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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55화 (355/1,108)

355화

소문무가 뱃머리에 있는 사내아이를 잠시 보고는 씁쓸하게 물었다.

“대인, 황자마마께서 감기에라도 걸리신다면 대인이 난처해지십니다.”

“마음과 의지를 단련하도록 하는 중이네.”

범한은 강남행에 오른 내내 3 황자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동승한 사람들이 봤을 때도 의외였으니 당사자인 3 황자도 어쩌면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었다.

“대인, 상자에 든 은전은······.”

소문무가 슬쩍 운을 떼보았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잘 지켜보고만 있게. 저 여인이 이미 보지 않았는가. 그러니 더는 보는 사람이 없게 하게.”

소문무는 그러겠노라 답하고는 다시는 은전에 관해 묻지 않았다.

범한이 허리를 쭉 폈다. 그러다 문득 큰 선박과 은전이 가득한 상자, 거기에 여인까지 거느리고 강남으로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정말로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마침 계절이 맞지 않아 아쉽다고 생각했다. 날이 따뜻해 얼음을 띄운 차가운 과일즙을 옆에 두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면 훨씬 더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을 텐데.

“관무미는 우리에게 잡혀 있습니다.”

소문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강남 수채에 있는 하 큰 두목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후에 배가 양주에 도착하는데 그곳 감찰원 관원에게 알려 소문을 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그들이 한동안은 내 신분을 몰랐으면 좋겠네. 강남에서 날뛰는 흉악한 자들일지라도 상대방의 내력을 모르는 이상은 조심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나는 그자가 이 일을 위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 봐야겠네.”

“그렇다면······.”

“4처 담당자에게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지 말게나.”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젯밤 자네 사람들이 셋째 형수란 자를 영주에 남겨 두지 않았는가? 그 아낙이 어떻게 해서든 하서비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네.”

* * *

이날 경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황당한 일을 당한 사람은 바로 범한이 말한 셋째 형수였다.

영주 나루에 있던 민간 선박들은 모두 떠나고 없을 때였다. 셋째 형수는 바보처럼 멍하니 나루터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아직 훈연이 덜 된 육포가 들려 있어 가끔씩 가격을 물어 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대답조차 해주지 못할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산적들이 영주에 심어 놓은 염탐꾼으로 평소에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정보를 캐냈다. 어제 그 선박 위에 있던 은전 상자 정보를 가장 먼저 알아낸 사람 역시 그녀였다.

선박이 사라진 건 큰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관 누님이 이끄는 산적은 살인을 하고 물건을 강탈한 후 밤사이 하류 모래사장까지 배를 몰고 가 태워 버리고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일을 해서였다.

이에 셋째 형수는 아침에 배가 사라지고 없어 관 누님 일당이 성공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나루터에서 반나절을 기다렸는데도 이상하게도 관 누님 쪽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관 누님도, 둘째 오라버니도 그리고 단 한 사람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형수 입장에서는 사라져 버린 배처럼 모든 산적이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었다. 이에 그녀는 일단 해 질 녘까지 나루터에서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모두 죽어 버리기라도 한 듯 나루터는 고요하기만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셋째 형수는 일이 났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이를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배 위에 있는 호위 무사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젯밤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 테니 관아에서도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런데 관아에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이 또한 이상했다.

‘설마 어젯밤 그 배가 유령선이었어? 그게 아니라면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나 쉽게 거둬 가는 게 가능해?’

셋째 형수는 밤새도록 여장을 꾸렸다. 그런 후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집에 있는 귀중품들은 잘 숨겨 놓고는 큰돈을 들여 마차 한 대를 대절해 밤새도록 험한 산길을 달려 하류 쪽으로 갔다. 양주를 지나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동쪽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강남로에 있는 큰 고을을 눈앞에 둔 때였다. 그녀는 꼬박 이틀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동안 물을 조금 마신 것 말고는 끼니도 걸렀다.

셋째 형수는 계급이 낮은 사람으로 원래는 관 누님 같은 두목과는 접촉할 수 없었다. 그런데 피로에 전 채 푹 꺼진 그녀의 눈 때문인지 몰라도 접견 책임자는 그녀의 말을 믿어 주었다. 그러고는 한껏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이 지역의 가장 삼엄한 후원에는 강남 수채의 대두목이 있었다. 대두목은 아직 나이가 서른이 되지 않았으며 강호에서는 이름깨나 떨치고 있는 하서비란 인물이었다. 두 눈을 감고 셋째 형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하서비가 서서히 눈을 뜨자 주변을 압도하는 싸늘함이 뿜어져 나왔다.

“그 배가 아직 물에 떠 있다면 어떻게든 막아야겠지.”

그런데 배라는 건 당연히 물 위에 떠서 움직일 터. 하서비는 강남 일대 물길에서 활약하는 이들을 부하로 부리고 배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 전 한 말은 강한 자신감과 함께 은근히 분노를 드러낸 것이었다.

겨울이 되어 유수량이 줄어든 터라 양쪽 강기슭에는 제방을 보수하러 나온 백성들로 붐볐다. 백성들은 개미처럼 힘겹게 돌과 토사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위쪽에서 은전이 단 한 번도 제대로 풀린 적이 없다는 소문을 들어서인지 하청을 받아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마지못해 제방 보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온종일 힘들게 일해도 동전 한 닢 챙기지 못하는데 누가 열심히 일하랴. 이에 백성들은 게으름이나 피우며 높은 자리에 있는 선비와 관리님들이 하는 것처럼 가끔씩 세월아 네월아 하며 이미 지겹도록 본 강물이나 바라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강물을 보고 있던 사람들 눈에 순간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강남으로 들어서는 큰 강 위쪽에 갑자기 여러 척의 배들이 나타나서였다. 배들은 강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주변을 순시하고 있었다. 여기는 겨울이 되면 다른 계절보다 배들이 덜 오가는 곳이다. 이에 누가 봐도 저 많은 배들은 하룻밤 사이에 누군가의 조화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배들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그러니 속도도 제각각이었다. 심지어는 배들 사이에는 개조하기는 했지만 돛이 세 개 달린 소형 삼익선도 있었다. 삼익선은 원래 조정 소속인 강남 수군의 관용 선박으로 속도가 빠른 게 특징이었으며 민간인은 절대 사용할 수 없었다. 배에 탄 남자들의 허리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어쩌면 허리춤에 칼을 숨기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그들의 시커먼 얼굴에는 눈에 띄게 물때가 묻었다는 것 말고도 과묵한 살기와 경계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강남으로 들어가는 수로에 이틀 만에 이리도 많은 선박을 불러 모은 데다 관아의 저지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유명한 강남 수채밖에 없었다. 큰 강의 통제 능력만 놓고 본다면 강남 지역의 몇몇 유명한 큰 가문들은 강남 수채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강남 수채의 정식 이름은 ‘강남 및 관련 수역 12 연환오’였으며 강남 지역에 그물망처럼 퍼진 수로를 중심으로 먹고살았다. 운수, 객운, 관련 사업 종사자들까지 모두 강남 수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특히 소금, 차, 밀을 밀거래함으로써 강력한 세력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명씨 가문의 후손으로 하서비라고 불리는 인물은 수채의 대두목이 된 후 관아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힘썼다. 이에 하 어르신께서 사호(沙湖) 지역의 수군 제독 대인과 호형호제한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불량배가 관아와 결속을 했으니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최근 몇 년 동안 강남 수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검은 거래를 줄인 상태였다. 그리고 강호를 벗어나 광명정대하게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자 이들의 명성은 전보다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강력한 세를 구축한 터라 강남 산채는 큰 강에서 거리낌 없이, 군중의 비난도 연연해 하지 않고 배로 수로를 샅샅이 훑고 다닐 수 있었다.

명령을 내린 자는 강남 수채의 대두목인 하서비였다. 그는 원래 수하들의 생사까지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실종된 관무미는 그에게는 외가 친척이었다. 더군다나 그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놈인지 모르겠지만 자기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단번에 잡아가고 자신에게 말 못 할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었다.

황실 금고는 3월에 다시 문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최씨와 명씨 가문 둘이서만 나눠 먹던 밥그릇이 아니었다. 최씨 가문의 몰락으로 올해는 황실 금고의 관할권이 장 공주에서 감찰원의 범 제사의 손에 넘어갔다는 걸 천하가 알고 있었다. 이에 하서비는 황실 금고에 도전하기 위해 자신이 들어갈 때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광명정대하게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한데 황실 금고는 사업 범위가 어마어마했다. 은전의 수량만 해도 기본적으로 십만 개부터 시작했다. 3월에 재신문(財神門)의 문턱을 넘어서서 그곳에 앉아 차만 마시는데도 놀라 까무러칠 정도로 많은 은전을 지급해야만 했다.

몰락한 최씨 가문과 여전히 잘나가는 명씨 가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하서비는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그의 부하들이 수로에서 가장 센 도적 떼라고 해도 그가 쥐고 있는 은전의 양은 명씨 가문에 비하면 거지 수준이었다. 그래서 하서비는 여기저기서 허둥지둥 은전을 갈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무미에게도 다시 수로에서 도적질을 하도록 몰래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하서비는 은전 한 개도 아쉬운 판국이라 그야말로 다급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돈 한 푼에 거꾸러지는 영웅은 없다고 하지만, 강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영웅들에게는 장사하는 법을 배우려 해도 가장 먼저 직면하게 되는 난제가 바로 돈이었다.

그러니 이 제일 중요한 관문 앞에서 하서비는 훨씬 더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까지 잃은 건 아니었다. 그는 영주 강가에서 벌어진 일이 자신을 겨누고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계속 따져 보는 중이었다.

일이 터지자 하서비는 현재 머물고 있는 사주성에 강남 수군의 수비로 있는 허수산을 초대해 함께 술을 마셨다. 강호에서 떠도는 말이 조금 과장된 건 있었지만 그가 수군의 최고위급 장수와 접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일급비밀이었다. 허 대인이란 자는 이번에 발생한 일을 듣고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하서비가 그 선박을 찾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수채에 있는 한 사람에게는 경고는 날려 두었다.

―어떤 일이든 3월 전에 매듭을 지어라. 일이 마무리된 후에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말고 몸에 있는 피비린내까지 닦아 버릴 것!

왜냐하면 범한 제사 대인이 3월에 담주에서 강남으로 온다고 해서였다.

* * *

강남 수채의 배 수십 척이 강 위에서 수색을 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커다란 선박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하서비가 찬바람이 쌩쌩 돌 만큼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자들이 아직 여기까지는 안 온 것 같군. 그 정도의 상자면 배에서 쉽게 내릴 수 없을 테니 분명히 아직 양주 부근에 있을 것이다. 양주 부근은 찾아보았느냐?”

강바람 때문에 머리에 흰 천을 휘감고 있던 사내가 당황하며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소인들은 시간을 따져 보고 훑어보았습니다. 이틀이 지났으니 선박이 사주 부근까지 왔을 것 같아······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서비가 발로 사내를 걷어찼다. 발이 사내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자 하서비는 욕을 내뱉었다.

“이 멍청한 돼지 새끼야!”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소리쳤다.

“위쪽도 찾아! 살아 있으면 산 사람을 데려오고 죽었으면 시체라도 가져와!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그 배를 내 앞에 끌어다 놓으란 말이야!”

한데 사내는 하서비의 명령을 이행하러 속히 자리를 뜨느라 산채 주인이 한 말을 제대로 살피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다. 하서비는 어느새 현 상황과 관련해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하서비는 화가 나 퉁퉁 부은 채로 탁자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최근 반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니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도 자신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복수를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으니.

하서비가 사발에 담긴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화가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열불이 치솟았다. 하서비는 눈을 사납게 치켜뜬 채 정원으로 나가 형제들이 가져올 소식을 기다렸다. 그가 가슴 앞섶을 풀어 헤쳤다. 그러자 험상궂은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지런하게 똑바로 줄을 맞추고 서 있는 정말 이상하게 생긴 상처들이었다. 강호에서 칼부림을 하다가 생긴 칼자국이나 도끼 자국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묶인 채로 누군가에게 인정사정없이 채찍질을 당한 흔적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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