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상대방이 너무나도 편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자 여도적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도 잘려 나간 손 부위를 다른 손으로 꽉 움켜쥐고 도끼눈을 뜨고 범한을 찍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며 매섭게 말했다.
“오늘 손이 잘려 나갔는데 귀하의 존함이나 알아야겠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범한은 상대방의 독기 품은 눈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이곳 주인이고 너는 도적이니라.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내 내력을 묻는 것이냐?”
관무미는 왼손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전해져 오자 손이 잘려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오늘 벽창호 같은 이를 만났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저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범한이 가소롭다는 듯이 관무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황당해서였다. 자신과 일행들은 오늘 일이 있어 영주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선박이 도대체 어떤 냄새를 풍겼는지 모르겠지만 하루도 안 되어 도적 떼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잡아 놓은 여도적은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어떻게 할 건지나 묻고 있었다.
“어찌하다니?”
범한이 손을 내밀더니 손가락에 차가운 찻물을 묻혔다. 그런 후 미간에 꼼꼼히 바르며 눈썹을 한차례 들썩였다.
“저승, 이승, 사람 사는 세상, 귀신 사는 세상, 이 중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그때 뒤쪽에 있는 선창 가림막이 살며시 움직였다. 그리고 두툼한 솜저고리를 걸친 사사가 떨떠름하게 미간을 문지르며 나와 얼떨떨해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련님, 왜 올라오셨습니까?”
넓은 선창을 밝히고 있는 등불이 눈 부셨는지 사사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내부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잘려 나간 관무미의 손을 발견한 사사는 피범벅이 되어 있는 끔찍한 현장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사사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서둘러 손으로 그녀의 입을 가로막으며 놀리듯 말했다.
“영주성 사람들을 모두 깨울 셈인가?”
담주와 경도에서 지내는 동안 사사도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본 적 있었다. 바로 범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 범사철이 가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을 때다. 하지만 손목이 잘려 나가고 다리가 부러진 장면은 처음 보는지라 너무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안정을 되찾았다. 범한이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엄포를 놓았다.
“이만 돌아가 자게. 나는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사사는 다시 한번 관무미를 쳐다보고는 “네.” 하고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그 애는 아직 자고 있지?”
“자고 있습니다.”
사사가 말을 이어 갔다.
“사 선생은 안 깬 것 같습니다.”
“사 군은 돼지처럼 잘도 자는군. 그때 도련님이던 내가 사건에 휘말렸을 때도 기생을 품에 끌어안고 잘도 자더니만.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잤었지.”
* * *
관무미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입가에는 경련이 일고 낯빛은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젊은 대인과 여종과의 대화만큼은 똑똑하게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내용이 들을수록 이상해 이 배에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밤에 산적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이렇게나 침착하고 태연하고 더군다나 잡담을 나눌 여유까지 있다니. 강한 자신감에 차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조금 덜떨어진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지금 관무미는 전자의 경우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다만 상대방이 자신과 자기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사가 떠난 선창 안. 범한은 미소를 잠시 거두고 나지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관무미. 강북로 악주 출생. 아비는 관하산, 어미는 하씨. 집안 사정이 궁핍해 어릴 때 기루에 팔려 갔고 나중에 악주 일주부의 첩실이 되었지. 본처의 괴롭힘 때문에 홧김에 그녀를 죽여 하옥되었고. 그 후 기적처럼 탈옥해 이후 모 산채의 산적 두목이 되었고. 그런 후 산채가 무너지자 또다시······ 영주 일대로 와 있었군.”
관무미는 너무 놀라 오들오들 떨었다. 손에서 전해져 오던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 청년은 어떻게 내 과거를 샅샅이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저자가 나를 잡기 위해 쳐둔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관무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악을 썼다.
“넌 대체 누구냐? 어떻게 나에 대해 그리도 상세히 알고 있는 거지?!”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기억력이 좋아 그러니라. 하나 이 자료도 명확한 건 아니더구나. 왜냐하면 너는 중요한 인물 축에도 못 들거든.”
관무미는 굴곡지고 기이한 인생을 살아 온 터라 큰 강 일대에서는 거칠기로 유명한 도적이었다. 한데 오늘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잡힌 데다가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이란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의 말투와 그자에게서 풍기는 기질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존재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이 몸 뒤에 어느 분이 계시는지도 알아챘을 텐데······. 우리를 몽땅 죽여 버린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자선을 베풀 생각은 애당초 말아야 할 거야.”
그런데 잔혹한 현실이 그녀의 환상을 산산이 부서뜨려 버렸다.
범한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가 하려던 걸 네가 직접 말해 주었구나.”
경악한 관무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예리한 칼로 목을 끊어 놓는 소리가 무수히 울렸다. 일석거 뒤쪽에 있는 큰 주방에서 닭을 수없이 잡는 소리 같아 정말로 들어 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범한을 근접 호위하는 무사들이 관무미를 따라 선박 위로 올라온 산적 십여 명의 목을 단번에 찔러 죽이는 소리였다. 그들은 도적들의 숨통을 제대로 끊어 놨는지 확인하고는 시체를 곧장 강에 집어 던졌다. 어찌나 깔끔하고 전문적으로 해치워 버렸는지 갑판 위에는 혈흔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강물 튀는 소리가 한바탕 나더니 한참 후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죽은 도적들의 시신과 피를 흘러가는 강물이 너그럽게 받아들여 준 것이었다.
십여 명의 사람을 연달아 죽이는 데 눈 한번 깜빡 않다니. 정말로 매섭고 잔인했다.
관무미의 눈빛에 드디어 공포가 깃들었다. 상대방이 손을 쓰는 걸 직접 보고 나니 이런 일은 예사로 하는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관무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남자가 아까 내렸던 명령을 수신호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에 관무미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이를 부딪치며 떨고 있자 관무미는 억지로 침을 삼켜 자신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저들과 함께 죽이지 않은 건 자신에게 살 기회를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부디 우리 대두목님의 체면도 생각해 주십시오.”
공포에 질린 관무미가 털썩 무릎을 꿇고 범한에게 인정을 베풀어 달라며 호소했다.
“너희 대두목이라고?”
대두목의 실력이 생각난 관무미는 한 줄기 희망을 잡은 것 같았다.
“공자님의 행동을 보아하니 무(武)를 연마하신 분 같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저희와 같은 길을 걷는 분이실 터. 우리 대두목님은 강남 수채(水寨: 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산적, 도적 떼, 비적의 본거지)의 주인으로, 그분은 보유한 배만 백 척이며 인재도 수없이 많이 거느리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강남에서 큰일을 도모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 대두목님과 만나시는 즉시 의기투합하시게 될 것입니다.”
범한은 여도적의 불경한 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의 애걸하는 소리가 소위 강남 수채의 주인이란 자를 들먹이며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아서였다. 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번 강남행은 정말 재밌겠어.’라고 생각했다.
* * *
“대두목이라고 했느냐?”
범한이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말하는 이가 명칠 어르신으로 불리는 자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라는데 그 가문 문턱도 넘어 본 적 없다는 명칠 공자 말이다. 듣자 하니 공자의 생모는 여러 해 전에 죽었다더군. 그리고 명씨 가문의 어르신이 돌아가시자 가업을 물려받은 큰아들이 가문의 수치인 서자를 찾아내겠다며 사방팔방으로 사람을 풀었고 말이지. 한데 진짜 이유는 명씨 어르신이 유언으로 7 공자에게 너무 많은 걸 남기셔서라고 하더군. 숨을 곳이 없었던 명칠공자는 아예 암흑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고, 이에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꼭꼭 숨어 조용히 살며 암암리에 사람을 죽이며 살았지. 그렇게 5, 6년을 지냈더니 드디어 유명세를 타게 된 거고 말이야. 당당한 강남 수채 대두목 하서비. 과거 불쌍했던 서자 명칠 공자. 어찌하다 그 꼴이 되었을꼬?”
범한이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그리고 강남에서 지위가 좀 있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과 너무 괴리가 크다는 듯 말했다.
“자기 수하들에게 여기저기에서 은전이나 빼앗고 다니게 하다니. 설마 최근 들어 필요한 은전이 모자라서 그런 건가?”
강남은 원래 부유한 지역이었는데 황실 금고가 세워진 후로 더 많은 부자가 생겨났다. 그런데 소금을 파는 염상과 해외에 물건을 파는 해상을 제외했을 때 가장 유명한 양대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최씨와 명씨 가문이었다. 두 집안은 혼인을 통해 대대손손 세력을 키워 왔다. 그리고 장 공주에게도 붙어 황실 금고에 기대어 셀 수도 없이 많은 부를 쌓았다. 최씨 가문은 황실 금고의 북쪽 밀무역 노선을 책임지고 있었다. 한편 명씨 가문은, 감찰원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분명히 황실 금고와 동이성과의 밀무역 및 해외로의 일부 수출을 맡고 있어야 했다.
범한이 강남 황실 금고를 이미 접수했고 최씨 가문도 이미 무너졌으니 가장 먼저 충격을 받게 될 곳은 명씨 가문이었다. 이에 범한은 경도에서 떠나기 전에 충분히 조사를 했고 언빙운 공자와 밤샘 논의를 하며 방비책도 이미 세워 놓은 상태였다.
범한이 천천히 말을 해나가는 동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얌전히 듣고 있던 관무미는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자신이 모시는 공자님은 명씨 가문에서 쫓겨난 후 몇 년 동안 가문의 사업을 빼앗아 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의 진짜 신분은 가장 은밀한 정보였다. 강남 수채의 다른 두목들도 자기 주인의 정확한 신분은 모르고 있었으며 단순히 명문 호족의 후예라고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이에 명씨 가문에 속한 대부호 상인들은 하서비에게 깜빡 속아 넘어간 것도 모자라 강남 수채와 떳떳하지 못한 거래까지 하고 있었다.
관무미는 명칠 공자의 친척이었지만 명칠 공자 주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명칠 공자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관무미는 강남 수채의 대두목인 하서비의 진짜 정체를 다른 사람이 알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공자가 하서비의 진짜 신분을 줄줄 읊다니.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범한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겠군. 명씨 가문은 최씨 가문이 몰락해 가슴이 아프긴 하겠지. 그래도 최씨 가문의 지분을 넘겨받게 되어 실제로는 기분이 좋을 거야. 명칠 공자는 지금이 명씨 가문에 맞설 절호의 기회이니 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거고. 3월에 황실 금고에서 새롭게 입찰 참여 문서를 발행할 테니 강남 수채는 이참에 양지로 나오려 하겠지. 명칠 공자가 복수를 하려면 황실 금고의 거래 문서를 자신이 가져와야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때 필요한 게 돈이야. 어쩐지 그자가 허둥지둥한다 했더니만.”
관무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저 유약해 보이는 젊은이는 대체 어디서 떨어진 신선이지? 어떻게 저렇게나 많은 걸 알고 있을 수 있어? 황실 금고 일은 조정 기밀 사항이잖아. 그리고 잠깐 사이에 공자님의 진짜 생각까지 모두 간파해 버리고 말이야.’
그 순간 범한의 입가에 온화한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꽁꽁 얼어붙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명칠 공자의 계획은 너무 꼴불견이군. 은전 몇백 냥이 적은 돈도 아니고 말이야.”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으로 오기 전 감찰원에서 명칠 공자에 대해 조사를 한 터라 범한은 그에게 어느 정도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신분과 처지가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뛰어난 수법을 구사할 줄 아는 고수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