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에서 하는 일은 자네들의 규칙과는 다르네. 그들이 배 위에서 칼을 휘둘렀으니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던 거지. 만약 그때 본관이 마음이 약해져 그들을 풀어 주었다면 훗날 그 소식이 경도까지 흘러 들어가 조정의 진노를 샀을 것이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처참한 결말을 맞았을 테지. 물론 그자들의 가족도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야.”
하서비가 침묵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후 처음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오늘 대인께서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상대방이 모든 걸 명확히 설명해 주었다. 배에 은전을 훔치러 올라온 일은 십여 명 형제들의 선혈로 깨끗이 씻어 냈으니 이 일은 일단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자연히 다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어 부하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3 황자도 의자에서 뛰어내려 자리를 피해 주려 했지만 범한은 황자에게 남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달라 했다.
* * *
집안에는 세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하서비가 속으로는 어떤 갈등을 빚고 있고 혼잣말을 해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 같은 암흑가 인물이 한꺼번에 두 분의 ‘황자’를 뵐 수 있게 된 건 의외로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나는 범한이네.”
범한이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다.
하서비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은연중에 알아차리기는 했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신분을 드러내자 심장이 벌렁대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금 여기에 있는 젊은이는 경국 민간에서 이미 전설처럼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만 스물이 되지 않은 나이로 감찰원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을 쥔 제사 대인이 되었고, 황궁에서 시를 지었고, 거리에서 사람을 죽였고, 춘시 사건의 폐단을 바로잡았고, 북제에서는 해당타타와 겨루었고, 북제에서 책을 가져왔고, 귀국 후에는 황자에게 모욕감을 준 인물이었다. 그리고 고작 2년이 만에 호적에도 오르지 않았던 시랑의 서자에서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등극했다. 또한 문과 무를 모두 겸비하고 있으며 양쪽 분야에서 모두 최정점의 수준에 도달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일단 범한 이야기가 등장하면 젊은 남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향한 부러움과 흠모의 마음을 드러낼 정도였다. 이 점에서는 하서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비슷한 처지인 터라 하서비는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제사 대인에게 더욱 큰 찬사를 보내던 중이었다. 한데 문제는 자신이 제사 대인에게 죄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범한 대인에게 죄를 지었으니 자신에게 결국 어떤 일이 있을지는 하서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살펴봐도 범한의 손에 잘려 나간 인물로는 전임 예부 상서 곽유지, 형부 상서 한지유, 도찰원 좌도 어사 곽정이 있었다. 이 젊은이 때문에 도찰원의 어사가 곤장을 두 차례나 맞았고 2 황자도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장 공주는 황실 금고에서 쫓겨나게 될 판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범한의 신분은 갈수록 예사롭지 않게 변해 갔다. 그런데 재상의 사위가 되더니 이제는 황제 폐하의 핏줄이라고? 경도의 중추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일에 대해 경도 백성들은 신비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에게는 이름에도 금테까지 둘러져 있었으므로 하서비로서는 감히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였다.
하서비가 지금 어떤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이내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범한에게 절을 올렸다.
“민초 하서비, 제사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 * *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도 범한은 그에게 일어나란 말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흥미롭다는 듯 하서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명칠소, 본관은 자네가 조금 더 진실하고 간절하기를 바랐다. 적어도 예를 올릴 때 네 본명을 사용하기를 바랐지.”
동공이 수축된 하서비가 순간 고개를 치켜들어 온화한 듯해도 실은 사람을 압박하고 있는 범한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아래로 향해 있었고 언제든 천둥 같은 일격을 날리려 했다.
명칠소라니!
그동안 들어 보지 못한 세 글자가 그의 귀에 파고들어 독사처럼 그의 대뇌를 물고 늘어졌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속으로는 폭발하고 말았다.
‘어떻게 내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거지? 이 소식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강남에 백 년 동안 뿌리내리고 산 가문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두려 하지 않을 텐데! 내가 아무리 강남 수채를 갖고 있어도 이래서는 내가 이길 가능성이 없잖아!’
“신발에 숨겨 둔 비수를 꺼낼 필요는 없네.”
범한은 상대방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동작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당주는 당연히 잘 알고 있겠지. 본관의 특기가 바로 그런 거란 걸 말일세.”
그런 후 범한은 손을 드는 척했다. 그러자 하서비도 그 틈을 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완전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으면서 귀로는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예의주시했다. 한데 아까 지시해 놓은 일을 고문이 준비해 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위험한 국면에 처한 하서비는 범한 제사가 자신에게 어떤 위협을 가할지 예측하고는 있었다. 그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너 죽고 나 죽자였다.
아직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3 황자는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 어미가 과거에 지금 명씨 가문의 할머니에게 맞아 죽었다지.”
범한이 감찰원에서 수집한 정보를 말했다.
하서비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언제든 범한을 제거해 버릴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수채 대두목으로서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북제의 해당타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9등급 실력자. 그러니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한들 지금 당장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
“자네는 어려서부터 큰형에게 학대받고 자랐고.”
범한이 하서비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 당주는 너무 괘념치 말게나. 본관에게는 자네의 아픈 과거사를 들춰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다만 자네와 거래를 할 생각이란 건 알려 주고 싶군. 그리고 그 사업이 명씨 가문을 향한 자네의 복수심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네. 자네가 명씨 가문을 충분히 증오하지 않는다면 나도 자네를 찾아올 일은 없었거든.”
하서비는 금세 화가 풀렸다. 이에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대인께서는 소인과 무슨 장사를 하시려는 것입니까?”
“자네가 하려는 일을 본관이 도울 수 있지.”
거래와 관련된 게 거론되자 범한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하 당주가 최근에 은전이 부족하다던데. 반면 내게는 은전이 있고 말일세.”
범한에게 은전이 있는 건 당연했다. 일단 범한은 담박서국과 포월루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6부 관아와 대 태감 같은 사람들이 준 돈, 정풍 운동으로 거둬들인 황금과 은전까지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정말 놀랄 만큼 많은 액수였다.
물론 강남이라는 부유한 지역에 있는 명문가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범한 제사에게는 재물신급의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란 사람이 국고와 황실 금고를 모두 관리한다는 건 세상 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집안에 돈이 없다고 한다면 셋째 형수 같은 신분 낮은 사람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하서비는 범한이 자신을 위협하는 중이라고 생각만 할 뿐 도우러 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얼빠진 사람처럼 물었다.
“대인······ 3월에 황실 금고를 여는 일과 관련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자네와 나 모두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니 바로 말하지.”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3월에 황실 금고가 문을 열고 입찰에 들어갈 걸세. 황실 금고가 왕년에는 최씨와 명씨 가문이 주무르던 것이라지만 최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어. 그러니 올해는 자연스레 커다란 변동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하 당주가 끼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이네. 그리고 공교롭게도 본관이 그 일을 맡게 되었으니 내가 자네에게 입찰에 참여할 자격을 주려 하네. 그러니 은전을 충분히 들고 가 관련된 몫을 배당받으란 말이네.”
사실 범한이 수중에 은전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는 순전히 하서비가 범한의 말을 믿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었다.
하서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잠시 후 대답했다.
“제사 대인께서는 무척 친절하시군요.”
하서비는 곧장 범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찰원은 가공할 기관이란 걸, 또한 감찰원과 엮인 사람은 결국에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걸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범한이 그의 속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렸다면 그에게 비교적 적절한 설명을 곁들여 제안했을 것이다. 바로 악마와의 거래 말이다.
“본관에게 자네가 왜 필요한지 설명을 해주지.”
범한은 상대방이 움찔하는 건 개의치 않은 채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놓고 가격을 제시했다.
“강남 수채는 자네 것이지. 나중에 성공한다면 명씨 가문 역시 자네 것이 되겠지. 그러면 나라고 할지라도 관련 수익을 직접 받아 낼 수는 없게 될 거야.”
하서비의 이맛살에 더 강한 긴장이 실렸다. 세상에 이렇게나 선량한 감찰원 관원은 없을 터.
아니나 다를까, 범한은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자연스레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자네 것은 모두 내 것이 되어야 하네. 하지만 그 전에 자네는······ 반드시 감찰원 사람부터 되어야 하고.”
범한은 말을 마친 후 품에서 간단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요패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흑단목으로 만든 검고 윤기 나는 탁자 위에 가볍게 내려놓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찰원 4처의 주강남로 순찰사 감사 자리네. 품계는 높지 않으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섭섭하다니? 강남 비적 두목에게 갑자기 조정의 관직 자리를 주었는데. 그것도 관리의 공무 집행을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감사 자리를 쥐여 줬는데 섭섭하다니! 바보나 섭섭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범한이 제시한 가격에 놀란 하서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감찰원으로 들어간 후 나중에 명씨 가문이든 강남 수채든 그가 쥐고 있는 곳은 감찰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중에 황실 금고와 관련한 방대한 수익을 두고 나눌 때도 여전히 감찰원이······ 아니지, 어쩌면 범한 제사가 개인적으로 한 말일 수도 있었다.
거액의 자금이 생기고 아무도 모르게 관리가 되고 황실 금고가 주관하는 입찰 경쟁에 범한 제사의 도움으로 참여하게 되자, 하서비는 처음으로 저 돈 많은 가문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인생에서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주저했다. 왜냐하면 첫째, 자유를 잃어서였다. 범한의 부하로 들어가 충견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강호를 구르며 살아온 그에게는 딱히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범한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둘째, 감찰원이 너무 악명을 떨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관직을 받았다는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훗날 더 큰 권력을 쥐게 된다 하더라도 그날로 명성을 잃게 될 게 뻔해서였다.
이에 하서비는 최후의 몸부림을 쳐보았다. 어쩌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가 버르장머리 없게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인, 이 민초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 거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뭐라고?”
범한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하 당주는 명씨 가문을 다시 손에 넣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곳은 원래 자네 가족이 있는 곳 아닌가. 본관이 알기로는 명씨 가문의 옛 어르신이 첫 번째로 생각해 둔 이름이 명청성이라 하던데.”
명청성은 하서비의 본명이었다. 하서비가 놀라 살짝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