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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49화 (349/1,108)

349화

한편 약약의 경우 오라버니가 갑자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얼굴로 오라버니를 봐야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계속 범한을 피하고 다녔다. 심지어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약약은 비개 수업에서도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태의원에서도 병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약약이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래요.”

완아가 안심하라는 표정으로 말하자 범한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오라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아요? 바뀐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잠깐 정신을 가다듬은 뒤 이어 말했다.

“내가 강남으로 내려간 뒤 그곳 상황이 안정되면 약약이와 함께 오라고 부를게요. 아마 곧 경도를 떠날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임완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강남은 물이 좋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림처럼 생겼다고 들었어요. 한 번도 외지에 나가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즐겁게 놀아 보겠네요.”

범한이 피식 웃었다.

“설마 지금 잘생긴 남자들 볼 생각에 들뜬 거예요?”

기쁜 마음에 싱글싱글 웃던 임완아의 통통하고 부드러운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짓궂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째려보며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자 범한이 하하 웃으며 그녀의 작은 주먹을 막더니 순간 정색했다.

“장모님이 경도에 돌아오시면 뵈러 가요.”

만감이 교차한 임완아가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서로 호응할 수 없는 상황일 때는 각각의 상황에 알맞게 처신하는 방법도 배워야 해요.”

이 일은 위로하거나 회유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범한도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완아는 그가 황실 금고 일에 고민하는 걸 알기에 씩씩하게 말했다.

“저는 상공이 경여당 대행수들을 모두 데려가서도 빨리 황실 금고를 장악하지 못할까 봐 걱정될 뿐이에요. 강남 고관들은 오랜 시간 운영해 오신 어머니의 체면을 생각해서 쉽사리 움직이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진지하게 말했다.

“게다가 상공이 섭가 사람들을 강남에 데리고 가는 것에 대해서 민가와 조정에서 말이 나올 거예요.”

범한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동안 왕공가들을 위해 장사를 해온 대행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를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황실 금고 일은 그들 없이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조정에서 그동안 그들을 감시해 왔던 것도 황실 금고 상품 제조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건 조정에 매우 중요한 정보인 만큼 그들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북제나 동이성에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있었던 거죠. 다만 황실 금고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면 기술 지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해요.”

임완아가 가만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행수들이 경도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아니에요. 그동안 계속 옆에서 미행하며 감시한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들은 비밀을 누설하려는 조짐만 보인다면 미행하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두 죽여 입을 막으려 할 거예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도무지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감찰원에도 외곽 경계만 책임지는 사람은 있어도 비밀 보장을 위해 죽이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없었어요.”

“그건 황궁 사람이 맡고 있어요.”

임완아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아마 그들은 상공이 강남에 갈 때도 따라갈 거예요.”

“내관들의 부하가 이 일을 맡았다고요?”

범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경도에 온 뒤로 그는 황궁 내관들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누가 어느 궁에서 일하고 어디로 파견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 일은 걱정할 것 없이요.”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황실 금고 일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을 뿐이지 대세는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니 그 돌대가리 오라버니도 어쩔 기회는 없을 거예요. 황자들의 싸움이 최소한 몇 년 동안은 다시 수면에 드러나지 않는 게 폐하가 가장 좋아하실 부분인 것 같아요. 물론 폐하는 직접 마음을 밝히지 않으시겠지만.”

완아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남편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요. 폐하께서 황자들이 시끄럽게 싸우는 걸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2 황자 오라버니가 지금은 집에 연금된 상태지만 상황이 바뀌면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잖아요.”

범한이 흠칫하며 아내의 말을 곰곰이 분석했다.

“황상은 특별하신 분이에요.”

완아의 크게 뜬 두 눈에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지혜와 교활함이 엿보였다.

“갖은 고생을 한 끝에 군주가 되셨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자신의 지위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황자들이 용상을 두고 싸우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죠. 황상이 황자들이 싸우는 걸 싫어하시는 건 아버지로서 자신의 혈육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 원치 않으셔서 그런 것뿐이에요. 제가 봤을 때 황상께서는 황태자 오라버니를 걱정하고 계시지도 않아요. 훗날 누구에게 용상을 물려줄지, 몇 년 뒤 황자들 중 누가 두각을 드러낼지에 관한 일들도 황상은 신경 쓰지 않으세요.”

임완아가 잠시 쉬다가 계속 설명했다.

“외삼촌은 건강하시고 나이도 많지 않으시기 때문에 자신이 앞으로 오래 더 살 거라 생각하세요. 그러니 황위를 물려주는 일을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거죠. 사실 외삼촌 마음속에는 천하에 대한 웅장한 포부만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폐하께서 전쟁을 준비하고 계세요?”

“정확하지 않아요.”

전쟁과 같은 일을 좋아하지 않는 임완아가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실 십여 년 동안 조용한 게 이상해요. 서쪽 오랑캐인 서호도 동쪽으로 침범하지 않고 남쪽 오랑캐 남월도 조용하잖아요. 만약 황실 금고 일이 수습되어 강남 민생이 안정되고 국고가 풍족해진다면 폐하께서 다시 군대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전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에 달렸죠. 만약 작년과 같이 작은 충돌로 끝난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임완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황상과 추밀원이 걱정할 일이죠. 저는 강남에 나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설사 감찰원에서 전쟁에 참여한다고 해도 3처에서 할 거잖아요.”

범한은 웃었다. 경국 황제가 정말로 제2 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면 자신도 모략을 짜는 일은 아니더라도 힘을 쓰는 일에는 불려가게 될 거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 대역무도한 일이라는 걸 모르는 임완아는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생각을 털어놨다.

“황태자 오라버니가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이긴 하지만 상공도 알다시피 폐하께서 황후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러니 이 일은 변수가 있어요. 1 황자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여덟 살밖에 안 된 3 황자까지 모두에게 기회가 있는 셈이죠. 조정이나 민가 모두 상공이 이번에 강남에 가는 게 유배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지만 폐하께서 3 황자를 데리고 가게 하시는 게······ 좀 이상해요. 상공은 그런 생각 안 들어요?”

범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자신이 곧 경도를 떠나서 완아의 마음이 심란하다는 걸 알기에 마음껏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황태후께서는 황태자와 2 황자 오라버니를 아무 차별 없이 좋아하시고 가장 싫어하는 건 1 황자 오라버니, 3 황자는 그다음으로 싫어하시죠.”

임완아가 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황궁 안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황후께서는 실권은 없지만 어머니와는 관계가 좋으세요.”

범한이 진지하게 경국 후궁의 정치를 듣다가 끼어들어 물었다.

“3 황자는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임완아가 창밖을 힐끗 보고는 잠시 주저하다 대답했다.

“그거야 아버지와 관계 때문이겠죠. 황태후께서도 의 귀빈이 범씨 집안과 사이가 가깝다는 걸 아시니까요.”

“완아, 당신은 내가 이번에 강남에 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범한이 진지하게 묻자 완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스승처럼 3 황자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거리를 유지하세요. 그래야 황태후께서 상공이 3 황자에게 해서는 안 될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고 의심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건 조사도 미루지 말고 빨리 추진하시고요. 시간이 늦춰질수록······ 어머니가 2 황자 오라버니와 도찰원을 통해 무슨 짓을 할 확률도 높아지잖아요.”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른 임완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마 모든 사람이 어머니가 동궁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게 2 황자 오라버니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상공은 반드시 이에 대해 대비해야 해요. 어쨌든 황태자 오라버니는 언젠가는 어머니 쪽으로 기울 테니까요.”

범한은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어쩌다가 이런 가련한 상황에 놓이게 됐을까 생각했다. 그는 과거 원한 때문에라도 동궁이 자신의 성장을 두고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장 공주가 황태자와 2 황자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을 정도로 술수를 잘 부리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꾀 많은 장모를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 *

초하룻날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보냈다.

초이튿날에는 경도 관리들이 찾아와 새해 인사를 하며 보냈다.

초사흗날에는 집안사람 모두 정왕가 연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범한은 세자 이홍성과 어색한 만남을 가져야 했다.

초나흗날에는 임소안과 신기물이 합동으로 연회를 열어 범한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초닷샛날에는 언씨 부자가 범씨 저택에 찾아왔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바둑에 취미를 두게 된 언약해는 어두워질 때까지 상서 대인과 실력을 겨루었고, 범한과 언빙운은 작은 서재에 안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밀담을 나누었다.

초엿샛날에는 진원을 방문했다.

초이렛날에 범한은 아내, 누이, 유가 군주, 섭령아 이렇게 네 명의 여자들과 함께 경도를 쏘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초여드렛날에는 정오에 국공가의 초대와 저녁 무렵 범씨 대호족의 모임에서 범한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 * *

정월 대보름날을 보낸 범한은 일행들과 함께 경도 남쪽 부두에 도착했다. 이 강의 이름은 위하강이었다. 중간에 유정강과 만나는 위하강은 남쪽으로 수백 리 흘러 큰 강과 합류했다. 그리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도보다 더 번화한 강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폐하와 상의한 대로 범한은 대외적으로는 담주로 돌아가 할머니를 만나 뵌다는 핑계를 댄 뒤 강남으로 향했다. 그가 최소한 3개월이 되어야 소주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일찍 도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범한은 가족을 제외한 친분이 있는 감찰원 관리나 조정 관리들을 포함한 누구의 배웅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경도를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이 소식을 들은 태학 학생들이 부두까지 달려왔다.

범한이 태학에서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부터 친밀한 관계였다. 작년 춘시 때 대량의 은전을 동원해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춘시 부정 사건도 밝혀 실력 있는 인재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주고 장묵한 대가에게 증서를 받은 일까지 더해져 범한은 서생들의 마음속에 지고지상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또 범한은 감찰원 제사가 된 뒤에는 뇌물 사건을 처리해 1처의 기풍을 바로잡음으로써 자신은 감찰원의 비리에 물들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이후 알려진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소문도 상당히 기이한 부분이 있었다. 원래 서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품이 고결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집안이 얼마나 좋은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걸출한 인재라 인정한 작은 범 대인이 휘황찬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자 서생들은 위화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작은 범 대인이 감찰원 관리면 어떠하고 상인이면 어떠한가. 우리 서생들이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황자이신데.’

부두에서 교사와 태학 학생들이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부두에서 종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범한이 술 석 잔을 마셔 마중 나온 사람들과 정을 나누었다. 그 광경이 복잡스럽고 시끌벅적해서 아마도 얼마 후면 조정에도 알려질 게 분명했다.

가까스로 사람들을 돌려보낸 범한이 완아의 두 손을 가볍게 잡고는 자세하게 여러 당부를 남겼다. 마지막으로 그가 날이 따뜻해지는 봄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하자 비로소 완아는 눈물을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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