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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68화 (368/1,108)

368화

운지란이 낚싯대를 절반 정도 거두었을 때였다.

기괴하게도 광택이 없는 날카로운 비수가 배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낚싯줄 옆에 나타났다. 비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운지란이 낚싯줄을 거두는 속도에 맞춰 위로 따라 올라왔다. 목숨을 앗아 갈 비수는 그렇게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순간 운지란은 건물 위에 있는 범한에게 집중력의 절반을 쓰고 있다시피 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대결장에 있는 해당타타를 신경 썼다. 그는 사고검의 수제자였지만 해당타타와 범한이 모두 젊은 세대 중 가장 심후한 실력의 소유자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사이도 좋다고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 갑자기 동시에 항주성에, 그것도 바로 이 작은 배 옆에 나타나자 운지란은 이들에게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순간 결사의 의지가 담긴 검은 빛이 기괴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배 위에 있던 어부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끔찍하게도 피 묻은 화살을 꽂은 채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작은 배에 있던 검은 거적이 동시에 딸려 올라가 순식간에 어떤 힘에 의해 조각조각 나더니 쏜살같이 옆으로 뻗어 나갔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호를 가르고 나오더니 곧바로 허공을 밟으며 도망가고 있는 운지란을 따라갔다.

그렇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두 차례 나더니 두 사람은 어느새 호숫가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남은 건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거적 파편들뿐이었다. 그리고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삿갓이 범한에게 항의라도 하는 듯 제멋대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서호는 넓은 호수가 아니어서 제방의 길이도 수 리(里)에 불과했지만 호수의 기세만큼은 장대했다.

루상루 식당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대나무 발 사이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 오른쪽 제방이 있는 곳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다가 가끔씩 수면을 스칠 때마다 잠깐씩 큰 물보라가 일었다. 그러다 다시 제방 옆에 있는 뱃머리를 지나는 속도는 실로 엄청났다. 번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우연히 호수 위에서 서로 맞붙게 됐을 때는 검의 기운이 좌우로 뻗어 나가고 두 사람이 동시에 거대한 새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한데 그 모습이 어찌나 우아하고 아름답던지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절로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순간 피가 튀고 두 사람이 분리되더니 다시 천상의 새처럼 앞쪽으로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한데 어찌나 아름답고 묘한지 절로 두려움이 밀려들 지경이었다.

* * *

범한은 높은 곳에 서서 멀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수 둘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호수 옆에 위치한 잎이 다 떨어진 버드나무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방향을 보니 검은색의 고풍스러운 정원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중상을 입었는데도 오랫동안 버티는 운지란을 보니 동이성의 일대 검술 대가라는 명성은 과연 헛소문이 아닌 듯했다.

호수 위에서 다시 잠시 매가 공격하는 듯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림자는 자신이 가장 자주 쓰는 기술을 버리고 동이성의 사고검결이라는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두 고수의 검세는 매우 유사했다. 호수 위에서는 깨진 잔상 같은 화면만 전광석화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검의 기세는 눈을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위용이 넘쳤다.

예상했던 대로 그림자는 찰거머리처럼 운지란을 뒤쫓았다. 한편 다친 운지란은 궁지에 몰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호수와 마주 보고 있는 기슭으로 향한 거지? 설마 그곳에 동이성에서 온 조력자가 있는 건가? 범한은 서호 맞은편에 있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목조 건축물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막이용 대나무 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범한은 난간에서 물러나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3 황자를 잠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뭘 보십니까? 드시던 것이나 마저 드시지요.”

말을 마친 범한은 탁자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남은 음식 속에서 새우 살을 찾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악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3 황자도 밖에 무슨 일이 생겼고 얼추 살인이 일어나려 한다고 예상했다. 청석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숫가로 몰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보면 분명 큰일이 나기는 한 것이었다.

사천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인, 무슨 일이 난 것입니까?”

범한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곧장 대답을 해주었다.

“누구인지 모르겠는 이가 호숫가에 있던 어부를 찔렀다네. 그리고 지금은 호수 저쪽까지 쫓아갔고.”

방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대체 어부 피습 장면이 어떠했기에 경험 많은 강호 호걸들을 놀라게 한 건지. 사람들은 범한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박을 하지도 않았다.

* * *

해당타타와 관원은 여전히 서호 옆 청석판 위에 있었다. 해당타타는 관원 옆에 서서 호수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 절대 고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강남 무림 사람들은 이미 호숫가에 몰려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잔물결이 남아 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연신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경이로움에 찬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들은 대결의 시작 부분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작은 배가 파괴되고 고수 둘이 거대한 새처럼 호수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똑똑히 보았다. 순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어 보게 된 것이었지만 모두 그 두 사람이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고수란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소리만 들어 봐도 9등급이라는 현묘한 경지였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사람들은 그제야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다. 한동안 의견을 나누어 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일부 고명한 인사들은 호수 위에서 본 검세에서 사고검의 품격을 느꼈지만 이 점을 밝히지 않고 혼자서만 내심 뿌듯해했다.

‘동이성아, 지금껏 고수가 많다고 허풍을 떨지 않았더냐! 그런데 자기편끼리 싸우다니!’

하지만 호숫가에 있던 동이성 출신 여제자들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들은 경국의 번화한 지역인 항주에서 감히, 그것도 자기 사부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터였다. 려사사가 이끄는 여검객들은 주최 측에게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대결장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호수 제방을 따라 초조하게 뛰어갔다.

강남 무림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하루 종일 별 볼 일 없다가 막판에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가 나타나 주고 또한 호숫가에서 갑자기 절세 검객 둘이 나타나 서로 맞붙어서였다. 사람들이 봤을 때 이 정도면 참가비는 뽑은 셈이었다.

경국의 강호인들은 방금 암살 사건을 핑계로 해당타타가 대결장에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잊어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도 저 낭자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만약 경국 사람으로서 체면이 깎이고 싶지 않다면 이때를 틈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강호 호걸들은 근처 루상루로 들어가 식사를 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자 아까 보았던 놀라운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각 문파의 대표들은 ‘공정’한 관(官)의 공증 아래 이익 배분에 대해 논의했다.

강남로 관원은 덕망 높은 선배 인사들과 함께 해당타타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앞서 있었던 일을 거론하는 대신 해당타타가 쉴 수 있도록 정중하고 깍듯하게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루상루로 들어갈 때였다. 말갛고 반듯한 외모에 따스한 눈빛을 지닌 귀공자가 마중을 나와 해당타타를 향해 두 손을 들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싼 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해당타타 낭자, 친히 왕림해 주시다니요. 이리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공자께서는?”

해당타타는 원래 얼음장처럼 차가운 선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앞서 사라져 버린 두 고수 생각뿐이었지만 대충이기는 해도 예의 바르게 받아쳐 주었다.

“저는 명씨 가문 사람으로, 이 루상루의 주인으로 있는 자입니다.”

이 일행의 맨 뒤쪽에는 강남 수채의 하서비가 있었다. 하서비가 고개를 들어 명 공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냉소를 짓고 있었다. 북제 사람에게 비위도 맞출 줄 알다니 여러 해 동안 못 본 사이 조카가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루상루도 명가가 꾸리고 있는 사업이다. 원래는 대행수를 통해 운영하지만 오늘은 루상루 옆에서 중요한 대회가 열려 특별히 가주 명청달의 아들인 명란석이 직접 나와 있었다.

강남에서 거부(巨富)를 이룬 가문이니 이들은 관아와의 관계를 잘 조율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타국의 중요 인물에게 알아서 아첨하는 건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건물 밖까지 나와 해당타타를 맞이하는 동시에 그녀와 함께 있던 강남로 관원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패가망신할 유형은 아니었다.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의 이목이 모두 입구 쪽으로 쏠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해당타타 낭자가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해서였다.

해당타타는 유명 인사였다. 경국 사람들 모두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해당타타 낭자와 젊은 범 대인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 때문에 경국 사람들은 범한 대인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사람들에게 범한은 조정을 통틀어 제일 잘난 인물이었다. 그러니 지금 해당타타를 바라보는 그네들의 눈빛은 마치 며느릿감이라도 고르는 듯 여느 때보다도 깐깐했다.

그리고 해당타타를 살펴본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낭자는······ 생긴 게 그저 그래, 아무리 봐도 범한 대인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 * *

식당 밖이 조용해지고 있는 반면 내부는 점점 시끌벅적해졌다. 범한은 재야의 호걸들이 식당으로 들어왔음을 알아채고는 호위 무사 한 사람에게 칸막이 쪽에 서 있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눈치 없는 강호 인사가 소설 속 악질 토호처럼 자리를 빼앗기 위해 들어와 난동을 부릴 수도 있어서였다. 그리고 범한에게는 그런 데에 쓸 시간이 없었다.

고달이 범한을 바라보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달이 손을 휘휘 흔들어 앞서 나간 호위 무사에게 돌아오라고 한 후 자신이 직접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참에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한 호위 무사 둘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다른 이들에게 보초를 서도록 했다.

범한 일행은 이미 먹을 만큼 먹은 후였다. 이에 3 황자를 포함한 모두가 지시를 바라는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범한을 주시했다. 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에도 호기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왜들 그렇게 보는 거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호수에서 일어난 일과 나는 정말 관계가 없어.”

사천립이 스승님은 총명하지만 어떤 때는 반응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모두 궁금한 게 있어도 범한에게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범한의 성미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3 황자는 웃으며 입을 뗐다.

“그것 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대체 뭡니까?”

밖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보아하니 아래층에 있던 강호 인사들이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위층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 3 황자가 문밖을 향해 턱짓을 했다.

“해당타타 낭자가 왔는데 스승님께서는 그녀에게 이리로 들어와 앉도록 청하지 않으실 건가요?”

방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간절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범한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꾸짖었다.

“대체 머리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항주까지 데려와 구경시켜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거늘. 내가 자네들 앞에서 연기하는 모습까지 보여야겠는가?”

그러자 사천립이 곁눈질을 했다.

“스승님, 해당타타 낭자가 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같이 밥 한 끼 먹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여기로 들어온다면 우리 정체가 들통날 것 아닌가!”

그러자 3 황자가 또랑또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왜 미복 차림으로 다녀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당당하게 신분을 밝히고 물놀이, 산놀이나 가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곳 강남 사람들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텐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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