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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57화 (357/1,108)

357화

사주 남쪽 성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지내기는 했어도 모두 이곳의 맹주가 누군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바로 강남 수채의 하 채주였다. 사람들은 하 채주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정까지는 몰랐다. 한편 그 작은 정원을 부지런히 드나드는 두목들은 대두목이 조금 번거로운 일을 하고 있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그 작은 정원은 눈에 별로 띄는 곳이 아니었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곳은 강남 수채 72련오의 사주 지역 분타(分舵: 분점 같은 곳)였다.

그래서 범한이 마차를 타고 분타로부터 수십 장 떨어진 곳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특히 수채에서 거리에 심어 둔 염탐꾼들은 범한 일행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듯 열심히 주시했다. 하지만 어두컴컴해질 무렵 평범해 보이는 6처 검수들이 이미 거리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 몇 군데를 선점해 둔 상태란 건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가 강남 수채 분타에 가까워질수록 이런저런 사람들이 범한 일행에게 다가와 무심코 하는 행동처럼 마차를 주시해 분위기는 은근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차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분타 바로 앞에 마차를 세웠다. 마차에서 가림막을 열고 나온 서생이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서서 진중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고는 공손하게 몇 마디 건넸다.

잠시 후 분타에서 팔자 눈썹과 노란 눈동자를 지닌 고문으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경계하는 낯빛의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생을 향해 물었다.

“무엇 하는 사람인가? 대체 누구기에 하 어르신을 만나 뵈려 하는 건가?”

서생은 사립이었다. 그는 지금껏 강호에 발을 담가 본 적 없던 터라 음침하고 표독한 표정의 고문과 마주하게 되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졸개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분명 흉기를 들고 있었다. 사천립은 서생이다 보니 속으로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에 저도 모르게 스승 대인께서 자신에게 이런 도리에 어긋나는 험한 일을 시켰다며 욕을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긴장감을 억누르고 입을 뗐다.

“우리는 경도에서 왔소이다. 협상할 일이 있어 수채의 하 채주를 만나러 왔지요.”

분타 고문은 사천립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두어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차를 삐딱하게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니면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만약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주인님을 뵈려 하는 거라면 왜 문 앞까지 와놓고 내리지 않는 거지? 손님으로 와놓고 어찌하여 이리도 예에 어긋나게 수상쩍게 행동하는 거냐고!”

* * *

마차에 있는 세 사람에게는 밖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들리지 않았다. 범한이 사천립을 내보낸 건 서생 동무의 정신력을 단련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에 범한은 셋째와의 대화에만 신경 썼고 그가 온화하게 말했다.

“마마, 양주에서 사주까지 오는 동안 민생을 살펴보셨지요? 경도와는 많이 다르니 마마는 그 모습들을 잘 새겨 두셔야 합니다.”

밤새 길을 달려오는 동안 범한은 3 황자에게 길에서 마주치는 일반 백성들의 모습을 일부러라도 보도록 했다. 그에게 제대로 된 민초들의 삶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에 길가에서 땔감을 짊어지고 가는 노인이 보일 때도, 점포에서 냉차를 파는 여인이 보일 때도 범한은 마차를 멈추고 백성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이른바 ‘황자 훈육’이란 걸 범한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별다른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이와 같은 방법을 시도해 본 것이었다.

범한의 교육 방식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사천립은 스승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3 황자는 조용히 그 교육을 받아들였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함으로 침묵을 유지하며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해대지 않았다.

“백성들은 참으로 힘들게 사는군요.”

3 황자가 공손하게 대답하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경국의 세금이 과중한 것은 아니나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힘드네요. 하나 이곳 백성들의 얼굴에는 편안함과 행복함이 깃들어 있으니 이것만 봐도 백성들이 실제로 바라는 건 그다지 눈높이가 높은 게 아닐 겁니다. 그러니 조정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백성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부터 해결을 해주는 것이겠군요.”

범한은 맹인이 코끼리 만지듯이 교육하는 중이었다. 범한은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알지 못해 3 황자의 대답에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백성들은 쉬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 황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과 조정 백관들의 녹봉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지요. 마마께서 훗날 태자 전하를 도와 천하를 다스리시려면 백성들에게서 취할 때 어찌해야 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한계선을 넘지만 않으신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3 황자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스승님, 양주 백성들의 풍습이 사주보다는 사납군요. 그곳 사람들의 얼굴에는 원망과 사나움만 있었으니 아무래도 그들에게서 조정이 너무 많은 걸 가져가고 있나 봅니다.”

배 위에 있을 때 이 어린 3 황자는 범한을 사업 대인이 아닌 스승님이라 부르겠다며 친근하게 요구했었다. 범한과의 거리감을 더 좁히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몇 차례 거부했지만 효과가 없어 그냥 3 황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3 황자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자신이 몰래 죽인 양주 지주가 생각나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싶어졌다.

“저······ 강남 수채에 대해 마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협객은 무(武)로 금령(禁令)을 어긴다고 말입니다. 수채라면 단순히 물가에서 궐기한 검은 무리 아닙니까. 배에서 생활하는 건달에 재물을 위해 남의 목숨을 해치고요. 단순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것이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협객의 기품은 없는 것이지요.”

3 황자의 맑고 어린 얼굴에 잠시 증오의 빛이 스쳤다.

“제자인 제 생각으로는 대군을 동원해 저들을 일망타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두머리는 참수해야 하고요. 그리고 나쁜 짓을 하는 데 동참했던 이들은 북쪽 변방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앞서 백성들의 기풍이 지리적인 기세와 환경 그리고 생존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꺼번에 말끔히 제거하는 방법은 들풀을 순식간에 없애기 위해 들불을 놓아 버리는 것과 같지요. 백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와 같은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결국 비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들풀은 봄바람이 불면 다시 솟아나기 마련이지요. 이렇듯 같은 일이 반복되기만 할 텐데 언제쯤 문제를 해결해 상황을 끝내게 될까요?”

그러자 3 황자는 생각을 좀 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의 방금 말씀은 틀리셨습니다. 질서를 해치는 백성들에 대해 조정은 마땅히 엄격하게 법률을 적용해야 합니다. 스승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강남 수채는 사호 수군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텨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질서를 어기는 백성들이 암암리에 조정의 기강까지 해치도록 내버려 둔다면 훗날 어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3 황자가 싸늘하고 날카롭게 말을 이어 갔다.

“백성을 보듬고 그들이 잘 살도록 해주는 건 천하무적인 사람이라면 필히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다만 감히 앞장서서 도적질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죽여야 할 놈은 어떻게든 죽여야 합니다!”

범한이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3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 아이가 자신보다 훨씬 명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가림 기술은 범한 자신보다 훨씬 떨어지는 게 보였다. 자기 앞에서 용감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다니 어찌 보면 기탄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듯하다.

강남 수채를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한 건 범한 앞에서 꾸미지 않은 결단력을 보여 주려 했던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진심을 알아 달라는 심정으로 말이다. 범한은 강남행에서 어떻게든 셋째를 바꾸어 보려 생각 중인데 셋째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어린 녀석이 아직 능숙하지는 않아도 이 정도의 심계를 꾸밀 줄 알다니 정말 대단했다.

“그렇다면 마마께서는 소신이 오늘 강남 수채 분타에 오는 걸······ 왜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스승께 묘수가 있으신 것 같기에 이 제자 함부로 예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3 황자가 평정심을 되찾고는 웃어 보였다.

범한이 눈썹을 씰룩였다. 3 황자가 세부 사항까지 아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대략적인 방향은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이에 범한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좀 위선적인 놈인 것 같아.’

그 순간 마차 밖에서는 대화가 절반 정도 진행된 터였다. 사천립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문이란 자가 당황한 낯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를 에워싸고 있던 졸개들은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마차 가림막이 열리더니 범한이 머리를 내밀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후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압박해 오고 있는 비적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후 몸을 돌려 3 황자와 사사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3 황자가 범한 곁에 섰다. 키가 이제 겨우 범한의 겨드랑이 정도밖에 안 되는 황자는 제법 흥이 올라 주변에 있는 수채 졸개들을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저들이 소위 강남 인사란 사람들입니까?”

범한이 대답했다.

“그런 셈이겠지요.”

3 황자는 두려움 따위는 없는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황자의 신분이어서 강호의 험악함을 알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범한 제사가 자기 곁에 있으니 자신의 신변 안전 같은 문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현공 사당에서 자객 사건을 겪은 후 셋째는 범한 제사만 곁에 있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이제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범한의 신분을 알게 되었니······. 천자의 집안사람들은 본래 무정하기 짝이 없다지만 3 황자는 범한만은 예외로 보였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틀어 3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궁금하다는 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어찌하여 전혀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3 황자가 웃었다.

“스승님께서 곁에 계신 데 무엇 하러 걱정을 한답니까?”

모두 범한을 북제 해당타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공의 천재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진짜 상태를 아는 이는 없었다. 단지 범한이 왜 자신의 안전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모하게 호랑이 굴로 들어가려 하는지만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강호 수채 사람들의 귀에도 들렸다. 이는 상대방의 신분을 말해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강남 수채 사람들은 어린아이는 대략 어느 대귀족의 공자일 것이고 저 예쁘장하게 생긴 서생은 입주 교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도 입주 교사의 나이가 너무 젊기는 했다.

“도련님, 우리도 들어가 볼까요?”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과 경계에 찬 눈빛을 무시한 채 범한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한 손으로는 아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인을 붙잡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고문의 낯빛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인적 구성을 보고 그들이 채주가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적(敵)임을 알아차려서였다. 그런데······ 저들은 무엇 하러 직접 찾아온 거지? 대체 배에서는 언제 내린 거고.

지금 이 순간, 강호 수채 소속의 무수히 많은 형제들은 강에서 힘겹게 범한 일행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박과 목숨을 건 일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찾고 있던 적이 거들먹거리며 사주 분타 앞에 나타나 자기들 멋대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저들을 잡아라!”

고문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이렇게나 오만하게 구는 적은 지금껏 본 적 없었는지 속으로는 제법 당황한 상태였다. 그런데 허풍을 강하게 친다는 건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 그렇다면 지금 하 어르신이 분타 안에 계시니 이건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게 대응한다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고문의 고함 소리에 졸개들은 단도를 꺼내 들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범한을 죽이러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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