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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47화 (347/1,108)

347화

마차가 감찰원 입구에서 멈추자 범한은 안으로 걸어가며 만나는 관리들에게 은은한 미소로 인사했다. ‘소문 사건’ 후로 처음 감찰원에 찾아오는 터라 관리들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사실 하부 관리 중 대부분은 섭경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한동안 돈 냄새가 물씬 나는 천하 남자들을 업신여긴 여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족처럼 익숙함이나 친밀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진평평은 고의인 듯 아닌 듯 8처 수장들과 종추 같은 나이 든 관리들이 부하들에게 섭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당시 섭가가 어떤 상가였는지 그리고 섭가가 감찰원을 위해 무얼 했는지 자세히 말해 줬다. 이런 말은 갈수록 발전을 거듭해서 마지막에는 섭가가 없었다면 감찰원도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반을 저질렀다는 죄명으로 사라진 섭가를 상사들이 대놓고 찬양하는 모습에 감찰원 관리들은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조정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자 점차 범 제사의 출생의 비밀에 흥미가 생겼다. 이에 모두 당시의 이야기에 궁금해하며 알아 가기 시작했다.

여러 번 세뇌된 감찰원 관리들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섭가가 친밀감을 넘어 가족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던 중 감찰원 입구에 서 있는 비석 주인공의 친아들인 범 제사를 오늘 보게 되자 모두 이전에 가졌던 존경심 이외에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경외심과 친숙함을 느꼈다. 진 원장이 모든 힘을 동원해 서생같이 생긴 공자에게 감찰원을 넘기려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로써 경국 사람들은 관리건 백성이건 할 것 없이 범한이 감찰원을 넘겨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범한이 지금까지 감찰원에서 조금씩 자신의 실력과 지혜를 드러내 보인 데다가 당당히 드러낼 수는 없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섭가의 후손이란 신분 때문이다. 이러한 신분은 최소한 내부의 의구심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그가 감찰원의 전권을 손에 쥐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범한은 오늘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해 감찰원 관리들을 굴복시킬 시간이 없었기에 재빨리 정방형 건물을 돌아 정원으로 갔다. 눈이 듬성듬성 남아 있는 정원은 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나무들을 발가벗은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고 거울처럼 투명하게 얼어붙은 연못 안에는 이미 얼어 죽은 건지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았다.

진평평은 두꺼운 털가죽을 두르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서 구슬프면서도 강약이 느껴지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두 눈을 살짝 감고 오른손으로 가볍게 바퀴 달린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게 상당히 편해 보였다.

그 모습은 범한에게 어느 세계를 연상시켰다. 어느 나이 든 남자도 오래된 등나무 의자에 앉아 골목에 비치는 오후 햇살을 즐기며 낡은 축음기에서 들리는 올드 상하이 음반을 듣기를 좋아했었다.

‘야오리(姚莉)나 바이홍(白虹)의 늘어지면서도 탄력 있는 노랫소리도 이렇게 햇살과 뒤엉켰었지.’

하지만 문제는 진평평이 중국 유명 작곡가인 리진광(黎錦光)이 아니며, 그가 듣고 있는 건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아니었으며, 신분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높다는 데 있었다.

범한은 진평평처럼 봉건 시대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동정 어린 눈빛으로 겨울날에 고목 아래 서서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상문 낭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얼굴은 약간 발갛게 얼어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노래를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 놀라운 노래 솜씨였다.

“자칫하다가는 목이 상하겠군.”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노래를 멈추게 하고는 웃으며 진평평을 바라봤다.

“제가 상문 낭자를 감찰원에 들인 것은 이 뛰어난 재능에 도움을 받고 싶어서지 원장 대인 앞에서 노래나 부르게 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두 눈을 뜬 진평평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해야 하지만 상문 낭자가 내 마음도 즐겁게 해줘 2년 정도 더 살게 해준다면 네 곁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다.”

진평평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범한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예상대로 진평평도 자신의 몸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당장 가야 합니다.”

그가 진평평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건조한 손등을 살짝 쳤다.

“상문 낭자는 저와 함께 갈 겁니다. 강남에도 포월루를 열 생각이니까요.”

진평평이 한숨을 쉬었다.

“봄에 다시 데리고 가는 것도 좋겠군. 3 황자 저하와 함께 가면 서로 죽이 잘 맞을 테니까.”

순간 3 황자가 저지른 일이 떠오르면서 범한은 화가 치솟았다.

상문이 공손히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절을 한 뒤 감찰원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두 사람이 대화할 수 있도록 소문무와 함께 자리를 비켜 줬다.

멀리서는 진평평과 범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진평평과 눈을 맞춘 범한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진평평은 줄곧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웃으며 그런 범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가자.”

범한이 소문무에게 말하고는 옆에 있는 상문을 바라봤다. 상문은 그가 포월루에서 구해 준 뒤 직접 감찰원에 넣은 사람이므로 믿을 만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상문은 매일 진평평 앞에서 노래를 불러 주고 있었다.

“상문 낭자는 그동안 잘 지냈는가?”

그 질문이 기쁜지 상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매일 아무 일 없이 원장 대인께 노래를 불러 드리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랬군.”

범한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원장 대인의 뜻에 따라 나와 함께 강남에 가서······.”

그가 말꼬리를 늘이며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했다.

“자네는 그냥 남아서 원장 대인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시게.”

* * *

감찰원 입구에 서 있는 마차가 28리 언덕 방향으로 갈 준비를 했다. 황제가 범한에게 경도를 떠나라고 정해 준 기간이 다가왔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 범한을 조급하게 했다. 경도를 떠나기 전해 처리해 둬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기에 오늘 그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바빴다.

범한이 자신을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이들을 믿지 못하는 탓에 고달 등 호위 세 명은 여전히 마차 밖에 있었다. 범한이 약간 기다리는 틈을 타서 소문무가 발갛게 언 손을 비비며 작은 목소리로 살며시 말했다.

“3처에서 궁문 문서를 조사하는데 요 내관이 경도 외곽으로 나가는 바람에 이 일은 비밀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황실에서도 감찰원 기록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요 태감은 뭣 때문에 그곳에 간 것인가?”

범한이 호기심에 물었다. 그러자 소문무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표시를 하며 설명했다.

“지난번 현공 사당 검수 사건에 연루된 어린 내관이 경도 외각에 위치한 마을에 양부모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 태감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시위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하다 한숨을 쉬었다.

“암살에 대한 뒷일을 어린 내관은 고려하지도 않았겠지. 자신이 목적을 달성하든 말든 마을에 사는 친척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거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문무가 제사 대인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상을 암살하려는 것은 모반에 해당하는 대죄인 만큼 궁중에서는 이미 연루 범위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루되지 않은 어린 내관의 9촌은 관대한 조치를 받은 셈이었다.

“대인은 인자하신 분이니 이런 일에 마음을 쓰시는 거겠지만 몇십 명 죽는 것뿐입니다.”

범한은 마음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불편해하는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그저 그 어린 내관이 복수를 위해서 양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괘씸한 거네.”

소문무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대역무도한 말을 하자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러니 그 어린 내관은 찢어 죽이는 게 마땅하지만 그가 한 선택은 이해가 됩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경국 황제는 효를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고 경국 법률은 친척끼리 잘못을 감춰 주는 일에 대해 무죄를 판결할 수 있었다. 그의 양미간에서 순간 진절머리 난다는 기색이 보였다.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어린 내관이 친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양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지로 내몰았다는 점과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너무나도 거지 같은 논리라고 생각했다.

* * *

28리 언덕에 도착하자 마차는 긴 거리로 들어섰다. 길가에 광칠을 한 상점 문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마치 범한이 온 걸 환영하는 것 같았다. 마차가 경여당 앞에 도착하고 소문무가 아직 방문 명함을 꺼내기도 전에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오랫동안 열린 적 없던 거대한 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늘 경여당 열일곱 명의 대행수들은 자신의 집에 있거나 왕공가에서 장부를 계산하지 않고 모두 나란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범 제사가 마차에서 내리자 대행수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범한이 급히 대행수들에게 일어나라고 청하고는 낯이 익은 일곱째 섭 대행수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앞은 대화를 나누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지만 그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대행수들은 범 제사가 대낮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조용히 안으로 안내한 뒤 부하에게 따라온 일행들을 대접해 주라고 지시했다. 다만 고달을 비롯한 세 명의 호위들을 연신 고개를 저으며 폐하의 엄명에 따라 범한의 곁에서 절대 떨어질 수 없다고 버텼다.

눈짓으로 대행수들에게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거실로 들어간 범한이 호위에게 문밖을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외부인 없는 거실에서 열일곱 명의 대행수들은 두려움과 감동이 교차하면서 약간은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소문대로라면 내 눈앞에 있는 젊은 관리가 바로 섭가의 후손인 거잖아. 아가씨의 친아들인 거야! 세상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범 제사가 오늘 아주 중요한 일로 찾아온 게 분명해.’

다만 지금 상석에 앉아 있는 범한이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이상 대행수들이 먼저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부짖을 수는 없었다.

모두 범한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범한도 오래 침묵하지 않고 잠깐 뜸을 들이다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오늘 찾아온 것은 1년 반 전에 이야기했던 일을 위해서입니다.”

범한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나오자 대행수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범한이 그런 대행수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제가 아우인 사철이를 제사로 받아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대행수들께서 일이 바빠 허락해 주시기를 기다리다가 아우가 결국 일을 치르게 되었지요. 지금 제 보잘것없는 아우가 어디를 떠돌아다니는지 모르니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 제가 말했던 다른 일에 대해서도 아무 의견도 내지 않으실 거면 그냥 잊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잊으란 거지?’

그날 범한은 은연중에 자신이 훗날 황실 금고를 운영하게 되면 경여당의 도움이 필요하니 경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었다. 범한의 제안은 경여당 대행수들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경도를 떠나 아가씨가 남긴 사업을 다시 하는 건 대행수들이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다만 황제의 위엄이 무서운 데다가 범한에게 황실을 설득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아 주저했다. 더구나 가장 중요한 범한의 목표가 무엇이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에 그들은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상황이 이렇게 기묘하게 변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범한은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성장해 경국에서 가장 유망한 젊은 권신이 되어 있었고 그가 황실 금고를 받는 일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문에 따르면 그는 아가씨의 아들이었다.

마른기침을 하는 섭 대행수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대인, 저희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만······ 황실에서 허락해 주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더는 범한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능력은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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