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하서비가 침묵했다. 그에게는 이번 일이 조금 복잡했다. 아무도 모르게 감찰원 일을 하게 된 사실이 너무 일찍 강호에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그러면 자신이 수채를 다스리는 게 불가능해지게 될 테고 외부적인 압력도 늘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봉 노대인은······ 그건 골칫거리 중 골칫거리였다. 공봉은 강남 수채에서는 가장 신비한 고수였다. 항렬을 따지자면 노(老)채주의 사숙이었으니 자신에게는 사숙조(師叔祖)가 되었다. 직접 나서는경우가 거의 없어 강남 수채에게는 숨겨 둔 보물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공봉이 하서비가 관에 제대로 빌붙으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서비가 느닷없이 진저리를 쳤다. 이리도 복잡한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음을 깨달아서였다. 한동안 아무 말 없던 하서비가 갑자기 사나운 기색을 흘렸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내당의 호위 무사를 데려오게.”
고문은 순간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채주가 그 일을 하기 위해 공봉 대인을 제거할 준비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말로 해낼 수 있을까.
반 시진 후 강남 채주의 주인 하서비가 닭으로 만든 탕을 받쳐 들고 후원으로 갔다. 그리고 수채에서 가장 특수한 지위를 지닌 공봉 대인에게 인사 올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최측근인 살수들이 숨어 있었다. 단숨에 끝내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참 동안 문밖에 서 있는데도 문을 열어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정원은 사람들이 모두 죽기라도 한 듯 조용했다.
* * *
하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평온한 얼굴로 입을 뗐다.
“사숙조님?”
아무런 대답이 없자 하서비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해 손이 풀려 탕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바닥은 여기저기 닭 국물이 튀어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그가 본 건 침대맡에 놓인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는 은발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상투로 틀어 단단하게 묶고 검을 차고 있었다. 장검은 허리 옆쪽에 매달려 있었고 온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공봉 대인은 언제든지 살인이 가능하도록 자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 놓은 것이었다.
한데 이미 살인을 할 수 없게 되어서인지 공봉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불쾌감과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나 살벌하던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가느다란 상처가 그의 목 쪽에 나 있었다. 목을 관통해 버린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는 늙은 공봉의 등을 타고 흘러내려 수채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공봉은 이미 죽어 있었다.
* * *
공봉을 죽인 자객은 정말 놀라운 검 솜씨를 지닌 자였다. 이에 공봉의 시체 앞쪽으로는 핏자국이 전혀 없었고 피는 모두 검이 지나간 방향을 따라 몸 뒤쪽에서만 흐르고 있었다.
하서비가 몸을 떨며 공봉에게 다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사숙조를 죽이려던 게 현실화되어 있자 현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숙조를 죽이기 위해 자신은 몇십 명을 동원하려 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나 조용하고 깔끔하게 죽이다니.
순간 어디선가 종이 한 장이 날아왔다.
하서비는 깜짝 놀란 눈으로 종이를 훑었다. 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네가 그런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음에도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자가 살인을 행하려 마음을 먹었기에 내가 죽여 버렸다.’
강남 수채 주인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이제야 감찰원의 진짜 실력을 확실히 체감한 것이었다. 감찰원은 강호의 그 어떤 파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공봉을 죽인 건 자신이 투항하는 데 최후의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걸 제거하도록 도와준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서비 자신을 향한 최후의 요청이자 경고였다.
그날 밤 사주성은 고요한 가운데 긴장감이 감돌았다. 평소에는 떠들썩했던 밤거리도 오늘만큼은 유난히 조용했다. 모두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게 있었으니······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였다.
도박장 동쪽으로 뻗은 길 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깔끔하고 쾌적한 객잔들이 들어서 있었다. 평소에도 남쪽에서 북으로 가는 대부호들이 자주 묵는 곳이다.
오늘 사주에 도착한 범한은 대놓고 부잣집 도령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잣집 도령들에게서 볼 수 있는 습성 같은 건 없었다. 평소 소박하게 산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단순하게 생활하다 보니 객잔에서는 가장 조용한 맨 위층을 통으로 빌려 여장을 풀었다.
방 한쪽 구석에 있는 하서비가 침착하게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요패를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문서에 서명하고 손바닥 인장을 찍은 후 소가죽 봉투 안에 문서를 공손히 집어넣었다.
범한이 문서를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기 시작했다.
“하 대인, 이제 우리는 한 식구군.”
하서비는 속이 쓰라렸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지금 이 앞에 있는 젊은 관원과 한 식구가 되기는 했지만 식구란 본디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일 터. 다시 말해 상대방은 도련님인 데 반해 자신은 팔려 온 노비가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마음에 품어 온 독기와 원망을 배출해 낼 기회와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강호의 야심 찬 영웅으로서 하나를 얻었으니 다른 하나는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이 길을 선택한 이상은 제대로 해야만 했다. 이에 하서비가 앞으로 성큼 다가가 대범하게 절을 올렸다.
“하관 하서······ 명청성이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하서비는 말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제대로 절을 할 수 없었다. 두 개의 손이 어느새 자신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주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하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대인이 본관을 어찌 보는지는 상관없네. 감찰원에 들어온 이상 우리 둘 다 조정 관원이니 상하 구분은 있어야겠지.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형제가 되었으면 하네. 내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사람이 아니야.”
하서비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 대인도 분명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감찰원에 대해 이런저런 편견이 있겠지. 한데 그런 건 우리 내부 사정을 잘 모르기에 나온 편견들이네.”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기 시작했다.
“이리 말하니 좀 그렇군. 우리는 조정에서 기르는 늑대라네. 겉으로 보기에는 사자나 호랑이 같아 보이긴 하지만 말이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조정을 위해 일하고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니 사람들의 상스럽고 저속한 평가 따위는 신경 쓰지 말게. 그리고 중요한 건 우리 내부의 단결일세. 늑대에게는 두목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내부에서 절대 알력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거라네.”
하서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하관, 알겠습니다.”
“자네는 아직 몰라.”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이런 말들이 재미없고 빈껍데기처럼 느껴질 거야. 그러니 천천히 하게나. 그런 느낌은 언젠가는 감찰원 업무를 하면서 느끼게 될 테니까. 그렇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자네에게는 영웅의 기개가 있더군. 앞서 분타에서 내가 압박했을 때 분명 속으로는 불쾌했을 텐데 말일세.”
하서비는 뜨끔했다. 하지만 범한은 온화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그때 자네는 백성이고 나는 관리였네. 그러니 자연스레 분별을 둬야 했던 거고. 한데 이제는 자네 신분이 달라졌군.”
하서비는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움츠러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성은 몹시 어리석다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자네는 백성을 이용할 수도 돌볼 수도 있을 거야. 하나······ 백성들을 믿어서는 안 되네. 그들에게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해 자네에게 기어오르게 해서도 안 되고. 그러니 감찰원 관원은 황제 폐하와 백성의 입장에서 관리들을 감독하기는 해도 믿어야 할 사람은 오로지 황제 폐하뿐이네. 백성은······ 감찰원이 충분한 권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압박만 하면 그만인 거고.”
“물론 이는 전부 내 개인적인 생각이네.”
범한이 자신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말아 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절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
범한에게 건망증이 있는 걸까.
비 오던 그날 날 밤부터 범한은 마음이 한구석이 서늘했다. 경도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의 한기는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오죽 아저씨의 ‘세상에는 도련님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일찌감치 처세의 도로 삼아 버린 터였다. 이에 범한이 믿지 않는 대상에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경국에서 순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황제 폐하도 그중 하나였다. 범한은 단지 언제 어디서고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겉으로 내뱉지만 않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각 방 안에는 범한과 하서비 두 사람 외에도 계년조의 소문무가 함께 있었다.
범한이 소문무를 가리켰다.
“소 대인이네. 내가 1처에서 데려와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이지. 자네는 내 곁에 있을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래도 나중에 경도로 오게 된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하서비는 강남 지역에서 토호로 지내는 편이 경도에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모두 대인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은 하지 말게. 그래도 감찰원은 정말 많은 걸 도와줄 수 있어. 그래 봤자 서로 이용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소 대인이 오늘 자네 감찰원 입단의 증인이 되어 줄 걸세. 나중에 연락할 일이 있으면 소 대인과 연락하면 되네. 잠시 후 함께 이야기도 좀 나눠 보게나.”
범한이 다시 소문무에게 말했다.
“소 대인, 하 대인에게 편람과 조례를 보여 주도록 하게.”
소문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범한이 소개를 끝내자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방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가자 자그마한 3 황자가 유령처럼 내실에서 쪼르륵 나와 범한 곁에 서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감찰원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입니까?”
“그는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뽑은 특사입니다.”
범한이 공손하게 3 황자를 자리에 앉혔다.
“마마께서 앞서 들으신 건 감찰원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감찰원에서 사람을 들일 때는 먼저 오랫동안 심사를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각 주의 군(軍)에서 사람을 뽑아 옵니다. 이는 과거 황제 폐하께서 첫 북벌에 나서시기 전 감찰원을 꾸릴 때 행해진 방법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춘시에서 떨어진 수재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감찰원은 관리들을 감찰하는 일을 하니까요. 하오나 감찰원에서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사람, 또는 뒷배가 있는 사람은 기피하고 있습니다.”
3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데 저 하서비란 자는 강남 수채의 채주 아닙니까.”
“그러니 특사라 말한 것입니다.”
범한이 인내심을 발휘해 설명을 이어 갔다.
“일반적으로 하서비 같은 사람은 기껏해야 감찰원 외부 활동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그를 감사로 임명한 건 정말로 드문 일이기는 합니다.”
“왜 특사인 것입니까?”
3 황자는 이 일에 유난히 흥미를 보이며 배우려는 열의를 보였다.
이는 황자라는 존엄을 잊고 너무 세세하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지만 범한은 꾸짖기보다는 온화하게 설명해 주었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께서 소신에게 강남으로 가 황실 금고를 청소하라 명하셨기 때문이지요. 강남에서 유명한 부유한 상인들을 대하려면 감찰원도 강남 현지 출신을 하나쯤은 둬야 합니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통제 가능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왜입니까?”
3 황자가 되물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마음이 모질고 독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그였다. 그리고 황자의 신분이다 보니 포월루 일로 범한에게 호되게 당한 것 말고는 인생에 좌절이란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강남에서 정무를 보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전혀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