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3 황자가 듣고 싶은 게 어떤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대감에 부푼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웃으며 곧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때 마마께서 위험해서지요. 그래서 제가 구했습니다.”
3 황자가 원한 건 이런 부실한 답변이 아니었다. 이에 조금 더 캐물었다.
“그때······ 부황께서 더 위험하셨는데요?”
그러자 범한이 더 묘한 답변을 해주었다.
“그때 마마께서 제게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3 황자는 화가 났다. 화를 내며 나무문을 밀고 곧장 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저 허여멀건 밀가루 반죽 같은 놈이 하는 짓은 목석이라니까. 아주 대단한 척 이리저리 말이나 둘러대고 단번에 제대로 말해 주는 법이 없어요!’
천자의 가문에서 성장한 이승평은 어려서부터 모친의 가르침에 따라 늘 조심하며 살아왔다. 2 황자와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동궁과도 자주 어울리는, 형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동생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실제 담력과 성숙한 정도는 나이를 훨씬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부득이한 일을 겪고 난 후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현묘 사당에서 모두가 황제의 안위만 걱정하고 3 황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때 태자는 더욱 봐줄 수 없는 짓을 해서였다. 이 일로 3 황자는 천자 가문 사람은 무정하다는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일 후 3 황자는 실망감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범한이 영웅처럼 자기 앞에 나타나 준 장면을 수시로 떠올렸다. 이 두 상황이 너무나도 비교가 되다 보니 3 황자는 명목상 ‘외사촌 형님’이자 실질적인 관계로서 ‘형님’인 범한을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범한은 문 앞에 서서 호위 무사를 따라 자기 침실로 들어가는 3 황자를 지켜보았다. 그런 후 문안으로 들어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범한과 3 황자의 관계는 확실히 무언가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상대는 황자이고 자신은 신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와 스승 관계이기도 했으니.
또한 모두 다 알다시피 두 사람 다 한 아버지의 소생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총명해 누구 하나 먼저 그 사실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서로 간에 미묘한 탐색전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사처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 * *
“도련님, 주무셔야지요.”
멍하니 정신이 나가 있던 범한은 언제든 쉽게 말을 걸어오는 여종 때문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 보니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온 사사가 진지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거늘.”
범한은 말하면서 두 발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 범한이 편안한 신음 소리를 냈다. 며칠 내내 이동하면서 일도 하고 또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해져서 그런지 이런 뜨거운 물로 하는 족욕이 간절하던 터였다.
범한 앞에 놓인 걸상에 사사가 큰 수건을 들고 앉아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사사의 행동에 살짝 소름 돋은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왜 그러지?”
사사가 고개를 돌려 문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황실 금고 조사고 뭐고 다 좋은데 이제 그 일은 그만 신경 쓰세요.”
사사는 범한에게 인정받은 몇 사람 중 하나라 그런지 범한의 신분을 믿고 있었다. 사사는 말을 직선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머리는 정말로 잘 돌아갔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범한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타고나게 민감했다. 그래서 요 며칠 범한과 3 황자의 관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범한이 장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자 집안의 일이라 일개 여인으로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한을 황실 사람이라고 보고 있지 않아서 더욱 걱정하고 있었다.
범한은 따뜻한 물에 담근 두 발을 휘휘 젓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사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후 그녀를 안심시켰다.
“염려 마요,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저 녀석을 사철이처럼 고생하지 않도록 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강남행이 저 아이의 안목을 트여 줄 거란 기대는 있거든. 장래니 하는 건 일단 제쳐 두고 황자로서 나중에 태자를 보좌하며 나라를 통치하려면 배포를 더 키울 필요는 있어. 그래야 천하가 더 좋아질 테니까.”
사사가 피식 웃었다.
“우리 도련님은······ 아직까지도 천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군요.”
범한이 웃으며 사사를 꾸짖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설마 내가 못 할 것 같아서인가?”
“정말 그런 분 같아 보였어요.”
사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 거짓 같아 보였어요. 도련님께서 아까 하 대인을 어찌 훈계하셨는지는 또 잊으셨나 봐요.”
“완전히 다른 일인데.”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남에게 잘한다고 해서 뭐든 부탁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또 백성은 자기 이익을 지키는 방법을 모르니 그런 일을 우리가 해주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하셔야 하는데요?”
사사가 궁금해져서 질문을 던졌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녀는 도련님 입에서 인(仁)과 의(義)에 관한 말이 나오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면 원래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여인의 마음이니.
“뭘 그리 일일이 신경을 쓰지? 내일 강남로로 들어가니 얼른 잠이나 자둬. 물은 내가 알아서 버릴게.”
범한이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는 여전히 범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사는 범한과 단둘이 있을 때면 종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대범하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이불 속에서 손을 넣어 무뢰한처럼 허벅다리를 두드리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왜 해야 하냐고? 당연히 백성을 긍휼히 여겨서는 아니고······ 나는 우리 어머님과 같은 포부는 없지만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변경에서는 전쟁이 사라지고, 경국 내에서도 기근과 동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 그리고 내가 부귀한 한량이 되려면 내 주변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어야 해. 그래야 이 도련님이 서른 살에 퇴직해서 한가하게 복이나 누리며 살 수 있을 테고. 솔직히 말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만년에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환경을 있는 힘껏 만드는 중이랄까.”
“도련님, 퇴직이 무슨 뜻입니까?”
“물러나는 거라고 해야 하나? 서른 살에 물러난다라. 재상도 못 해보고 끝내는 거기는 하지만 적어도 국공 정도는 되어야 담주로 돌아가 지낼 만하겠지?”
사사가 대경실색했다.
“이미 감찰원 제사이십니다. 나중에 진 대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실 텐데······. 그러면 다시는 다른 자리로는 못 가십니다. 군대도 직접 지휘하실 수 없고요. 서른 살이 되셨을 때는 기껏해야 2등급 후작이신걸요.”
사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서른에 담주로 내려가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게 뜻대로 될까요?”
우연히 털어놓은 진심에 여종이 더 펄쩍 뛰자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던 범한은 웃으며 대꾸했다.
“꼭 담주로 돌아가란 보장은 없지. 북제, 동이, 남월, 서만 그리고 바다 저쪽에 있는 나라들도 있고. 전부 다 가봐야겠군. 그래야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거니까 말이지. 초원에서 말 달리고 바다에서 배 타고 느긋하게 걸으며 찬찬히 살아 봅시다.”
“서쪽 오랑캐들은 사람을 먹는다고 하던데요.”
사사가 겁에 질려 말했다.
서만 이야기가 나오자 범한은 최근에 들어온 감찰원 정보가 생각났다. 하지만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집중했다. 범한은 앞서 자신이 한 말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아름다운 이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범한에게는 지금의 삶도 만족스러웠다. 그 일만 빼고 말이다.
사사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했다.
“아직 12년이 남았네요. 도련님께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계세요?”
“뭘 하고 있냐고?”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물론 권력을 쥔 신하이니 위로는 황제 폐하와 조정에 충성하고 있고 아래로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있지.”
사사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한참 후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청렴한 관리가 아니시잖습니까.”
범한과 가장 가깝고도 친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절대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사사 정도 되니 비교적 완곡하게 말해 줬을 터. 도련님에게 다른 사람이나 괴롭히는 큰 탐관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자 범한이 자신은 무고하다는 듯 반응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 집 어르신과 내 장인어른을 두고 경국의 2대 최고 탐관이라고 하니까. 집안에서 보고 배운 가락이 있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러자 사사가 진지하게 반박했다.
“그렇다 해도 도련님께서는 분명 탐관은 아니십니다.”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두 손에 힘을 주어 경직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어떤 때는 너무 오랫동안 연기를 해서 그런지 어떤 게 진짜 나인지 모르겠다니까. 음, 이렇게 말하니 꼭 소자산가 같긴 하군. 이 도련님께 소자산가가 뭔지 묻지 말고 그냥 이대로 잠이나 자자!”
* * *
객잔의 등불이 모두 꺼지고 이불은 계속 들썩이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사사를 재워 놓고 범한은 침대에서 기어 나와 여유롭게 상의를 걸쳤다. 그리고 잔에 있는 식은 차를 배 속으로 들이붓고는 화기를 가라앉혔다. 등불도 켜지 않은 채 자신의 좋은 시력에만 의지해 어둠 속에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여니 하늘을 가득 메운 달빛이 찬 바람과 함께 선창으로 들어왔다. 선창 맞은편은 사호였다. 바람이 가볍게 살랑대는 가운데 호숫가의 말라붙은 긴 풀들이 기이하게 하늘거리고 있었다. 호수 가운데에는 환영인 듯 아닌 듯 둥그런 달이 떠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객잔 아래쪽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범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혀 놀란 기색 없이 객잔 밖에 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의 두 발은 공중에 떠 있었다. 그것은 공중에 걸린 가로대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자로, 이것만으로도 무공의 경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자가 떨어져 죽을 가능성은 세숫대야에 코를 박고 죽을 만큼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방에 여인이 있는 걸 아시면 좀 피해 주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도 의외의 사고일 뿐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의외의 사고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단조롭게 한마디 하더니 자기가 하려던 말을 이어 갔다.
“운지란이 항주에 온다고 해서 대인께 알리러 왔습니다.”
범한은 조금 놀랐지만 계속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집중하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전에도 그 늙은 분 곁에 항상 붙어 있었는데······ 잠을 안 주무시는 것입니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
“그 흰 도포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게 당신의 진짜 모습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정말 멋졌거든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범한의 부하라 하더라도 조금 전의 무료하고 유치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지위와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내 가장 큰 궁금증은 이겁니다. 늘 신비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행동해 황제 폐하께서도 당신의 존재를 모르시는데······ 어떻게 6처를 이끄시는 겁니까? 당신이 6처의 진짜 수장이라면 그 사람은 그냥 대리인이란 거잖아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공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경국에서 가장 뛰어난 자객이자 경국 검수들의 대장인 그림자 동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을 조금 더 많이 해주실 수 없습니까? 내 곁에 있는 그분을 숭배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당신과 그분은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 관료로서 자신의 신분부터 명확히 하시지요. 경도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게 딱 세 번 대꾸하셨거든요. 기분 나쁩니다. 계속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대답을 들을 기회도 안 주시니까요.”
그림자 앞에 있으니 범한은 갈수록 수다쟁이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자가 머뭇거리다가 잠시 후 입을 뗐다.
“대인, 질문하시지요.”
범한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묻고 싶었던 게 말입니다, 나를 칼로 찌르셨잖아요. 어떻게 갚으실 생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