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범한은 바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관무미가 눈에 들어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웃었다.
“내가 가끔 혼잣말하는 걸 좋아하니 내 말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 지혈을 해주마.”
관무미가 물었다.
“왜 저는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답을 해주었다.
“살인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 더군다나 네 공자란 사람과 함께 장사 이야기도 나눠야 하니까. 그자의 사촌 누이를 죽여 버리면 살기등등하기만 하고 지혜는 모자란 자가 거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어서랄까.”
관무미는 오늘 밤 이미 놀랄 대로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공자의 진짜 신분을 조사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과의 관계도 알아낼 수 있을 터. 그런데······ 지금 거래라고 말한 건가? 다시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기자 관무미가 힘겹게 입을 뗐다.
“공자님, 우리 대두목은 지금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관무미는 범한이 경도의 어느 거대한 세력가의 대리인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강한 고수 여럿을 호위 무사로 둘 수 있고 지밀한 비밀까지 알 수 있는 거라고.
관무미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밤에는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사죄의 선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앞서 범한의 말 때문에 관무미는 자신이 풀려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젊은 공자는 답은커녕 깊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무미는 저도 모르게 절망감에 휩싸여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공자님, 다 똑같이 강호를 떠도는 처지 아닙니까. 공자님께서는 이미 우리 쪽 부하 십여 명을 죽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화가 덜 풀리신 건가요?”
“강호라고 했나? 이 세상에 정말로 강호란 게 있을까?”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살인이란 건 화를 풀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일을 처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거지. 너를 이 배에서 풀어 줄 생각은 없다. 적어도 내가 너를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네가 순간 입을 잘못 놀려 내 신분을 누설하기라도 하면 그 강호라는 곳에 불필요한 일이 생길 수 있거든.”
관무미는 범한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상대방의 말에 강한 자신감이 담겨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에 절망감에 빠져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강호의 일이니 강호라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을 하려 이러시는지요?”
선창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다 한참 후 범한이 가볍게 웃었다.
“네가 오해했구나. 나는 강호 사람이 아니야.”
범한이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듯 관무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호라는 이 시끄러운 곳에서 내가 그리 한가롭게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
관무미에게 범한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댁······ 댁······은 대체 뉘신가요?”
“나 말이냐?”
범한은 진지하게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놀고먹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쓸모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니라. 물론 경국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도련님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순간 관무미는 선박에 오르기 전 일행들이 내놓았던 추측들이 생각나 하마터면 피를 뿜을 뻔했다.
“당신은 도적이군요!”
범한이 관무미의 두 눈을 응시하며 똑똑히 말해 주었다.
“한데 큰 도적이니라. 그런 나의 배에 네가 올라왔으니 주인에게 제대로 인사부터 해야 했느니라. 물론 너의 그 명칠 공자도 내 도적 배에 곧 올라와야겠지. 그리고 그자는 평생 내 배에서 내려갈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이지.”
관무미는 그제야 상대방이 명칠 공자와 거래 같은 걸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뿐. 이에 그녀가 사납게 저주하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헛된 꿈 따위는 꾸지 말거라! 네까짓 게 뭔데······. 너 같은 놈은 우리 공자님의······ 쿨럭쿨럭, 공자님의 신발닦이밖에 되지 못한다!”
범한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껄껄껄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금침을 꺼내 그녀의 팔꿈치 몇 군데를 찔렀다. 범한은 지혈부터 해주고 몇 마디 더 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돌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너의 7 공자가 오히려 며칠 뒤면 내 신발을 성심성의껏 닦아야 할 것이다. 그때 가서 너무 놀라지나 말거라.’
* * *
모든 처리를 마치자 조금 전까지 아래층에 있던 갑판원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큰 통으로 강물을 퍼 올려 선박 내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냈다. 피는 관무미의 것밖에 없었지만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갑판원들은 한참을 닦아 내야만 했다.
갑판원들이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 내고 나자 다시 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하품을 하며 자러 들어가고 선박 내부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앞서 전주곡 같았던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같았다.
“가서들 자요. 나머지 시간에는 다음 당직자가 불침번을 설 거예요.”
범한이 고달을 잠시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경국 관리와 관련한 규칙 중에는 근접 호위 무사는 두 개 조로 나누어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범한은 세 개 조로 나누어 운영했다. 물론 이 때문에 당직을 서는 사람 수가 줄어들긴 했다. 그래도 그는 전생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3교대 근무라는 착취를 하기는 했어도 그 나름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분명 효율이 더 높아지니까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두툼한 가림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양쪽으로 늘어선 선창 사이의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사천립의 방을 잠시 바라보았다. 서생 사천립은 그야말로 꿀잠을 자는 중이었다. 일찌감치 깬 소문무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한데 야심한 시각이라 범한은 소문무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자신의 방 앞까지 온 범한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 무사에게 몇 마디 건넨 후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침대 옆으로 가 앉아 이불 속에 있는 소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 황자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것이 어린 나이임에도 외모가 제법 수려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 꼬맹이가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놈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선박이 살짝 흔들렸다. 범한은 이불을 끌어 올려 3 황자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강바람이 아직 차니 찬기라도 들까 염려되어서였다.
범한은 소리 없기 웃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음에도 자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제 여덟아홉밖에 안 된 어린애가 사천립보다 잠귀가 밝다니 마음속 부담감이 큰 건 아닌가 몰라.’
생각이 미치자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왕가에 있으니까 권모술수같이 더럽고 불결한 환경에 물들어서 이런 놈이 나온 거야. 요 녀석이 가끔은 정말 밉살스럽다니까. 그러니 불쌍하게 여길 필요까지는 없겠지.’
범한은 요 녀석의 얕은수를 알아내는 게 귀찮았다. 그러다 우연히 방심한 사이 임완아의 경고가 생각나 버렸다. 범한은 임완아의 경고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이는 단순히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여당의 대행수들은 강남행 선박에 타고 있지 않았다. 범한이 몰래 강남으로 가는 중이어서 담주로 할머님을 뵈러 가는 대열은 진지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범한이 위하강의 중간 지점까지 갔을 때 가짜 범한도 마차 행렬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발했다. 흑기의 보호를 받으며 경여당 대행수들까지 대동하고 말이다. 그러니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범한이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범한이 위하강과 큰 강이 만나는 지점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로를 통해 이동하는 중이라 가장 빠르고 안전한 흑기의 지원은 받을 수 없었지만 범한은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다 해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선박에 호위 무사 일곱과 6처의 검수 여섯이 함께 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리 많은 고수 및 자객들과 함께하다 보니 범한은 종사급이 오지 않는 이상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범한이 따스한 손바닥으로 이불 속에 있는 3 황자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런데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 범한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현재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존귀한 인물은 사실은 3 황자였다. 이에 범한은 그가 호신용 부적 같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자신이 특권을 이용해 부군(府軍) 주갑(州甲)을 동원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3 황자가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만 같아서였다.
그런데 범한이 3 황자의 등을 토닥여 주는 건 사실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한데 범한은 원래 담력이 큰 사람이라 황실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3 황자를 제자 겸 동생으로 하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것이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황제 폐하와 의 귀빈의 체면은 충분히 세워 준 셈이었다.
범한은 모든 게 평소와 다를 게 없음을 확인하고 손이 잘린 관무미를 아래층에 있는 간이 감옥에 가두고 나서야 온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살짝 부은 관자놀이 부분을 문지르며 자기 침실이 있는 선창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대고 졸음과 싸우고 있는 사사가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그런 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사사의 몸은 배의 흔들림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흔들리기만 하고 절대 바닥으로 고꾸라지지는 않자 범한은 그런 사사의 모습이 자못 재밌었다.
범한은 잠시 웃었다. 사사는 범한이 먼저 휴식을 취해야 제대로 잠자리에 들 게 뻔했다. 범한은 이 점을 잘 아는 터라 크게 소리가 나지 않게 발소리를 죽이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어 한 손은 사사의 겨드랑이에, 다른 한 손은 무릎 아래쪽으로 찔러 넣은 후 사사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사사가 입고 있던 낡고 커다란 짙은 청색의 솜저고리가 둥글게 뭉쳐지는 바람에 범한이 무슨 커다란 곰 한 마리를 안은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었다.
범한은 사사가 깰세라 조심스레 침대로 옮겼다. 그런데 사사는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사사는 잠시 멍한 눈을 하고 있다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었다.
“도련님 이불은 제가 깔아 드릴게요.”
범한이 작은 소리로 한소리 했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사람이 무슨 이불을 깔아 주겠다고 그래? 많이 피곤한 거 같으니 이제 그만 자.”
그러자 사사가 입을 막고 웃었다.
“이불 속이 차지 않습니까. 도련님께서 어렸을 때 제일 싫어하신 게 찬 이불로 들어가는 거였잖아요. 그래서 저보고 먼저 들어가서 덥혀 놓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사의 말에 범한은 살짝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여인을 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예전에 담주 별저에서 함께 지낸 날들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2년이 지나갔다니. 권력 쟁탈전을 벌이고 혼인을 하고 사절단으로 나갔다 오느라 너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사사와는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사사는 여전히 살갑게 대해 주고 있어 범한은 어느새 가슴이 훈훈해져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오늘은 날 위해 이불 속을 덥혀 주려고 온 거다, 이건가?”
조금 경박한 말이었다. 하지만 경도와 담주에서는 사사가 언젠가는 범한이 침실로 들일 여종이란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사사도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는 하던 터였다. 그런데 범한이 갑자기 이상하게 말하자 사사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며 예전에 하던 것처럼 단호하게 받아치지 못했다. 대신 입고 있던 솜저고리를 벗고 냉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도련님의 새하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 사사가 검은 머리카락만 내놓고 있는 모습은 유혹적이었다.
범한은 살짝 당황했지만 잠시 후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사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함께 한 사이라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마지막 관문만 넘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한 이불 속에서 서로 뒤엉켜 놀며 할 만한 건 이미 다 해본 사이였다.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범한이 뒤에서 자신의 여종을 껴안았다. 그리고 다소곳하게 앞으로 모으고 있는 사사의 차가운 양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앞에서 숨소리가 들려오자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제가 스무 살이 되었어요, 도련님.”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말하는 사사의 말속에는 억울함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사사의 머리에서 풍겨 오는 은은한 향을 맡으며 품 안에 있는 탄력 있고 매끄러운 몸을 느꼈다. 그의 정신은 이미 옛날 담주에서 함께했던 때로 되돌아가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