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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64화 (364/1,108)

364화

그림자가 범한에게 무엇을 허락했는지 모르겠지만 범한은 그 ‘의외’의 사건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고는 다음 날 한껏 기분이 들뜬 채로 사주성에서 떠났다.

그날따라 갑자기 겨울비가 내려 쌀쌀하고 처량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런데 강남에서 잠행 중인 범한 제사 일행은 사주성 밖에 위치한 크지도 높지도 않은 구릉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누군가가 조화라도 부린 것처럼 말이다.

그날 밤, 비옷을 입은 관원들이 어둠을 틈타 사호로 들어갔다. 사호에 있는 강남 수군의 나루에는 경도에서 온 큰 선박이 정박해 있었고 선박은 경계가 삼엄했다. 그래서 수군에서 접대 업무를 책임지는 고위 장군들도 비옷을 입은 관원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선박에 남아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소문무가 비에 젖어 배에 오른 동료들을 바라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왔는가? 대인은 어찌하고 계시는가? 계년조에서는 몇 명 남겨 둬야겠지?”

그러자 한 관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께서 이왕 연기하는 거 제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계년조는 모두 선박 위에 남아 있으라 하셔서 저희 모두 얼굴을 가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수군 쪽 사람들은 대인께서 선박에 계신 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몇 명은 속일 수 있겠지요.”

소문무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대인께서 장난을 치시는 건가? 벌써 사주에서 종적을 드러내셨는데 왜 숨기시려 하는지······.”

소문무가 저속한 말을 내뱉으려다가 삼켰다. 대신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러지. 내일 곧장 떠나 서둘러 강남로로 들어가세.”

“3월 초사흘입니다.”

조금 전 말을 꺼냈던 계년조 일원이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3월 초사흘에 배가 소주에 도착해야 합니다. 대인께서 날짜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소문무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대체 어떤 배로 가야 그리 늦게 도착할 수 있는 건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휘 내젓고는 화를 냈다.

“어떻게 운행할지는 관여하지 않겠네만 사호에서는 더 이상 못 있네. 내일 어떻게든 떠날 것이야.”

그러자 아까 말했던 관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인, 왜 그러십니까?”

소문무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강남 수군의 병영으로 들어왔는데······ 제사 대인과 3 황자마마께서 배에서 내리지 않고 계시는 거네. 수군에 있는 장군들이 미심쩍어하지 않겠는가? 이틀 동안 수비며 통령이며 여럿이 찾아왔었네. 모두 핑계를 대고 배 위로 올라오려 하더군. 두 귀인께 아첨하러 왔다는 게 빤히 보였네. 한데 대인께서는 배에 안 계시니 내 어찌 그들을 배 위로 올라오게 할 수 있겠는가?”

소문무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틀 동안 배에 올라오려는 사람들을 막느라 울화통이 터지려던 차였다.

“저 정도 등급의 관원은 내 선에서 막을 수 있어. 한데 수군의 제독 대인께서 내일 오후에 오신다는 말을 들었네. 그분은 1품의 최고위급 관원이야. 제사 대인께서 계신다면 얌전히 예를 다해 맞이해야 하는 분이란 말일세. 3 황자마마께서도 거들먹거리기 힘든 상대인데 내 힘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소문무와 대화를 하던 관원도 깜짝 놀랐다. 수군 제독이란 신분은 저들 조무래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 대인께서 여기로 왕림하시면 지금 하고 있는 거짓말도 들통날 게 뻔했다. 제독 대인이 범한 제사와 3 황자마마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면 비밀 상주문을 올려 황제 폐하께 자신이 농락당해 화났다고 알리는 선에서 끝날 일이었다. 한데 문제는 그사이 자신들이 화풀이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가시지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나세요!”

배에 남아 있던 계년조는 즉각적으로 공감대를 이루었다. 이에 곧장 아래에 있는 수군 교관들에게 배가 떠날 수 있도록 채비해 달라 요청하는 동시에 배에 남아 있는 호위들과 6처 검수들에게도 관련 사실을 알렸다.

“대인께서 말씀하시길 항주의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보낸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소문무 대장께서는 가실 필요 없습니다.”

말을 마친 관원이 소문무를 바라보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요 이틀 동안······ 수군에서 적지 않은 선물이 온 것 같은데요.”

소문무가 뒤쪽을 향해 입을 삐죽댔다.

“모두 뒤쪽에 놔두었네. 장병들을 지휘하는 이들이 돈이 참 많더군. 역시 도적 떼의 뒤를 봐주는 능력자들다워.”

순간 관원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까 3월 초사흘까지 어떻게 시간을 끌 수 있겠냐며 걱정하셨죠? 제게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그러더니 소문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군! 제사 대인께서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실 걸세. 우리는 조정 관리의 은전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그 어르신을 대신해 은전을 거두면 문제 될 게 없지.”

기뻐하던 소문무는 돌연 그 일이 생각나 부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맞아. 뒷방에 있는 그 은전 상자를 잘 지켜보게. 제사 대인께서 이후로는 그 누구도 그 상자를 건들지 못하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네.”

관원은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구시렁거렸다.

‘상자 안에 몇만 냥에 달하는 거액의 은전이 있다고는 해도 제사 대인 댁에는 넘쳐나게 있는 게 돈 아닌가. 그런데도 저걸 가보 지키듯 지킬 필요가 있는 거야?’

다음 날 이른 아침. 사호의 안개가 걷히자 8할은 새것인 경도 대형 선박이 수군 고위 장군들의 떠나보내기 아쉽다는 눈빛의 배웅을 받으며 서서히 나루터에서 떠났다. 선박은 수도를 따라 사호를 빠져나가서는 느긋하고 경쾌하게 큰 강 수역으로 진입했다.

호위를 맡은 수군 선박 세 척이 그 뒤를 따랐다. 강기슭에서 배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던 강남 수군 장수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껄끄럽고 마주치기도 싫은 호환 마마 같은 어르신이 드디어 떠나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요 며칠 올려 보낸 선물이 생각나 헛돈을 쓴 것 같아 속이 쓰라렸다.

황자와 제사가 타고 있는 큰 선박이 수군 방위 구역에서 도적을 만났으니 이 일과 관련해서는 속죄양이 필요했다. 이에 고위 장군들은 일제히 심 수비에게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직접 나서서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후에 제독 대인이 병영으로 돌아온 후에나 언급할 생각이었다.

사실 소문무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강남 수군의 고위 장군들도 다음 날까지 제독 대인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강남 수군 제독인 시 대인은 강남에서 군사력을 쥐고 있는 자들 가운데 굴지의 권력자였다. 그러니 그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마음이 급하긴 했으나 너무 빨리 나타나지 않으려 했다.

시 제독은 1품의 관료였다. 뿐만 아니라 경도 추밀원 진씨 가문의 문하생으로 옛날부터 그들과 교류하던 사이였다. 이에 범씨 가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 악질 고참병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이 당장 병영으로 달려가 범한과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분명 3 황자와 건달 같은 놈을 향해 몸을 굽신거리며 무언가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시 제독 입장에서는 아직 제대로 수염도 나지 않은 녀석과 아직 솜털도 벗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아첨을 떤 것이니 늙은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시 제독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공무를 본 후 바로 말을 달려 3 황자께 인사를 올리러 가는 중이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래 놓고 실제로는 제일 아끼는 기생을 품에 안고 마차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수군 병영으로 향했다. 수군 병영이 왜 이다지도 가까운 곳에 있는지 한탄하며 말이다.

늦게 도착하려는 시 제독의 노력은 결국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3 황자가 타고 있던 배는 이미 멀리 가 있는 상태였다.

한편 소문무는 의기양양하게 선박을 몰며 뱃길을 따라 강남 쪽으로 향했다. 그는 범한 제사의 지시를 지킨 것은 물론이고 수하 관원의 건의도 받아들여 이행했다. 길목에 고을과 나루터가 나오면 곧장 정박했다. 아무리 허름한 나루터라 할지라도, 그 고을이 거주민 수가 몇천밖에 안 되는 작은 현일지라도 무조건 배를 정박하고 쉬었다. 그는 이렇게 매일 1박씩 해가며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이는 매우 이상한 운행 방식이었다. 이에 강남로에 위치한 관아 일대에서는 혼란이 일었다.

그 결과, 감찰원 범한 제사와 3 황자가 그 선박에 있을 수 있다는 소식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선박이 정박하는 지역의 관원들은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야만 했다. 정성껏 주연도 준비해야 했다. 물론 선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그 누구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위쪽 고을에서 비취옥을 준비했다고 하니 아래쪽 고을에서는 비교되는 선물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묘안석(猫眼石)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사정이 궁핍한 고을에서는 산삼 몇 뿌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돈이 없는 고을에서는 솔잎과 편백나무로 훈제한 고기 몇 덩어리를 내놓았다. 선박에 계신 두 귀인께서 산해진미에만 입맛이 길들어 있을 수 있으니 분명 자신들이 준비한 지역 특산물을 좋아할 거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역 특산물이 없다면? 관아에서는 서둘러 공인을 파견해 대인들을 위해 대신 배를 끌어다 놓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달여 동안 강 연안에 있는 관원들은 저 높은 곳에 계신 두 분을 뵙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선박은 계속 남쪽으로 향하다 고을을 만나면 쉬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작은 고을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강남 관원들은 선물을 올릴 귀한 기회가 찾아왔다며 겉으로는 매우 기뻐하는 한편 속으로는 욕을 해댔다. 범한 제사와 3 황자가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는다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고을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고 말이다.

“모르겠나? 모기가 아무리 작아도 고깃덩어리 아닌가.”

소주성 내 모 가문의 고문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이란 대인을 보니 상서 대인의 풍격을 빼다 박았군. 계산이 너무 정확해!”

다른 고문이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관리는 명성을 중시해야 해! 명성 말이지! 요즘 젊은 귀인들은 체면 생각도 않는다니까!”

“닥치시오! 이 일이 감히 의론을 할 여지가 있는 것인가? 감찰원에게 능지처참당하기 전에 본관이 자네 목을 비틀어 줄 것이야!”

정중앙에 앉아 있는 엄숙한 표정의 높은 관원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런 후 마음을 가다듬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뒷말 같은 건 하지들 말게. 은전을 받아 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강남 지역은 없는 것 천진데 은전은 넘쳐나니 말일세.”

관원이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우려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 제사 대인이 연막을 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그분이 배에 계신지 아닌지 어찌 알겠느냔 말이네. 남쪽으로 내려가는 그 선생 말로는 범한 대인의 마차 행렬이 담주로 향하고 있다더군. 게다가 가는 길목에서 은전도 적지 않게 받고 있다고 했어.”

지금 전국의 도로란 도로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이끌고 이동 중인 행렬은 바로 ‘가짜 범한’ 일행이었다. 종, 호위 무사, 거기에 경여당 대행수들까지 데리고 담주로 가는 중이었다.

큰 강에서 소문무는 즐겁게 금칠을 하며 여행하는 중이었다. 훗날 범한에게 피떡이 되도록 제대로 얻어터질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완전히 다른 소식들이 날아들자 강남 관원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체 어느 쪽에 있는 게 진짜 범한 제사인 건지. 일부 똘똘한 사람은 범한이 다른 길로 가고 있을 거란 추측을 내놓기는 했지만 그들로서도 확인할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모두 감찰원 2처 사람들이 범한 일행의 행적을 엄호하고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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