아왔다. 피서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오늘 장원에 나타난 이들은 범한 일행이었다. 이곳은 전임 재상인 임약보가 자기 문하생인 팽 대인의 어느 먼 친척 명의로 사들인 곳이었다. 그러니 항주로 온 범한이 장인의 집에 묵는 건 당연했다.

장원의 관리인은 일찌감치 소식을 듣고 모든 걸 준비해 둔 터였다. 범한은 어느새 다리를 꼬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용정차를 음미하면서 항주 대부호의 삶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3 황자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해당타타를 삐딱하게 흘겨보며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중이었다.

범한 일행은 당연히 루상루에서 계속 머무르지 않았다. 해당타타도 음식을 시키지 않았다. 서둘러 루상루로 향하고 있는 관리들을 피하기 위해 범한이 일행을 이끌고 도망치다시피 나왔기 때문이다.

마차 대열이 가짜로 성에 들어가는 걸 연출하기 위해 감찰원 4처의 항주 순찰사 관원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6처가 살수를 위해 준비한 포목점 두 곳까지 이용했다. 그리하여 범한 일행은 다시 항주성에서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게 되었다. 그 후 범한 일행은 아무도 모르게 길을 돌아 서호 근처에 있는 장원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감찰원 부하들이 사랑스러웠다.

해당타타가 범한을 슬쩍 보고는 답답해하며 물었다.

“대체 누구를 피하느라 이러고 있는 거예요?”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번거로운 걸 피하는 중입니다.”

사실 오늘 일은 범한이 어리석게 굴어 벌어졌다. 행적이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다면 루상루에 가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방을 뺏으려 할 때 화를 꾹 참고 굽혔어야 했다. 하지만 범한은 성미가 유난스럽고 굽힐 줄 몰랐다. 그러니 강호를 다니는 동안 자신의 진짜 신분을 계속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참 후, 3 황자는 정원으로 가 새로 합류한 어린 여종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장원의 나이 든 여종들이 따뜻한 떡을 내오자 해당타타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니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정말로 배가 고프긴 고팠던 것 같았다.

범한이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좀 여인네답게 먹을 것이지.”

해당타타가 푸흡, 하고 웃으며 생각했다.

‘이 녀석이랑 반년 동안 못 봤는데 왜 보자마자 싸웠을까? 그래도 정말 재미있었어.’

해당타타가 떡을 다 먹자 범한은 그녀에게 함께 후원으로 가자는 눈짓을 했다. 팽씨 장원에 와본 적은 없었지만 건축 양식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다 보니 범한은 손쉽게 조용한 서재를 찾을 수 있었다.

서재로 들어온 두 사람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정색했다.

“해당타타······ 지금쯤이면 그 소문을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단 그 이야기는 접어 두죠. 오늘 서호에 있었던 두 사람은 누구예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요?”

“그 어부는 본 적 있어요.”

범한은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분명 운지란일 거예요. 작년에······ 아니, 분명 재작년에 황궁에서 한 번 본 적 있어요. 그때 동이성 사절단 대표였거든요.”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침묵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질문을 던졌다.

“운지란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 살수는 대체 누구죠?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어 본 적 없었어요!”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매복하고 있다 공격하면 어린아이도 대종사를 죽일 수 있을걸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이성의 검술을 연구해 본 적 없군요. 그 살수가 쓴 검법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사고검 검법이에요.”

범한이 관자놀이 쪽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대충 둘러댔다.

“동이성에는 고수가 많아요. 그들끼리 서로 죽인다면 우리 계획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잖아요.”

해당타타는 여전히 호수에서 갑자기 나타난 살수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 옷의 사람이 쓴 건 순수한 사고검 검법인 것 같았다. 딱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한 게 있었고 그 사람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해당타타가 그런 인상을 받은 건 범한이 자신과 습지대에서 겨룰 때 사용한 초식 때문이었다. 그때의 공격 방식들은 그림자 자객과 똑같았고 감찰원의 후안무치한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녀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범한을 응시했다. 그러자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타타도 다 봤을 거 아닙니까. 살수는 당신과 수준이 비슷해요. 9등급 이상의 절세의 강자라고요. 그런 사람을 내가 어찌 부릴 수 있답니까?”

범한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해당타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자객에게 공격을 받지 않았군요. 내가 보기에는 그게 정말 의외예요. 지금 상황이라면 신양 쪽에서 분명······.”

범한이 손을 들어 해당타타가 하려던 질문을 막고는 차분하게 받아쳤다.

“태평성세이니 그런 일은 너무 큰 파문을 일으킬 거예요. 게다가 신양 쪽은 날 죽일 능력이 안 돼요.”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친 건 다 나았어요?”

* * *

범한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찌감치 나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강남까지 왔겠어요. 내가 죽는 걸 제일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요.”

해당타타는 마음이 놓였는지 살며시 웃었다.

“서한에서 말했던 건 지금 할까요, 아니면 저녁때 다시 할까요?”

범한은 뼛속까지 음탕한 자라 잠시 해당타타의 말이 선정적으로 들렸다. 이에 서둘러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답했다.

“저녁때 다시 이야기하죠. 국사님과 관련한 것이니 정중히 다뤄야겠지요. 향은 피우지 않더라도 목욕 정도는 하게 해줄래요? 그런데 내가 궁금했던 건······.”

범한이 궁금했던 건 다음과 같았다.

자신이 경국 황제의 감춰졌던 아들인 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고하 대종사는 왜 천일도 심법을 자신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일까.

범한이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해당타타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가로챘다.

“저녁에 다시 말하지요. 가서 서호 경치나 구경할래요. 책에서 서호에 대해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몰라요. 그런데 오늘 자세히 못 봤거든요.”

해당타타가 탁자 위에 있는 꽃바구니를 대충 들어 올리자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타타, 이 겨울에 어디에서 꽃을 가져온 거예요?”

“오주에서 산 비단 꽃이에요. 가짜지요. 전부 가짜예요.”

* * *

범한은 홀로 서재에 남아 조용히 앉아 있다가 한참 후에 몸을 돌려 두툼한 창문 가림막을 바라보며 친절하게 물었다.

“안 다치셨지요?”

그림자가 정말로 그림자처럼 홀연히 창문 가림막에서 나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지란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범한은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생각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운지란이 다짜고짜 옆에 있는 어느 정원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분명 명가가 관리하는 곳인데 그때는 혼자가 아니라 제자 몇도 데려왔습니다. 모두 정원에 있기에 저는 그냥 물러났고요.”

그림자의 말투에는 감정적 동요란 게 전혀 없었다. 이에 범한이 다시 물었다.

“명씨 가문? 동이성? 그쪽 사람들 실력이 어떻던가요?”

“9등급이 두 명, 8등급이 셋입니다.”

그림자가 대답하고는 설명을 이어 갔다.

“한데 운지란은 반년 동안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범한의 두 눈에 잠시 노기가 번쩍이더니 느릿느릿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9등급 하나, 8등급이 셋이라. 이제 보니 동이성이 나를 너무 대단하게 봐서 배팅 한번 크게 했군. 이런, 대체 어디서 그렇게 고수들이 튀어나온 거지? 떼로 덤비겠다는 건가?”

그림자는 범한이 쓴 단어들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곳을 떠났습니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강남 황실 금고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면 그는 분명 명씨 가문을 뒤집어엎고 신양과 동이성 사이에 돈이 오가는 경로를 끊어 버릴 게 뻔했다. 무력 면에서 허약한 명씨 가문처럼 신양 쪽도 원래 무력이 약한 터였다. 이에 명씨 가문은 동이성의 고수 여럿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조정의 고위 관료를 죽이는 일은, 특히나 범한 같은 이를 죽이는 일은 얼핏 들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명씨 가문에서도 9족이 멸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범한을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됐을 때 미친 장 공주의 성미를 생각한다면 아무 일도 없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동이성의 8, 9등급의 고수들이 계속해서 암살을 시도할 거란 생각을 하니 강한 권력과 담력을 지닌 범한도 순간 오싹했다. 이에 범한은 그림자가 먼저 손을 쓸 수 있게 허락했다. 먼저 우두머리인 운지란을 움직이게 한 후 다시 6처 검수들을 데리고 강남을 누비며 동이성에서 온 이들을 제거하도록 한 것이다.

관아에 앉아 동이성 자객이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듯이 범한에게는 감찰원 검수들의 가공할 위력을 사용해 동이성 자객의 무서운 위력에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방법이었다.

사고검이라는 그 늙은 괴물과 관련해 범한은 자신은 그에게 위협감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순간 등골이 오싹해 운지란을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란이 형, 부디 몇 달 더 살아 주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우리 맹인 아저씨께서 나으시면 그때 다시 말하자고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저격 총은 사람을 죽일 수만 있고 살리는 건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 * *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범한이 다시 입을 뗐다.

“6처 검수들을 모두 데려가세요. 2처 사람과도 협력하시고요.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손을 써야 합니다. 가급적 죽이지는 말되, 그들이 겁을 먹어 우왕좌왕할 정도로만 만들어 주세요. 우리를 칠 생각을 못 하게 만드는 거죠.”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대인 곁에 있는 낭자는 정말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그러니 자주 뵈러 오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이군요. 오늘부터 내 안전은 그녀가 책임져 줄 테니 문제없을 거예요. 그러니 늘 조심하시고 복수 때문에 서두르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아직 그 대종사의 적수가 못 되거든요.”

그림자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축축이 젖은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림자가 사방팔방으로 동이성 검객들을 처리하고 다니게 되면 범한에게는 신변 안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범한은 해당타타가 나타나자 행동 개시에 들어갈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까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

범한이 이렇게 한 건 첫째, 해당타타의 위세에 기대면 자신이 호기롭게 그림자에게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어서였다.

둘째, 그림자가 떠났어도 해당타타가 왔으니 범한 곁에는 여전히 9등급의 강자가 있는 셈이었다. 그녀와 호위 무사들이 함께 움직이면 신변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해당타타가 옆에 있으면 누구든 자신을 건드리려 할 때 북제라는 강대국과 대머리 고하 대종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해당타타는 그림자보다 훨씬 귀엽지 않은가. 같이 수다도 떨고 입씨름도 하고, 저녁에는 친구처럼 이것저것을 써서 보여 주며 같이 공부도 할 수 있고.

범한은 어느새 염치없게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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