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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51화 (351/1,108)

351화

나루터 옆에 있는 창고에서 십여 명의 일꾼들이 빙 둘러서서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나루터가 아무리 한산해도 대낮에 한담을 나누는 건 제대로 된 나루터 일꾼에게서는 볼 수 없는 태도였다. 더군다나 사납고 악랄한 표정이라니.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가운데에는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 미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얼굴에서 강인한 면모가 보였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자 주변 장정들이 고분고분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두목인가 보다.

“제대로 조사했습니다. 차(茶)를 가지러 온 상인이고 경도에서 왔다고 합니다.”

“관 누님, 저들 배에는 호위 무사도 있었어요.”

한 일꾼이 일러 주었다.

관 누님으로 불리는 이는 영주 부근에서 유명한 산적 두목이었다. 영주에 나타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벌써 힘 있는 도적 두목들을 규합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소문에 의하면 그녀에게는 어마어마한 뒷배가 있다고 했다.

관 누님이란 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고작 상인들 아니냐. 뭘 그리 겁먹고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같이 가자고 했잖아. 그런데도 그 밀실에 있는 상자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일일이 말해 줘야 하는 거야?”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상자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일꾼들의 눈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산적은 마차 바퀴가 만들어 내는 먼지양으로 화물의 중량을 판단하고 가치를 따졌다. 마찬가지로 주로 수로에서 도적질하는 영주 부근의 산적들은 선박이 물에 얼마나 잠겨 있는지를 가지고 안에 있는 물건의 가치를 따졌다.

그런 이들에게 어제 갑자기 정박한 커다란 선박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해 보이는 데다 겉으로 보기에는 8할 정도는 새로 건조된 것처럼 보였다. 나루터에서 사람들은 목재로 된 선박 몸통에 낀 이끼를 가지고 배가 물에 얼마나 들어가 있었는지를 판단했다. 이에 산적들은 그 선박이 아주 오랫동안 물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요즘 영주에서는 이런 대형 선박을 거의 볼 수 없다 보니 산적들에게는 그야말로 통통하게 살찐 커다란 양 한 마리가 통째로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이에 선박에서 사람이 먹을거리와 물을 구하러 내려왔을 때 이들은 이미 배 내부 상황을 꼬치꼬치 캐물어 둔 상태였다.

산적들이 차를 가지러 왔다는 상인의 선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물에 잠겨 있는 선박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고작 차나 가지러 온 상인의 배라는데 선미 쪽에 왜 무거운 물건이 실려 있는 것인지. 의문에 대한 답은 밥을 지어 주러 선박 안으로 들여보낸 염탐꾼 식모를 통해 해결되었다.

염탐꾼이 알려온 정보에 따르면 선미 쪽에 경비가 삼엄한 밀실이 있었다. 갑판이 힘을 받아 휘어져 있는 상태이며, 자물쇠 위의 살짝 긁힌 흔적을 통해 그녀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바로 은자였다. 그것도 상자 가득 말이다.

“강남에 차를 가지러 왔다면서 은자를 그리 많이 가지고 다니는 자는 세상에 없지.”

사실 관 누님은 아직 확신이 선 상태는 아니었다. 한데 대두목께서 영주 부근 산적을 굴복시키려면 몇 개의 큰 거래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이들 땀내 나는 도적들에게 여기저기서 냄새를 맡고 다니도록 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공자께서 봄부터 하려는 일은 정말로 은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니 자신도 이렇게 사방팔방 바삐 다니며 선박을 강탈할 수밖에 없었다.

산적 하나도 무언가 수상쩍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배 바닥이 물에 많이 잠겼는데 안에 물건이 많이 없다면······ 배 밑바닥 선실에 돌을 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형수가 정확히 확인 못 한 것일 수도 있어요.”

관 누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선(海船)도 아니잖아. 그러니 밑바닥 선실에 돌을 넣어 배를 눌러 놓을 필요는 없어!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저 큰 배에 있는 상인이······ 왜 은전을, 그것도 현물로 많이 가지고 다니느냐 하는 거라고.”

“은전이 현물이면 좋지요!”

다른 산적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은표는 많아 봤자 뺏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의 말에 동료들도 동의했는지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대단히 만족감에 찬 웃음소리였다.

관 누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문제는······ 요즘 대체 어떤 상인이 은전을 현물로 가지고 다니느냐는 거지! 설마 누군가 훔치거나 뺐을 거라는 걱정은 안 하는 건가?”

산적들이 관 누님을 바라보았다.

‘이 두목은 악랄한 데다가 일 처리도 지독하게 해. 목표물을 고르는 안목도 정확하고. 지주가 없는 상황을 틈타 형제들을 데리고 가서 큰 건 몇 개를 해치우고 왔잖아. 그런데도······ 어떤 때는 너무 소심하단 말이지. 도둑을 걱정해야 하는 건 저 멍청한 차 상인이라고. 무엇 하러 형제들에게 묻는 거야?’

관 누님이 손을 흔들어 소리를 치며 염탐을 나갔던 셋째 형수를 불렀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비쩍 마른 셋째 형수가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염려 마세요! 호위 무사들은 십여 명 있던데 위쪽에 있어요. 바깥쪽에 어린 여종하고 어린아이가 하나씩 더 있었고요. 주인이란 작자는 바람만 불어도 픽 쓰러질 것처럼 생긴 젊은 놈이더라고요. 아주 곱상하게 생긴 게 은폐 같은 건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딱 보니까 경도에 사는 덜떨어진 부잣집 도련님 같더라니까요. 사람 만들라고 집안 어르신들이 강남으로 보냈나 봐요.”

여종을 데리고 있다니. 젊은 상인은 밤마다 찾아오는 적적함을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관 누님이 소리를 내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걱정했던 걸 내려놓았다. 저 차 상인이 정말로 생각이란 게 있는 자라면 여자를 데리고 큰 강을 지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정말로 모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종이로 된 은표보다는 반짝이는 은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더 선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십여 명의 호위 무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하로 둔 십여 명의 형제들은 모두 사람 몇 정도는 죽여 본 적 있는 무시무시한 비적이다. 그러니 형제들과 함께 선박에 오르면 저들 호위 무사들은 죽거나 강으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 사항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 곁에 있던 산적들이 서로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관 누님, 밤에 일을 다 치르고 나면······ 그 어린 계집종은 우리한테 상으로 넘기시죠!”

그러자 관 누님이 두 눈을 감았다 뜨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단 일부터 잘 끝내고 볼 것이지! 은자만 손에 넣으면 다른 건 어련히 알아서 따라올 것 아니냐.”

말을 마친 관 누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서늘하고 사악한 웃음소리였다.

“깔끔하게 처리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죽인다. 일이 끝나면 배는 이호 모래사장으로 가져가서 태워 버리고.”

* * *

밤이 찾아오자 영주성 밖은 고요했다. 강 맞은편으로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걸린 달빛은 세차게 흘러가는 강을 싸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포효하던 강물도 잠잠해진 것만 같았다. 나루터에는 배 몇 척이 쓸쓸하게 정박해 있었다. 이미 자시(子時: 밤 11시에서 새벽 1시)를 넘긴 시각. 사람들이 단잠에 빠져드는 때로 배를 밝히고 있던 등불도 일찌감치 꺼지고 상인들도 이미 잠들었을 무렵이었다.

달빛이 땅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가운데, 십여 명의 검은 그림자가 강기슭을 더듬고 내려와 강물로 입수했다. 그들은 제일 큰 선박 뒤쪽으로 헤엄쳐 가더니 몸을 더듬어 물건 하나를 꺼냈다. 일부는 배에서 늘어뜨려져 있는 줄을 맨손으로 타고 올라갔다. 흡사 물에 홀딱 젖은 원숭이가 날렵하게 줄을 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잠깐 사이, 야간 습격에 나선 산적들은 어느새 배에 올라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관 누님은 한도(寒刀)를 입에 물고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선박 내부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엄호 속에서 선채를 더듬으며 뒤쪽으로 향했다. 나루터 창고에서 이미 충분히 정보를 교류한지라 그녀는 선박 내부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고 은전이 가득 든 상자가 선미 어느 선창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관 누님 뒤쪽 어둠 속에서 들릴 듯 말 듯 푸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누군가가 갑판에서 넘어지는 소리가 나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놈의 부하 새끼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거야! 호위 무사가 놀라 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두렵다기보다는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이 성가셔서 한 말이었다.

밀실 밖에 도착했는데 이상하게도 호위 무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선박 안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그런데 부하들이 선박 안으로 침투 중인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관 누님이 문을 손가락으로 잡은 후 그 틈에 칼끝을 넣어 힘을 주자 밀실 문은 가볍게 열렸다. 어둠 속을 더듬던 그녀가 잠시 후 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관 누님은 선창을 통해 어슴푸레 들어오는 빛으로 상자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셋째 형수는 상자의 크기와 중량을 말하면서 수천 냥의 은전은 있을 것 같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관 누님은 상자를 더듬으며 크기를 가늠해 보다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세상에나! 여기에 은전이 대체 얼마나 들었기에 이렇게나 큰 상자에 담은 거지?’

갑자기 뒷북치듯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은전을 이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다면 부유층 자제 중에서도 경도 제일 부자일 터. 그러니 은전을 도둑맞은 사실이 새어 나간다면 경도 쪽에서도 화를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 뒷배로 계신 공자님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배에 있는 부잣집 도령은 죽이지 말아야겠군!’

관 누님은 퍼뜩 이 생각부터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생각이 들자 어느새 또 머뭇거렸다. 더군다나 이 정도로 많은 은전이라면 정말이지 너무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녀는 지니고 있던 공구를 조심스레 찾아 꺼냈다. 한참을 조몰락거리자 상자가 열렸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밀실 선창 내부에 은빛이 일렁였다.

* * *

관 누님은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앞에 놓인 상자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칼날이 오가는 삶을 살아 그런지 항상 핏빛으로 물든 은전만 보아 온 터였다. 그러다가 오늘 밤 상자 안에 가지런하게 담겨 빛을 뿜고 있는 중간 크기의 은전을 보자 그녀는 그것들에게 마음을 사로잡혀 버렸다. 싸늘하기만 했던 두 눈에서는 어느새 탐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관 누님은 즉각 그런 자신을 경계했다.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은전이 아무리 반짝여도 이렇게나 유혹하는 빛을 낼 리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렸을 때다. 순간 우중충한 얼굴을 한 중년의 누군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중년의 사람은 한 손에는 백광등을, 다른 한 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장검을 들고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위 고달이었다. 고달은 일찌감치 범한의 분부를 받은 터였다. 그는 일단 관 누님에게 은전을 구경할 시간을 충분히 준 후 천천히 칼을 휘둘렀다.

관 누님도 칼을 들어 맞섰다.

고달 입장에서는 굼뜬 동작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막을 수 없는 홍수와도 같았다. 큰 강에서 활동하는 여도적은 순식간에 심리적, 물리적 방어막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 끔찍하게도 자신의 왼손이 잘려 나가는 걸 똑똑히 지켜봐야만 했다. 손이 잘려 나간 자리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그녀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 * *

배의 중간 선창에 불이 밝았다. 밀실 밖으로 끌려 나온 관 누님은 산발이 된 머리만큼 마음도 심란한 상태였다.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선박 위로 올라온 산적들은 일찌감치 기절해 무장이 해제된 상태였다. 그리고 온몸이 꽁꽁 묶인 채 가지런하게 갑판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숙직을 서고 있던 6처 검수 몇몇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사방에서 각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관 누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팔걸이 나무 의자에 권태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급하고 고민에 찬 듯 보이는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배에 대체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 거지?’

이 정도 실력의 고수들을 호위 무사로 두다니. 그것도 도법(刀法)의 대가를 말이지.

그녀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것이었다. 셋째 형수가 말한 부잣집 도련님은 평범한 차 상인이 아니었다.

“관무미?”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사람이 그녀의 손이 잘려 나간 부위를 쓱 쳐다보았다. 여도적은 아직 살기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는 하품을 하며 매우 흥미롭다는 투로 물어 왔다.

이 젊은 청년은 당연히 범한이었다. 그가 영주에 정박한 이유는 홍죽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좀도둑이 든 것이었다. 한데 범한은 그 여인을 보는 순간 감찰원 사건 중 수배범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도적의 초상화를 단번에 기억해 내고는 저도 모르게 흥미가 일었다.

‘강남에서의 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아직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게 제 발로 찾아와 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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