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범한은 오른손 쪽에서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에 고개를 돌려 보니 3 황자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손만큼은 무의식적으로 범한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실은 조금 무서웠던 것이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상황에서도 범한은 설명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여러 사람 사이에 있을 때는 필히 모든 걸 압도할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탕탕탕탕, 하는 소리가 황당하게도 음악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순간 강남 수채 분타 형제들은 믿기 힘든 광경을 보게 되었다. 분타 입구에 무수히 많은 단도가 비가 내리듯 날기 시작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단도들이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후 곧바로 들린 것은 수많은 “꺼억!”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범한의 앞길을 막아선 졸개들의 몸이 하나같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 * *
갑자기 불어닥친 강력한 바람처럼 고달이 다른 여섯 호위 무사를 이끌고 범한을 포함한 네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등에 지고 있던 장도를 꺼내 졸개들을 날려 버렸다. 하늘을 뚫을 듯한 무사들의 기세에 길을 막아섰던 졸개들은 질겁하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사이 범한은 변함없이 평온한 얼굴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안으로 향했다. 옆에서 장도가 번쩍할 때마다 “끄억”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범한은 편안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천만이 달려온들 날 막을 수 있을쏘냐.”
범한이 옆에 있는 3 황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조정은 강호 사람과 교섭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저들에게 일을 하도록 시키는 것뿐. 그러니 초면에 뭔가를 더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요.”
3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놈들을 이리저리 노려보며 생각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3 황자가 흥분했는지 어느새 자그마한 손바닥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다.
“왜 저들······ 강호 사람들의 실력으로는 일격도 당해 내지 못하는 거죠?”
3 황자는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남 수채 졸개 중 일부는 바닥에 나뒹굴며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자리에서 일어난 자들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범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말없이 장도를 쥐고 있는 손에 눈이 갈 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문은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칼자루를 안정적으로 쥐고 있는 손을 노려보며 속으로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강호에 왜 갑자기 7, 8등급이나 되는 고수가 나타난 거야? 더군다나 저런 실력자가 왜 호위를 하고 있는 거냐고!’
* * *
범한 일행은 이미 본관 대청의 돌계단 아래에 와 있었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3 황자를 향해 웃었다.
“무공은 왜 배울까요? 글공부와 마찬가지로 권력, 이익, 명예를 위해서랍니다. 강호는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주지만 조정에서는 줄 수 있는 게 더 많이 있지요. 그래서 정말로 이름이 난 문인은 모두 조정 관료로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정말 대단한 고수는 조정을 위해 힘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는 그런 말에 속으셔서는 안 됩니다. 강호는 궁핍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보호비라는 돈을 거둬들이는 전망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 진짜 고수들을 끌어들일 리 없는 것이고요.”
본관 대청 앞으로 가자 강남 수채의 주인 하서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일행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나고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 말거라. 경도에서 오신 저 손님분들을 만나 뵐 것이니라.”
하서비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너무 놀라 덜덜 떨고 있었다. 상대방이 경도 선박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알아차린 터였다. 하지만 자신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서비는 손을 뻗어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양새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범한 일행이 마치 집에 온 듯 자연스레 중당(中堂)으로 들어가 버려서였다.
범한은 3 황자를 주인석에 앉히더니 호탕하게 황자 옆에 앉았다. 사사와 사천립은 범한 뒤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일곱 명의 호위 무사는 칼자루를 쥔 채 중당 안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자신의 구역에서 상대방이 거드름을 피우자 하서비는 하마터면 벌컥 화를 낼 뻔했다. 하지만 노기를 최대한 억누르고 범한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하서비가 대인을 뵈옵니다. 한데 강호 초야에도 호걸은 있사오니 대인의 조금 전 말씀은 조금 과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쯤 됐는데도 범한이 경도에서 온 힘 있는 인물임을 하서비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는 정말로 바보 천치였다. 하지만 바보는 아닌 관계로 어떻게든 분노를 억눌러야만 했다. 경국에서 조정은 절대로 깰 수 없는 견고한 존재, 가공할 만한 존재니까. 그리고 관(官)에게 대항하려는 헛된 망상을 지닌 세력은 결국에는 한낱 연기처럼 사라지는 비극적 결말만 맛보게 되니 말이다.
“하서비인가?”
범한이 자기 앞에 있는 음험하고 사나워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하자 이내 온화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관이 여기에 손님으로 왔다는 건 사람들이 한동안은 몰랐으면 하는데. 앞서 많은 사람이 본 일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를 해주게나. 조금 힘들겠나? 그렇다면 본관이 하 두목에게 내린 첫 번째 시험으로 여기게.”
젊은 관원의 말에 하서비는 머리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쌓여 왔던 모든 굴욕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는 강남 수채의 주인으로 암흑가에서는 나름 명성이 자자한 인물로 지내며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서비는 똘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판단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방의 신분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예측은 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옳다면 이 젊은 관원은 그야말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 옆에 있는 어린아이는······.
‘참자!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
하서비는 계속 자신을 다독였다. 상대방의 권세 정도면 새끼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자신이 몇 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걸 몽땅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어서였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준비해 왔던 복수라는 대업도 무용지물이 된다. 게다가 몇천에 달하는 졸개들은 건사할 가정이 있는 형제들인데 그런 그들이 단번에 머리통이 잘려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금껏 경국 백성이 황실에 보여 왔던 무한한 경외심으로 자신의 정신을 꽁꽁 동여매 반역을 저지르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도 갖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참는 수밖에. 강호를 떠도는 사내에게도 혈기는 있고 건달도 3할 정도는 결연함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형제인 졸개들의 목숨을 살리고 자신의 평생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서비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리고 공손함 속에 비굴함까지 담아 말했다.
“오늘 대인께서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범한이 하서비를 쓱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번거롭겠지만 하 어르신은 본관이 앞서 분부한 것부터 처리를 해주게나.”
하 어르신이란 호칭을 쓰기는 했지만 건성건성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강호에서 통용되는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는 전혀 없었다.
하서비는 상대방이 대체 무슨 계산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에 한껏 침울한 낯빛으로 몸을 돌려 중당 밖으로 나가 두려움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고문에게 몇 마디 건넸다.
중당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범한은 꽤 느긋해 보였다.
대화가 재개되었다.
“본관이 오늘 이렇게 온 건 하 어르신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네.”
범한은 찻잔을 내려놓고 하서비를 온화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며칠 전 밤에 영주 나루터에서 본관이 타고 있던 배에 손님들이 왔었지. 그리고 본관은 그들을 배에 남아 있도록 했고. 하 어르신은 이 일과 관련해 어떻게 거래를 할 생각인가?”
하서비는 낯빛만 어두워질 뿐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다 외려 되물었다.
“대인, 이 하 아무개가 부인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강호인으로서 수하인 형제들에 관한 일이니 모른 척 지나갈 수 없어서입니다. 맞습니다. 그날 밤 대인의 배에 실수로 올라간 이들은 모두 하 아무개의 형제들입니다. 대인께서 미복으로 남쪽에 오시는 바람에 순간 눈뜬장님이었던 제가 대인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시지요. 모든 죄목은 이 하 아무개가 짊어지겠으니 부디 부하들은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3 황자가 듣기 거북스러웠는지 찻잔을 탁자 위에 무겁게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가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듯싶으냐?”
3 황자는 말을 할 때 일부러 길게 늘여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젊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라 그런지 음침하고 괴이하다기보다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느낌이었다.
하서비는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죄명을 말하자면 바로 황자 살해 기도였기 때문이다. 몇천 명을 구덩이에 묻는다 해도 씻을 수 없는 죄였다. 하지만 하서비는 어려서부터 명씨 일족에게 추격당하면서도 암흑가에서 상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강남 무림에서도 중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는 굳은 마음과 주도면밀한 사고력을 지닌 이였다.
하서비가 자기 앞에 있는 귀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들을 소탕하기 위해 관병을 보낸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분타로 왔다는 건 그들 뒤에 더 큰 뜻이 숨어 있어서라고 말이다.
이에 하서비는 범한이 정말로 두렵지는 않았다. 단지 경도에서 온 귀인들이 대체 무엇을 원하기에 이리하는지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서비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강호 사람이 가장 중시하는 기개를 버리고 범한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민초인 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크나큰 죄이옵니다. 하오나 대인들께서 하해와 같은 덕을 베풀어 주셨고 또한 아무런 손해도 없으셨으니 부디 대인께서는 이 민초의 몸뚱이를 수천수만 조각으로 저미는 형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민초의 무지하고 경솔했던 형제들은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배짱을 부리며 눈 가리고 아웅 해본 것이었다. 상대방의 그런 점을 못 알아챘는지 아니면 그의 임기응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범한은 긍정적인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 당주는 과연 수하를 아끼는 진정한 호걸이군.”
서로가 서로를 추켜세워 주고 있었다. 하서비의 경우는 자신에 대한 호칭을 ‘나’에서 ‘하 아무개’로, 다시 ‘민초’로 바꾸며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었다. 범한의 경우는 처음에는 그를 ‘하서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가 ‘하 어르신’으로, 다시 또 ‘하 당주’로 바꾸어 부르며 그의 체면을 점점 더 세워 주었다. 상대방이 자신과 대화를 할 만한 신분임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딱 그만큼만 말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옆에 있던 3 황자는 순간 썰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승님이 자기가 끼어드는 게 싫어 본인이 먼저 나서서 악역을 자처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자의 신분이었던 그는 이른바 강호가 앙심을 품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이에 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하 당주의 말이 늦은 감이 있군. 그날 밤 도적들은 이미 호위 무사들이 죽여 강물로 던져 버렸다.”
“네?”
하서비가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경도에서 온 관원들이 비적보다 훨씬 더 악랄할 거란 건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그것도 단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말이다.
순간 머릿속에 관무미와 나머지 형제들의 시체며 머리가 강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게 그려지자 하서비는 가슴이 아프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얼굴에는 비통함만 드러낼 뿐 앙심까지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실력파 연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