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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60화 (360/1,108)

360화

“이 민초,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복수의 방법이 많이 있어서입니다. 민초는 지금 강남 수채의 대두목입니다. 그러니 명씨 가문과 맞서려면 제게도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황실 금고와 관련해서는 어쩌면 민초에게는 주제넘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명씨 가문은 자금력이 어마어마한데 제가 어찌 공개적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웃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한밤중에 사람이 죽이지 않았는가? 명칠소 자네는 그럴 만한 능력과 결단력이 있다 믿네. 한데 요 몇 년 동안의 일들로 증명된 건 자네가 강남 수채를 전멸시킬 위험을 무릅쓰고 명씨 가문을 불태워 버릴 미치광이가 아니란 것 정도니······ 일단 자네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겠네. 그런데 자네가 그리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설득해야겠지? 그런데 수채 형제들은 조정에 쫓기고 과부와 고아가 된 그들의 처와 자식은 세상을 떠돌게 될 텐데. 설마 자네가 바라는 결말이 이런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어야 은혜는 은혜로 원수는 원수로 갚는 게 되어, 자네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살려 주고 또 위로 올려 준 옛 산채 주인을 다시 만나러 갈 면목이 생겨서 그런 것인가?”

범한은 조리 있게 말하며 상대를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말하면서 하서비의 마음 약한 부분만 건드렸다. 분석에서 나온 강한 설득력이 마음을 파고들자 하서비의 낯빛은 암담해지기 시작했다.

범한은 하서비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 당주가 가장 바라는 건 복수보다는 명씨 가문을 되찾아 오는 것 아닌가. 그런 후 반백 살 먹은 자네 큰형 앞에 당당하게 서서 기를 펴고 지내려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살인만이 해결 방법이라면 자네는 이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겠지. 더군다나 무력을 동원해 강남 수채를 전멸시켜 가면서 명씨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면 그 명씨 가문이란 건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걸까? 자네가 돌려받으려 했던 게 그때도 남아 있을까?”

범한이 담담하게 하서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내 입장을 밝히자면 그러한 선택은 하지 말게. 명씨 가문을 되찾기 위해 다년간 힘겹게 싸워 오지 않았나. 그것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분명 씁쓸한 기분일 거야. 더군다나 명씨 가문을 온전히 남겨 두는 게 분명 명씨 어르신의 유지일 테지. 명씨 가문에서 아무리 자네에게 험악하게 굴었어도 부친만큼은 자네 모자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으셨을 테니 말이네.”

하서비는 말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까지 범한의 말을 소화시키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늘 격렬한 싸움에만 길들어 있던 사내에게 갑자기 어떤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앞에 있는 젊은 대인이 자신과 매우 유사한 처지에 있다는 점이었다.

‘설마 저자도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되찾으려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황실의 금고 같은 것 말이야. 그건 원래 섭씨 가문의 사업이었잖아. 그걸 온전히 빼앗아 오려는 셈인 거야?’

하서비가 완곡하게 거절한 것 때문에 범한이 화를 내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것이었다. 범한은 자신이 한 말이 먹힐 거라 자신했다. 중요한 점은 범한에게 명칠 공자에게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이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터라 범한이 그의 진짜 생각을 정확하게 잡아 낼 수 있어서였다.

“하 당주, 자네가 원하는 건 명씨 가문의 사업이지 몇백 명의 목숨은 아니지 않은가.”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하서비가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제사 대인, 이 민초가 이해 못 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대인이 이리하심은 모두 황실 금고를 인수받기 위한 준비겠지요. 최씨와 명씨 가문이 외부 공급 노선을 독점한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그쪽과도 너무 깊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인께서는 그들과 맞서시려는 생각이겠군요.”

하서비는 장 공주라는 세 글자를 억지로 삼키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온데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저 같은 민초가 마음에 드신 것입니까? 대인의 권세와 지위면 최씨 가문 따위는 손쉽게 무너뜨리고 명씨 가문을 제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대인 혼자만의 힘으로도 거뜬히 해내실 수 있으니 굳이 이 민초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최씨 가문은 말일세.”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과는 상황이 다르네. 내가 나서지 않는 이유는 직접 나서는 게 편치 않아서네.”

편치 않아서란 말은 관리 입장에서는 참말이었다. 그는 감찰원 제사인 데다가 이제는 황실 금고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니 조정의 냉혹한 규율에 따라 황실 금고의 모든 산물을 책임져야 했고 수출을 하려면 반드시 민간 상인들의 투서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므로 감찰원 업무를 하는 와중에는 사적인 업무 때문에 공개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범한에게는 신임할 수 있고 편하게 일을 시킬 수 있는 대변인이 필요했다.

범한에게 있어 최씨와 명씨 가문의 상황은 달랐다. 최씨 가문을 축출하기 위해 범한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충실하게 준비를 했다.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며 겉으로는 아닌 척했다. 그리고 언빙운이 중심이 되어 강력한 일격을 가함으로써 순조롭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러니 명씨 가문은 최씨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물건의 입출과 장부 내용을 가지고 잘못을 잡아내는 건 이미 어려운 일이 되었다.

물론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범한이 최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던 이유는 그들 뒤에 강력한 뒷배가 있어서였다. 그 사람에게는 경국 황실 말고도 다른 강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북제의 젊은 황제였다.

한편 명씨 가문과 관련된 인물은 동이성과 해외에 집중되어 있었다. 범한은 일찍이 사고검의 제자와 손제자를 죽였다. 범한을 포함해 경국 조정에서는 동이성에게 무수히 많은 억울한 누명을 씌운 터라 동이성과 경국은 원한이 깊었다. 그런데 지금 동이성과 손잡고 있는 명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면 범한이 보기에도 자신에게는 아직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놓아둔 요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요패는 일단 여기에 두겠네. 오늘 밤이 되기 전에 답을 주게. 물론 일단 결정을 내린다면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야.”

하서비가 공손하게 몸을 틀어 한쪽으로 비켜서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범한의 말에 대한 즉답은 아니었다.

“대인께서 오늘 와주신 일은 마치 천신의 강림과도 같았습니다. 대인께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게 싫으셨겠지만 이미 유명하신 분이라 숨기시는 건 어쩌면 힘들 것 같습니다.”

하서비가 아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급히 다른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하 당주는······ 여전히 어쩌다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구는군. 그렇다면 우선 지금 하는 연기나 잘하게나. 그리고 본관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무엇 하러 덮어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큰 강에 있는 배는 하 당주의 부하들에게 호송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군. 본관이 은전을 한 상자 가져왔는데 도적이 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러네.”

하서비가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고개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인,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범한이 몸을 돌려 셋째를 의자에서 내려 주었다. 그 순간 하서비는 대화를 나누느라 자신이 어린 귀인을 소홀히 대했다는 사실이 생각나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어 주저하며 입을 뗐다.

“대인, 만약 3월에 하관과 명씨 가문이 겨루게 된다면 상대편에서 의심을 할 터이니 그때······.”

“자네가 본관 쪽에 서면 본관도 알아서 자네 편을 들어 줄 것이네.”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하서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3 황자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하 당주, 빠른 결정을 내려 주니 본관도 기분이 좋군.”

* * *

강남 수채 사주 분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수채 주인이 엄격하게 함구령을 내려서였다.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명령이었지만 형제들은 큰일이 났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감히 예측만 할 뿐 함부로 자신의 생각을 다른 데 말하지 않았다.

하서비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의자에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낯빛이 어둡고 불안정했다.

고문이 걸어 들어와 하서비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수군 쪽에서는 이미 병영을 봉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서비가 낯빛을 흐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아. 이번 일만 원만하게 협상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니까.”

말주변이 없는 고문이 더듬거렸다.

“우리 배들이 많이 나포되었습니다. 채주님의 명령에 따라 충돌은 일으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한데 앞서 경도에서 오신 분들께서 떠나신 후 우리 쪽 배도 풀려났습니다.”

하서비가 고개를 숙였다.

“그쪽에서 실력을 보여 주신 거다.”

그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들 눈에 우리는 한낱 개미에 불과한 게야.”

“채주님, 이미 준비를 끝냈습니다. 공봉이 지금 뒷방에서 검을 씻고 있습니다. 채주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지요.”

하서비는 명령을 내릴 기미가 없었다. 대신 이맛살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잠시 후 그가 느릿느릿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전 고문, 자네가 보기에 이번 일은 해도 괜찮을 것 같은가?”

그의 손은 감찰원 요패를 살살 문지르고 있었다. 하도 많이 문질러서 그런지 요패는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고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채주님의 분부에만 따르겠습니다. 소인, 어찌 감히 말참견을 하겠습니까.”

하서비가 눈을 감았다.

“경도에서 오신 대인은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게 습관이신 것 같았어. 그리고 내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셨고 말이지. 아무리 7, 8등급이나 되는 고수들을 호위 무사로 두고 있어도 우리가 모두 덤빈다면 실제로는 기회가 있을 수도······.”

고문은 속으로 두어 번 욕을 뇌까리고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불가능한 거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거냐? 제 손으로 오명은 뒤집어쓰고 싶지 않으니 나에게 설득해 달라고 하는 말이군!’

고문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뗐다.

“호위 무사 중 대장은 실력이 정점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 자가 강호 무림에 나온다면 자신만의 문파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채주께서는 심사숙고하시지요.”

“제일 중요한 건 그 대인이구나.”

하서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사실 범한이 그에게 내건 조건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다만 하나의 파를 형성한 당당한 주인인 자신이 별안간 그의 부하가 되어야 하는 데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앞서 범한과 이야기를 할 때는 비굴하게 굴어 놓고 이제 와서는 고문에게 최후 일격을 할 준비를 시킨 것이었다. 이는 모두 수채 내 최고수 공봉 선생이 때마침 사주 분타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강남 수채는 반격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하서비는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최후의 일격’은 단순히 자기 위로 차원에서 하는 것임을 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못난 놈이 아니란 걸 보여 주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하서비가 탄식했다. 무언가 이유 모를 슬픔이 밀려들었다. 강남 수채가 이제 곧 자신 때문에 조정의 개가 되어야 한다니 그에게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하서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울상을 짓고 있는 고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현명하지 않은 선택을 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고문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였다. 위로를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하서비는 손이 닿는 곳마다 싸늘한 기운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경도 사람들에게 놀란 고문이 한겨울임에도 식은땀을 흠뻑 흘린 걸 알게 되자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하서비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황권과 감찰원이 주는 위압감은 자기 같은 민간 패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린 그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배치를 풀어라. 공식적으로는 그 선박을 감시하는 것으로 하되, 뒤에서는 배가 안전히 운항할 수 있도록 보호해라. 경도에서 온 배가 안전하게 소주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육지에 오르란 말씀이십니까? 대인 곁에 있으라고요?”

“대인 곁에는 고수들이 즐비해. 그러니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고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공봉 노(老)대인 쪽은······ 이미 손쓸 준비를 마쳤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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