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박수 소리도 바람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건물 내부에서 난간에 기대서 있던 손님들도 모두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해 식당 안은 순식간에 사람들 소리로 웅성댔다.
하지만 범한이 있는 칸막이 방만은 유난히 조용했다. 범한은 난간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며 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범한의 부하들은 무수히 쏟아지는 갈채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건물 아래에서 진행 중인 무공 대결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간으로 몰려가 구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식탁 위 맛난 음식들을 상대했다.
범한이 부하들을 쓱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강호의 협객들이 자신들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고 여기겠지. 그 정도 자긍심은 갖고 있을 거야. 그래도 다 똑같이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이잖아. 한두 초식 정도는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건가?’
사실 범한은 이해가 안 되었다. 강남 무림 대회가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는데도 호위들과 6처 검수들에게는 식탁에 차려진 맛난 음식에 집중했다. 각대 문파에도 고수는 있었지만 살인과 연계시켰을 때 그다지 볼만한 게 아니어서 그런 걸까. 어찌 되었든 호위 무사와 검수는 살인에 특화된 사람이니까 말이다.
사사와 얼마 전 들인 여종들은 밖에서 벌어지는 살기 가득한 치고받는 장면이 무서워 가만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 황자는 이번에 항주에서 열리는 무림 대회를 보기 위해 뒤에서 무척 애썼던 터다. 그러니 수없이 많은 방법을 동원한 끝에 범한에게 허락을 얻어 낸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절대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드렁허리라는 생선으로 만든 요리 한 접시를 들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입에 밀어 넣으며 밖에서 두 사람이 대결 중인 장면을 무척 재밌게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이 3 황자를 잠시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마, 그리도 맛있습니까?”
구경에 방해가 되는지 3 황자가 짜증을 내며 범한에게 눈을 흘겼다.
“황궁에서는 허락이 안 되는 거거든요.”
범한은 순간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해 당황했지만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다. 우선 황궁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드렁허리는 북방에서는 보기 힘든 물고기라 사시사철 공급되지 않는 데다 생긴 것마저 너무 못생겨서 어선방에서는 요리 재료로 잘 취급하지 않았다.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3 황자의 눈빛이 머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위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검을 뻗은 저자는 강남 용호산 문파의 계승자입니다. 저자의 움직임을 보니 적어도 7등급 고수는 되는군요. 한데 안타깝게도 완력이 조금 부족합니다. 듣자 하니 저자의 사부는 과거 서생이었다더군요. 그래서 기본기를 제대로 닦지 못해 그게 제자들에게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함께 겨루고 있는 사람은 비교적 유명한 자입니다. 성은 려, 이름은 사사이죠. 절 보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여인입니다. 그녀는 동이성 운지란의 제자이니 사고검에게는 손제자입니다. 명문 문파 출신이니 당연히 뛰어날 수밖에요. 제가 보기에 용호산 문파 검객은 잠시 후 몇 군데 찔릴 것입니다.”
“스승님이······ 운지란이라고요?”
3 황자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려다 말고 물었다. 들어 본 이름이었다. 운지란은 동이성 사고검의 수제자로 이미 9등급의 실력자였다. 세상에는 일대(一大) 검법 대사로 알려져 있다. 작년 동이성 사절단이 경국을 방문했을 때 수장 역을 맡았었다.
“소문으로는 운지란도 강남 출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제자를 보낸 건 격려하려는 것 말고도 다른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아마도 명씨 가문과 관련이 있겠군요.”
동이성과 장 공주는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범한과의 관계는 줄곧 좋지 않았다. 양자 간에 직접적인 접촉은 그다지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맞붙은 건 여러 차례. 하지만 단 한 차례의 교전으로 범한과 동이성 측은 거의 해결이 불가능한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다.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운지란의 여제자를 죽인 것 때문이었다.
비개가 체면 불고하고 직접 동이성까지 찾아가 과거 사고검의 병을 치료해 준 것을 이유로 사고검 문파에서 범한을 찾아와 공격하지 않기로 약조를 맺었기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원한은 갚고야 마는 동이성 사람들의 충동적 성격에라도 범한은 2년 동안 편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사고검이란 괴물은 경국 황제 정도는 암살해 버릴 미친놈인데 말이다.
넓게 펼쳐진 청석판 위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호수를 마주한 곳에 커다랗게 대죽붕(大竹棚, 竹棚: 대나무로 지은 건조물)이 지어져 있었다. 그 안쪽에는 연배 높은 명망 있는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중간에는 강남로의 관원이 앉아 있었다. 강남 수채의 하서비는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이가 젊어 강남 무림계에서는 아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오늘 상석인 주석 자리에 앉은 이는 감찰원 4처의 이름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관원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가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강남 무림 대회가 열린 지 반나절이 지났을 때다. 청석판 위에서 이미 여러 쌍이 주먹과 검으로 무공을 겨룬 터라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다행히 공격이 오가는 와중에 죽은 사람은 나오지는 않았으며, 조정 관원이 살펴보는 가운데 진행된 터라 강호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무림 대회는 성공적인 단결의 장이었다. 모든 강호 사람들에게는 명예로운 자리였고,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 얼굴을 알릴 기회였으며 또 어떤 이에게는 제대로 된 무공 대결을 펼칠 수 있는 경험의 장이었다.
범한은 차분하게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가 전생에 읽었던 소설 속 한 구절이 생각났다.
‘강호가 강산의 한구석이라고 했던가? 저기 넓게 펼쳐져 있는 청석판 위가 강호라면 아무래도 강산의 한구석은 아닌 것 같아. 오히려 강산의 화려한 가장자리라면 모를까.’
하지만 범한의 얼굴에는 어느새 옅게 우려가 드리워져 있었다. 반나절을 지켜보는 동안 강호 고수들은 비장의 수단을 드러내지도, 목숨을 걸고 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진정한 강자는 있었다. 마지막에 나온 와룡산 문파 검객은 동이성 문파를 맞아 싸웠는데도 전혀 열세에 몰리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아무래도 사고검의 명성을 생각해 반 발짝 물러서 준 것만 같았다.
강남 무림 대회에서 진짜 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에게서는 속된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들 뒤에 하나같이 명문 귀족이나 관아 인사들이 있어서였다. 만약 누군가가 이들의 역량을 한데 모은다면 범한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어쩐지 조정에서 이 대회를 상당히 엄격하게 관리한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민간의 무력을 일관되게 억누르되 동시에 그들을 조정에 흡수시켜야 할 필요성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거다.
그제야 범한은 자신이 부주의했음을 깨달았다. 하서비 말이 맞았다. 재야에도 진짜 호걸은 있었다. 다만 경국 황제가 20년 동안 무력으로 강하게 억누른 터라 저들에게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운지란은 어디 있습니까?”
3 황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운지란을 찾고 있었다.
범한은 정신을 놓고 있느라 바로 대답을 해주지 못했는데 3 황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신분이 다릅니다. 물론 죽붕 안쪽에서 저 늙은이들이며 조정 관원과 함께 앉아 있는 게 성가셨겠지요. 그러니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과거 황궁에서 운지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범한을 몇 차례 찌른 적 있었다. 한데 범한은 낯짝이 두껍고 뱃속이 검은지라 상대방이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 운지란이 그러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범한의 눈빛이 사방팔방으로 운지란을 찾고 있었다. 한데 검술 대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범한은 은근슬쩍 걱정되었다.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니라 그림자 자객이 범한의 허락 없이 자의적으로 손을 쓸까 봐 우려되어서였다.
그림자와 사고검 간의 은원에 대해 진평평이 말해 줬었다. 그림자에게는 뼛속 깊이 새겨진 원한이라 공무 수행을 이유로 억누르려 해도 억제되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운지란은 변장하고 강남으로 올 때 공식적인 도로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림자에게는 그를 죽이기 위한 최적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오늘 서호에는 고수들과 나이 든 관원들이 모여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9등급 고수 간 싸움이 인다면 구경꾼들은 눈 호강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난간 옆에서 이것저것 따져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운지란이 항주까지 온 이유는 이 별것도 아닌 대회 때문이 아닌 범한 자신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신양 쪽이 동이성으로 물건을 팔고 있으니 사고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명씨 가문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범한은 명씨 가문을 움직여 몸을 숨기고 있는 검술의 대가부터 먼저 찾아내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건물 아래 울타리에 있던 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석판 위로 걸어가 두 손을 모아 인사하더니 온화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 호걸분들의 무공을 보게 되어 본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위대한 경국에는 과연 훌륭한 인재가 많군요. 민간의 여러 영웅호걸이여, 이후에도 열심히 무공을 갈고닦아 훗날 험지에서 우리 경국의 영토를 넓히는 데 일조하여 불세출의 공명을 쌓고 가문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관원이 껄껄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여러 영웅분들이 비웃겠지만 본관은 닭 한 마리 잡을 힘없는 서생이외다. 이런 내가 이 자리에서 무공 대결을 보게 되니 절로 부럽군요. 여러분께 몇 초식 배우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모두 훗날 달리는 말에 올라타 적을 베어 황제 폐하를 위해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대결장에 있던 강호 사람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관원이 겸손하면서도 꽤 재미있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무림 대회는 원래 강호의 일인데 조정의 개가 생뚱맞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강호인들은 분개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 관원의 말을 듣고는 그런 이유 때문에 와 있던 것이구나 하고 이해했다. 무공을 익혔으니 언젠가는 제왕을 위해 힘쓰고······.
강호의 삶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삶이 쉬이 곤궁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군에 들어가 명예와 이익을 모두 취하는 것만 못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늘 무공을 중시해 오셨고, 그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하기는 했어도 전쟁은 언제든 터지기 마련이니 그들에게는 군에서 공을 세울 기회가 있을 터.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이는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대결장 밖에 서 있는 대다수의 고결하고 청렴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은 조정 관원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어떤 이는 괴상야릇한 말을 하기도 했다.
“민간에 바삐 사는 영웅이 많기는 하지요. 하나 모두 우리 위대한 경국 조정의 영웅호걸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 몇 분은 동이성 검객 아니었나요? 설마 대인께서는 그녀들에게도 경국 장군이 되어 동이성을 되찾아 오는 데 일조해야 한다 설득하실 겁니까?”
범한은 위층에서 모든 걸 듣고 있었다. 그는 강남로 관원이 영리하게 말을 잘해 기분 좋게 듣던 터였다. 한데 순간 반박하는 말이 들려오자 웃음이 터져 자그마하게 한소리 했다.
“참으로 예리한 지적이군.”
3 황자가 옆에서 분개했다.
“모두 간악한 자들이군요. 스승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정말 재미없습니다. 보러 오지 말았어야 해요.”
한데 청석판 위에 있던 관원이 침착하게 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