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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54화 (354/1,108)

354화

한밤중임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선창 밖에서 강바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눈을 번쩍 뜨더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여종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스무 살이 되어서 뭐? 마음이 급해졌다 이건가?”

범한의 말에 사사가 다급히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화가 난 입술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문 채 단 한마디도 내뱉으려 하지 않았다.

범한은 당황해 얼른 사사의 몸을 끌어당겨 도로 눕혔다.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이었다. 경국 여자는 대략 열다섯에서 열여섯이 되면 시집을 갔다. 사사처럼 스물이 되도록 처녀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범한 기준에는 만 스무 살이야말로 가장 성숙하고 아름다운 때였지만 일반 사람들 눈에 비친 사사는 이미 노처녀였다.

범씨 가문에서는 담주의 노부인과 범한의 체면을 생각해 모두 사사를 공손히 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앞에서든 뒤에서든 여러 말이 있는데도 범한이 사사를 취하지 않으니 오히려 이런저런 말들만 더 무성해지는 중이었다.

범한은 사사를 취하는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채 줄곧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만 생각해 왔다. 한데 이는 사사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여인이 스무 살이 되었다는 건 이 세계에서는 서른이 넘은 노처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는 사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부정하고 싶은 비극적인 현실일 것이다.

마음이 상한 사사는 범한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는 잠을 청하려 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 한 이불에서 안 잔 지 2년이나 되었군.”

사사는 범한보다 두 살 많았다. 담주에 있을 때 사사는 범한과 다른 침대에서 잤지만 범한은 자기 이부자리에서 나와 사사의 침대로 기어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와 뒹굴며 일찌감치 부잣집 도령의 나쁜 습성을 길렀다.

“도련님께서도 다 크셨으니 이제는 아랫것과는 함께 어울리실 수는 없겠지요.”

사사가 고개를 이불 속에 묻은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함께 있는 것도 오랜만이군.”

범한은 사사를 어르고 달래는 대신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나 같은 못생긴 밀가루 반죽을 받아 준 건 사사뿐인데 말입니다.”

그러자 사사가 피식 웃었다.

“도련님께서 못생긴 밀가루 반죽이시라면 이 세상 여인들은 어찌 살란 말씀입니까?”

주인과 종은 순간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둘 다 방금 그 말이 《석두기》에 나오는 황희봉의 자기 비하 대목인 걸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담주에 있을 때 밤마다 범한이 책을 베껴 쓰고 사사가 옆에서 시중을 들던 광경을 떠올렸다.

범한이 수려한 해서체로 《석두기》를 옮기고 있으면 사사는 옆에서 먹을 갈고 등불을 밝혀 주고 향을 피워 주고 밤참을 준비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완벽할 정도로 여인의 붉은 소매, 향 내음 그리고 한밤에 글을 쓰는 장면을 연출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사사는 범한의 첫 번째 독자였다.

* * *

범한이 여인의 몸을 돌려 거칠게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왕 웃었으니 다시는 울지 마. 그리고 이 도련님이 해주는 금수만도 못한 웃긴 이야기나 들어 주고.”

사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범한이 말해 줄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유명한 웃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품에 폭 파묻혀 웃으며 이내 범한을 놀리기 시작했다.

“도련님께서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금수만도 못하다고 하셨던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이군요!”

“최근에서야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게 생각났다구.”

범한이 고분고분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사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지만 말이야. 물론 내가 봐도 그건 좀 염치없고 위선적이기는 했지.”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사사가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데 범한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쉴 뿐 그녀가 원하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사사는 갑자기 도련님의 뜻을 이해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감동받았다. 도련님이 자신의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는 게 너무 뜻밖이고 황당하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따뜻했다.

“도련님, 어렸을 적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주 집사를 때리셨을 때 말이죠.”

“당연히 기억하지.”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놈이 감히 사사에게 불쾌한 표정을 지어서 내가 그자 얼굴에 복숭아꽃이 피도록 패줬으니까.”

사사가 용기를 내어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은 여종일 뿐이라 사랑한다느니 연모한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수 없어서였다. 실은 범한이 주 집사의 얼굴에 복숭아꽃이 피도록 해준 날, 사사의 마음속에서도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났었다.

그때 범한은 겨우 열두 살이었고 사사는 불과 열네 살이었다.

그러니 범한은 당연히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상황을 음미하다가 저도 모르게 어떤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때 정말 세게 손찌검을 했었는데.”

사사가 범한의 품 안에서 웅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도련님은 손힘이 세세요.”

“손힘이 세다고?”

범한이 웃었다. 범한의 왼손은 어느새 이불 속으로 들어가 사사의 둥근 어깨 위에 둘러져 있었다. 사사는 잠을 자기 위해 옷을 한 겹만 입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얇은 옷으로 말이다. 그래서 범한의 손바닥이 어깨에 닿을 때 착, 하며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추억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니 희롱도 유쾌할 수밖에. 주인과 여종 두 사람은 서로 한동안 말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다만 밤이 깊어 가면서 사람도 조용해지고 이불은 따뜻해지고 공기가 애매해지면서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범한도 드디어 짐승이 되어 갔다. 두 손은 일찌감치 조신하지 못하게 먼 길을 떠나 위아래에서 열심히 길을 찾고 있었다.

* * *

“등불이, 등불이 아직 켜져 있습니다.”

사사가 부끄러워하며 다급하게 일러주었다.

범한은 이미 금수로 변한 상태라 마음이 급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사사가 불을 꺼달라고 하자 왼팔을 뒤쪽으로 쭉 뻗어 대벽관을 날렸다. 섭령아에게 배운 대벽관을 날리면 바람이 일어 탁자 위의 등불이 꺼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장풍을 날렸는데도 등잔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범한은 그제야 자기 몸에 있던 정기가 모두 흩어지고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러니 대벽관이 허공을 가르고 나가 촛불이 끌 리 없었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기가 사라지니 이런 게 제일 불편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에 구시렁대며 베개 아래에 넣어 둔 옷깃에 달아 쓰는 쇠뇌를 꺼냈다. 그리고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며 쇠뇌의 손잡이를 당겨 활을 쏘았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쇠뇌의 화살이 등불을 스치고 지나 선창 벽에 꽂혔다. 그러자 등불이 꺼지고 선창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 * *

범한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아직 재미도 보지 못했는데 바람 소리와 함께 몇 명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수들이 선창 밖으로 모여들었다. 이어 장도를 꺼내 드는 소리와 쇠뇌를 장정하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조금 전 범한이 쇠뇌로 등불을 끌 때 화살이 선창 벽에 박히면서 난 소리가 문제였다. 비록 아주 자그마했지만 전문가인 호위 무사들의 귀에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소리였다. 특히 배에는 황자와 제사 대인이 타고 있으니 야경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호위 무사들 입장에서는 경각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선창 밖에서 무사 하나가 경계심이 담긴 소리로 말했다.

“대인, 일이 터졌습니다.”

범한이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다행히도 충성심 깊은 수하들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오지는 않자 범한은 여종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데 여종이 이불 속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침통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범한은 밤새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범한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원래는 사사가 범한의 머리를 빗겨 주고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어야 했지만 오늘 아침에는 범한 혼자서 했다. 그녀가 자신을 도와주기에는 불편한 상태인 것 같아 이불 속에서 계속 쉬도록 한 것이었다.

범한은 일단 남자로서 해야 할 일부터 했다. 죽, 옥수수 떡 몇 덩이, 소금에 절인 채소를 들고 선창으로 돌아가 안쓰럽게도 몸이 불편한 여인이 아침 식사를 하는 것부터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곧장 선창 밖으로 나와 뱃머리로 향했다.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찬 겨울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상쾌하고 편안했다.

새벽안개가 물러나자 선박은 곧장 영주를 떠났다. 그 시각 배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자는 중이었다. 범한은 계속 나루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루터가 어느새 겹겹이 둘러싸인 산자락에 모습을 숨기고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였다.

“대인, 기침하셨습니까.”

소문무가 옆에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의 눈빛은 범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들은 웃긴 이야기가 벌써 배 안에 쫙 퍼졌던 것이다. 대놓고 놀리지만 못할 뿐 모두 속으로는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었다.

부하의 불량한 눈빛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범한이 대충 몇 마디 건넸다. 그런 후 눈을 한쪽으로 돌리자 3 황자와 등자월이 선창이 있는 쪽에서 문을 나서는 게 보였다.

“마마께 인사드립니다.”

범한이 3 황자에게 공손히 아침 인사를 올렸다. 범한의 행동은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경도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제멋대로 군다거나 허술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앳된 모습의 3 황자가 뻣뻣한 자세로 조금 뻘쭘하게 범한의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마친 범한은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조용히 3 황자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그러자 3 황자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억울한 사람처럼 한 손으로 다른 주먹 쥔 손을 감싸 쥐고는 범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제자, 사업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예쁘장하게 생긴 두 사람은 모두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사람은 이렇게 괴이한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선박에서의 하루를 시작했다. 배 위에는 범한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부하들 말고도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바로 황궁의 훈육 상궁과 내시 두 명으로 이들은 3 황자만을 보필하기 위해 나온 이들이었다. 한데 마음 씀씀이가 모질고 담이 큰 범한은 이들을 아래층에서만 지내도록 하고 위층으로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했다.

범한 쪽인 감찰원 8대 처에서는 일단 암살과 안전상의 문제를 책임지기 위한 6처 검수 외에도 2처와 4처 소속의 관원 둘을 더 딸려 보냈다. 2처 관원은 원활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 4처 관원은 범한 곁에 머물면서 강남 물길 근처에 있는 각 지역의 감찰원 순찰사 관원과 연락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3처 비개의 문하생이면서 지금 1처의 수장을 맡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여기에는 감찰원 조직의 거의 절반이 참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인원수는 많지 않았지만 업무 분담과 소통은 원활히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박에서의 생활은 너무나도 무료했다. 경도에서 출발한 후 사람들은 초반에는 강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즐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질렸다. 게다가 살을 에는 듯한 강바람이 불어와 요 며칠 동안은 임무 수행 중이 아니면 모두 각자의 선창 안에 틀어박혀 휴식을 취했다.

범한과 3 황자는 뱃머리에 서서 협곡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하면 3 황자는 그저 “네, 네.”라고만 답했고 범한은 만면에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소문무는 뒤쪽에 서서 범한 제사 대인과 3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현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은전을 한가득 담은 큰 상자를 배에 싣고 가야 하는 거지?’

보고를 마친 범한은 3 황자가 뱃머리에 서 있도록 내버려 두고는 제 볼일을 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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