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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50화 (350/1,108)

350화

완아가 멀어진 서생들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상공이 알린 거예요?”

범한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들의 아름다운 소망을 이뤄 주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가 고개를 돌려 여종들 뒤에 숨어서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움츠러든 모습을 보니 순간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솟아 범한은 배웅하는 여종들을 밀치며 약약의 앞으로 걸어가 소리쳤다.

“울긴 왜 울어!”

오라버니가 직접 자신의 앞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범약약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더듬더듬 말했다.

“무슨······ 내가······ 언제 울었어?”

둘러대던 범약약이 순간 생각했다.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화낸 적 없던 오라버니가 오늘은 어째서 화를 내는 거지? 친오라버니가 아니라고 이전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는 건가.’

원래 국화처럼 여린 마음을 가진 범약약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자 서글픔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범한은 그런 누이의 모습을 보니 너무 화가 나서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머리끝까지 화난 그가 이를 갈며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종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물러났다. 종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범한과 범약약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때 다행히 완아가 다가와 약약을 끌어안고는 뭐라 속삭였다. 이어서 경도를 떠나는 범한이 마음이 좋지 않아 화를 낸 거라고 타이르자 범약약도 비로소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범한이 오늘 버럭 화를 낸 것은 지난 십여 일 동안 누이가 계속 상심에 겨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려 하지 않자 결국 화가 터진 것이었다. 약간은 무서워하는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이의 모습에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한테 화를 내는 건 당연한 거야. 나는 네 오라버니고 너는 내 누이이지 않니. 그러니 오히려 내가 화를 내지 않는 걸 슬퍼해야지.”

총명함을 타고난 범약약은 한 번에 범한의 말을 알아들었다. 만약 범한이 자신을 친누이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화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범한의 진심을 안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 그럼······ 멀리 떠나는 오라버니를 보고 누이가 슬퍼하는 것도 당연한 건데 왜 화를 내고 그래?”

“하하하하.”

마음이 풀린 누이가 말문을 열자 범한은 안심되는 마음에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 시간이 없어요!”

부둣가에 세워진 배 위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던 사사가 조급함에 소리쳤다. 범한은 강남으로 가면서 가장 가까운 종들을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사사는 담주에서부터 함께 살았으므로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담주에 있었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밝고 활기차 보였다.

소리치는 사사를 본 완아가 피식 웃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상공이 너무 잘해 주니까 버릇이 없잖아요.”

범한이 웃으며 누이의 귓가에 대고 곧 경도에 중요한 일이 생길 거라 당부한 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완아를 꽉 끌어안고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 그러고는 마침내 소매를 휘두르며 정박한 배에 올랐다.

그는 소매를 휘두르며 모든 은전을 가지고 갔다.

* * *

오늘 작은 범 대인이 경도를 떠난 일은 이미 경도 사람들의 대화 소재가 되어 있었다. 술집이나 찻집뿐만 아니라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저택에서까지 이 일을 가지고 의견을 나눴다.

저택에 연금된 2 황자는 모사의 보고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결국 갔군.”

모사가 이를 갈며 분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떠나지 않았다면 그놈의 낯짝을 벗겨 저하의 원한을 씻어 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의자에 앉은 2 황자가 국을 떠먹다가 그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자조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나와 범 제사가 닮았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내가 그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건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나더니 바깥 자유로운 하늘을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놈이 마침내 갔다고 하니 기분이 좋군. 마치 누가 내 등 뒤에 있던 독사를 치워 준 것처럼 홀가분해.”

경도에서 3백 리 떨어진 곳에서 휘황찬란한 대열이 길게 늘어서서는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로 신양 이궁에서 생활하다가 경도로 돌아가는 여자의 행렬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위가 경도를 떠나는 바람에 자신이 호의를 표시하고 협상을 나눌 대상이 사라졌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한편 외삼리에 위치한 장엄한 경묘에는 장작을 높이 쌓고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불길이 워낙에 거세서 안에서 화르르화르르 타오르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황제가 뒷짐을 지고 차가운 눈으로 불길을 안에서 점차 검은 연기로 변하는 육체를 바라봤다. 그의 뒤에서 고행자의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경국 대제사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불길을 바라봤다.

경묘 밖에서 어린 내관 홍죽은 시위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내일 황후궁 수령 태감으로 발령되는 만큼 오늘이 폐하를 모시는 마지막 날이었다.

며칠 뒤 위하강에서 범한이 서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납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도 그가 입은 귀한 가죽옷을 뚫지는 못했다.

경도를 벗어났음에도 그는 끊임없이 계속 보고를 받고 있었다. 장 공주는 수많은 전초를 경도로 보낸 데 이어 임완아에게 준다는 핑계로 신양의 특산품들을 사남가에 보냈다. 아무래도 장모는 금전적 손실을 보고 암살까지 실패하자 결국 범한의 힘을 인정하고 모녀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건 진평평이 말한 천하를 바라보는 시선 안에 들 수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범한이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건 여러 해 만에 귀국한 경국 대제사가 남쪽에서 고행하느라 정력을 소진해 몸이 쇠약해져 사망했다는 소식과 홍죽이 황후궁 수령 태감으로 발령 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이 소식이 약간은 실망스러우면서 또 약간은 기쁘기도 했다.

그의 제자 사천립이 손으로 매서운 강바람을 가리며 옆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배의 상교가 말하기를 지금과 같은 속도면 내일 영주를 지날 수 있고 거기서 며칠 더 가면 강남 경계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 합니다.”

강남으로 함께 가는 일행은 경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감찰원의 비밀 함선으로 갈아탔었다. 그들이 지금 타고 있는 배는 사실 민간 선박처럼 위장한 수군 함선이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그림처럼 펼쳐진 산과 호수 풍경을 바라보던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사천립, 지금 강남 미녀들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 없네.”

순간 사천립이 정색했다. 포월루 장사가 강남에까지 전해져서 이번에 같이 가게 된 상문은 석 달 뒤로 떠나는 날짜가 미뤄졌지만 범한의 제자인 사천립은 미룰 수 없었다. 그는 과거 동복객잔에 있었던 친구들과 동기들은 지금 강남 관리가 되었는데 자신은 유명한 기생집 사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강물을 얼릴 정도로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니 순간 화가 나면서 그는 운 좋게 진 원장 옆에 머무르게 된 상문이 부러워졌다.

한편 여기 운이 없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엄명에 봄꽃이 피지도 않은 추운 겨울에 황궁을 나와야 했다. 3 황자가 두꺼운 장막을 걷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사업 대인, 밥 드세요.”

범한이 황자를 교육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태학사업인 만큼 3 황자는 그를 사업 대인이라 불러야 했다.

고개를 돌린 범한이 여덟아홉 살 된 남자아이를 향해 무서운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저하, 숙제는 다 하셨습니까?”

영주는 큰 강 북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수많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물자가 풍부한 강남으로, 서북쪽으로 향하면 경국의 중추인 경도로 갈 수 있었다. 즉 경국에서 가장 번화한 두 지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 지역은 위하강과 큰 강이 만나는 지역이기도 했다. 비록 높고 험준한 산에 휩싸여 있어 교통이 불편했지만, 다행히 운하가 연결되어 있어 교통의 중추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리적 배경만 놓고 따져 본다면 영주는 상단이 운집해 번화하고 민생이 안정된 곳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의 영주는 몰락한 지역이었다. 이는 풍물이 쇠락하고 가옥이 낡아 쓰러질 듯 보여서라기보다는 거리에서 풍기는 느낌이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행인들의 표정이 시무룩하고 생기가 없었다. 거리에서 과일, 구운 떡 등을 파는 노점상에서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찬 바람만 쌩쌩 불고 있었다.

성 밖에 위치한 나루터도 그다지 활기차지 않았다. 경국 뱃길을 따라 오가는 선박 대부분이 이곳이 아닌 아래쪽 나루에서 정박해서였다. 그러니 겨우 배 몇 척이 드문드문 있는 가운데 새로 건조한 것 같은 대형 선박이 떡하니 정박하자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영주 지역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첫째 날씨 때문이었다. 작년에 큰 강에서 홍수가 나 상류에 있는 제방이 무너져 물이 벌판까지 덮쳐 버렸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가옥이 침수되고 파손되었다. 다행히 수재가 있고 난 후 바로 날이 서늘해져 역병까지 돌지는 않았지만 영주는 전체적으로 치명상을 입은 탓에 침체의 늪에 빠져 버렸다.

둘째는 관리 때문이었다. 영주의 지주는 과거 천자의 제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자로부터 총애를 받는다거나 하는 복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에 그는 영주성에 있는 동안 권력을 남용하고 웃전에 아첨하고 상인과 백성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데에만 몰두했다. 수로 보수와 정비, 일반적인 치안 유지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세금만 과하고 잡다하게 징수할 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영주 지주가 강과 마주한 산악 지대의 산적과 한통속이란 소문도 꾸준히 떠돌았다. 이런 자가 지역의 관리로 있었으니 민생은 자연히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상인과 여행객들도 마음 편히 돌아다니지를 못했고, 규모가 큰 제대로 된 상단은 산적의 공격을 받으면 제때 피할 수가 없어 그 누구도 굳이 지역에서 머물려 하지 않았다.

셋째는 도적 때문이었다. 영주 백성들은 용맹하고 사나운 기풍을 지녀 예로부터 괭이를 들고 관에 맞서는 걸 영광스러운 전통으로 여겼다. 그러니 탐관오리 때문에 빈곤해진 백성들이 산이며 강으로 들어가 도적 떼에 합류하는 게 자연스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올해 들어 영주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우선 지주(知州)가 이곳에 주둔한 감찰원 4처 순찰사에게 차 대접을 받으러 간 일이었다. 백성들은 ‘드디어 지주가 무너지는구나!’ 하며 은근히 기뻐했다. 하지만 감찰원은 지주를 곱게 그것도 공손하게 돌려보냈다. 영주 지역민은 ‘영주가 이렇게 무너져내리는구나!’라고 실망했다. 한데 그때 지주가 급작스레 사망해 버렸다.

경도에서는 직접 사람을 내려보내 오랫동안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지주는 음모 때문이 아닌 병사로 확인되었다.

지주가 죽은 날, 영주성 백성들은 침묵 속에서 환희의 폭죽을 수없이 터뜨렸다. 그 누구도 악귀가 죽어 경축하는 거라 감히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 지역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날 영주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집을 비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음으로는 강 맞은편 산에 있는 산적들이 많이 온순해진 일이었다. 누군가가 제일 큰 산채에 쳐들어가 하룻밤 사이에 산적들을 학살하고 사분오열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소문에 의하면 강남 쪽에서 온 강호의 유명 인물이 산적들을 굴복시켜 나가는 중이라 했다.

그런데 영주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기쁨을 더 즐기지 않고 일찌감치 거두어 버렸다.

악덕했던 지주는 죽었지만 내년에 조정에서는 다른 지주를 내려보낼 것이고, 현 산적 세력이 무너졌다 할지라도 다른 거대한 세력의 산적 떼가 도로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나아진 게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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