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362화 (362/1,108)

362화

범한이 3 황자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빛의 아이를 보고 있자니 범한으로서는 조금 웃기기는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황궁에 있는 의 귀빈에게 탄복했다.

‘천진무구하고 귀여운 마마께서 어떻게 이런 강단 있고 배우기 좋아하고 거기에다가 기꺼이 굽힐 줄 아는 요런 대단한 꼬마 황자를 길러 내셨을까? 어쩌면 보기보다 만만한 분은 아니실 수도 있겠군.’

“강남은 신양 쪽에서 오랫동안 경영해 온 곳입니다.”

범한은 장 공주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지 않았다.

“십여 년 동안 이곳은 이미 철옹성으로 변했지요. 최씨와 명씨를 적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모두 이렇게 저렇게 이익 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이에 그 누구도 현 국면에 큰 변화가 오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변화가 가져오는 건 손실이고 또 그들은 손실을 원치 않으니까요.”

“저 먼 경도에서 온 우리는 그들 입장에서는 큰 변수입니다. 외부의 힘에 습격당하면 철옹성 내부에 있던 균열도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 잠시 동안은 견고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철옹성 안에 있는 모래알이 필요합니다. 그 모래알을 키우고 키워 철옹성에 다시 균열을 일으키고 깨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3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래알 하나가 그런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가 저자를 돕는 것과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게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까?”

“제일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직접 나설 수 없어서입니다.”

범한이 머리가 아픈 듯 탄식했다.

“마마께서는 경국에 지역감정이란 게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제가 사천립을 시켜 강남에 포월루 분점을, 소주에 담박서국을 내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강남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그들에게 집단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집단이라고요? 대체 어떤 사람들 말입니까?”

“강남에서 제일 거부인 명씨 가문이지요. 저 때문에 그 집 장정 몇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원한이 깊은 소금 상인들, 일찌감치 장 공주마마께서 키워 놓은 각급 관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강남로 정2품의 능 제독부터 소주성에서 성문을 지키는 병졸까지 다양합니다.”

범한이 무슨 놀이라도 하는 듯 웃으며 손가락을 꼽았다.

“황실 금고에 있는 각급 대행수, 거리에서 웃음을 파는 아낙네, 사당 앞에서 기예를 파는 노인. 모두 강남 사람으로 우리가 자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싫어하지요.”

3 황자가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표독하게 말했다.

“공격을 하려면 하라지. 설마 내······ 스승님이 두려워하실까?”

“두렵지는 않지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행동은 법을 들이대어 추궁하거나 처단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강남에 소란을 불러일으킬 생각이라면 장사꾼들은 백성들의 원망을 확대하고 그들의 삶을 피폐해지게 만드는 방법을 찾을 테지요.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경도 조정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제 편을 들어 주기 위해 몇만 명에 이르는 강남 사람들의 목을 칠까요, 아니면 강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게 관직을 내려놓게 할까요?”

3 황자는 당황스러웠다. 부황의 성정을 생각하면 범한을 고생시키지 않는 방법을 취하겠지만 그래도 범한을 경도로 다시 데려갈 것이었다. 그런데 엄연히······ 3 황자인 자신의 스승님인데 그런 굴욕을 당해야 하다니 3 황자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해졌다.

범한은 황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차렸다는 듯 하하하 웃었다.

“물론 그런 거창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마께서도 감찰원이 때로는 살인을 하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시종일관 부드럽게 대해 주시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저는 그냥 상황을 심각하게 가정해 봤을 뿐입니다.”

범한이 점점 장난기를 거두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정말로 위엄을 세우기 위해 살인을 해야 한다면 그 정도 악명은 감수할 생각입니다.”

3 황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로 많이 죽으면 어찌 되었든 수습하기 힘들잖아. 경도에 있는 도찰원도 난리를 칠 거고. 설마 부황께서 어사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죽이지는 않으시겠지? 부황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는 명군으로 남고 싶어 하시니까.’

이제 막 굴복시킨 하서비에게 죽이도록 하는 게 낫겠지.

3 황자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제 생각을 스승에게 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겉으로만 온화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독하고 모진 스승은 3 황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3 황자가 두 번 기침을 하고는 입을 뗐다

“그렇다면 수군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군 수비가 도적 떼 두목과 결탁했는데······ 이 일은 감찰원에서 어떻게 조사를 할 수 있답니까?”

범한이 고개를 숙여 소가죽 봉투를 바라보고는 건성건성 말했다.

“그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반응이 나오자 3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어찌 조사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군대가 나라의 중요한 무기이듯 사호 지역 수군도 우리 조정의 중요한 병력이에요. 더군다나 명색이 강남 수군이란 곳에서 문제가 생겼는데도 조사하지 않으면 조정에서 어찌 처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경국은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불리는데 어찌 안정을 말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범한이 의외라는 듯 3 황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유치하고 명확하지도 않은 말이지만 이 아이가 이번 일에 진짜로 관심이 있다는 것만은 잘 드러나 있었다. 처음에는 황자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범한은 이내 이유를 알아챘다. 이제 보니 요 어린 도련님에게도 영웅의 기개가 있었던 것이다. 웃음이 터진 범한은 들고 있던 소가죽 봉투를 3 황자에게 건넸다.

“수군 문제는 그리 심각한 건은 아닙니다. 물론 도적 떼와 결탁한 수비는 당연히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그 일이 있은 후 수군의 제독 대인은 제게 해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큰 강에서의 일은 일종의 정찰이었습니다. 한데 수군의 군기는 나름 괜찮은 편이더군요.”

3 황자는 범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소가죽 봉투 안에 있던 것만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한데 보면 볼수록 가슴이 벌렁거렸다. 전부 강남 수채가 요 몇 년 동안 각지 관원과 암암리에 접촉한 내용이었다. 장부도 있었다. 거래 증명서 위에 관원의 이름이 쓰여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정식으로 조사를 한다면 몇몇 정도는 밝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범한이 말했다.

“그건······ 투항장이라고 부릅니다. 하서비가 그 물건을 제게 넘겼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 관원들과 자신의 머리를 제게 넘긴 것이지요. 서로가 밑바닥을 드러냈으니 이제 안심할 일만 남은 거고요.”

3 황자가 고개를 홱 들며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하서비가 암춘(暗椿: 숨은 감시자) 일을 하게 되는 건가요?”

“마마께서는 매우 빨리 이해하시는군요. 역시 영명하십니다.”

범한이 상찬의 말을 해주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은 우리들이 잡아들여야 할 관원이고 지금은 때를 보는 중입니다.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고 조정과 반대편에 서려 한다면 당연히 그들을 잡아들여야겠지요. 한데 하서비 입장에서는 여전히 강남 수채의 주인으로 남아 있고 여전히 수군이며 각지 관원들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니 좋지 않습니까.”

조정과 반대편에 선다는 건 범한 입장에서는 곧 신양 쪽에 붙는 걸 의미했다.

3 황자가 범한을 바라보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정말 좋은 계획입니다.”

범한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개뼈다귀 같은 게 무슨 좋은 계획이라고요. 누구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답니다. 다만 감찰원처럼 많은 자원을 동원할 사람이 없을 뿐입니다. 하서비의 속사정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자를 통제하지 못했을 테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도 손을 쓸 수 없었을 거고요.”

범한이 어쩌다 저속한 말까지 섞어 가며 말하자 3 황자는 흥이 올랐다.

“스승님은 이 시대를 풍미하는 시선이신데도 그런 저속한 말을 쓸 줄 아시는군요.”

범한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무슨 개뼈다귀 같은 시선이랍니까. 시선은 뒷간에 안 간답니까. 장묵한 대가께서도 첩을 둘씩이나 두셨지요. 이 세상에 겉과 속이 모두 수정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있답니까? 있다면 주변 사람을 얼려 죽이기나 하겠지요.”

3 황자가 키득키득 웃다가 돌연 장난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부황께서도 그런 저속한 말을 쓰십니까?”

범한은 순간 당황했다. 이 아이를 계속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기에게 거짓말을 해보라고 강요하는 상황이라 대판 욕을 날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농담처럼 받아치는 선에서 끝냈다.

“돌아가시면 귀빈 마마께 여쭤보시지요.”

한바탕 웃고 나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갑자기 앞서 하서비가 했던 말이 떠오른 3 황자가 한껏 흥이 올라 말했다.

“스승님, 그 도적 떼 두목의 말로는 며칠 뒤에 서호 근처에서 무슨 대회가 열린다던데요. 강호 호걸의 등급을 매기는 대회로 쉬이 볼 수 없는 일이라던데 우리······ 가서 볼까요?”

“저속한 행동이십니다. 정말 저속한 행동입니다.”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고작 속인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당당한 황자 신분이신데 어찌 그런 구경을 하려고 하십니까?”

“강호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3 황자가 이맛살을 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이 제자, 정말로 궁금합니다.”

3 황자가 눈을 반짝였다.

“스승님은 천하에 몇 없다는 9등급 고수 아닙니까. 변장하고 참가해 맹주 자리를 차지하시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요? 나중에 연극으로도 만들어져서 천하에 활약상도 널리 퍼질 테고······.”

“갈수록 더 저속한 말씀이시군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로 그리한다면 경도 쪽에는 어찌 말씀을 올려야 할까요. 제가 탄핵을 당할 소재가 차고 넘치게 되겠지요. 결국에는 황제 폐하께 어린 녀석이라 경솔한 짓을 하였다며 한 소리 듣겠지요. 다시 말해 마마를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 어찌 험지에 갈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마지막 말을 전했다.

“물론 감찰원에서 사람을 파견하기는 할 것입니다. 이미 4처에서 사람이 서호 주변에 가 있을 것이고요. 저는 소문무에게 가보라고 할 참입니다.”

범한에게 이미 계획이 서 있자 3 황자는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3 황자가 아무리 인내심이 강하고 교활한 성정을 지녔다 해도 어찌 되었든 아직은 아이였다. 그러니 말로만 듣던 무림 대회를 구경하러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매우 실망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마마께서는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3 황자를 배웅했다.

문을 나가기 직전 3 황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은 열지도 않고 뒤로 돌아서서 고개를 갸우뚱한 채 범한의 몸을 위아래로 흥미진진하게 훑었다.

“스승님, 왜 부황께서 저에게 스승님을 따라 함께 강남으로 가도록 한지 아십니까?”

범한은 놀라 금세 답을 하지 못했지만 잠시 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마마께서 어찌 생각하시든 황제 폐하께서는 각별한 마음으로 그리하신 것이겠지요.”

무섭고도 험악한 뜻이 담긴 불순한 말이었다.

3 황자의 앳된 얼굴이 순간 엄숙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둘째 형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 날 안 보이던데 이 제자, 정말로 둘째 형이 보고 싶습니다.”

범사철에 대해 묻고 있음을 범한도 알고 있었다. 셋째 황자의 얼굴을 보니 기생집 작은 사장이 큰 사장을 그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에 범한은 진심으로 웃는 척하며 대답해 주었다.

“형부에서 이미 전국에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3 황자는 황제가 아니었으므로 범한으로서는 이러쿵저러쿵 많은 걸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

3 황자가 살짝 화가 나 범한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지려 했다.

“줄곧 스승님께 여쭙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마마, 말씀해 보시지요.”

“그게······ 현공 사당에서 왜 나를 구해 주신 것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