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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46화 (346/1,108)

346화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어린 내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흥, 짐 옆에 있으면 뭐가 좋은 점이 있다고 그러는가?”

좋은 점을 잘 대답하면 가벼운 농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홍죽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니 눈물 젖은 얼굴에 얼룩덜룩 먼지가 묻어 있었다.

“황상을 옆에서 모시면······ 노비의······ 체면이 섭니다.”

“체면이 선다고?”

홍죽이 마늘 찧는 것처럼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울먹였다.

“죽여 주시옵소서. 부려서는 아니 되는 욕심을 부렸사옵니다.”

태감이 뇌물을 받는 건 황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얼마나 받았는가?”

황제가 얼굴이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된 어린 내관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웃음소리에 안심한 홍죽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노비, 어서방에 있는 두 달 동안 총 은전 4백 냥을 받았습니다.”

황제가 순간 정색하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뭐라? 교주 땅 8백 묘를 누가 네가 사줬느냐? 네 형의 벼슬길은 또 누가 열어 주었느냐? 짐 옆에서 채 백일도 있지 않은 녀석이 대담하게 돈을 긁어모아!”

얼굴이 사색이 된 홍죽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이 노비의 죄를 알겠사옵니다.”

그는 감히 황제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 청하지도 못하고 울먹였다.

“누구냐?”

황제가 몸을 돌려 신발을 벗은 뒤 용상에 앉아 상주문을 고치며 물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홍죽은 감히 숨길 엄두를 내지 못하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범······ 제사이옵니다.”

담담한 얼굴을 한 황제가 의외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홍죽이 갑자기 네발로 황제 발밑으로 기어가서는 고개를 치켜들고 울며 사정했다.

“폐하, 이 노비를 죽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이 노비, 폐하께만 충성하며 범 제사 대인과는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사옵니다. 제사 대인은 좋은 분입니다. 노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이리된 것이오니 부디 제사 대인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황제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응? 어째서 그를 대신해 간청하는 것이냐?”

그러고는 즉시 큰 소리로 웃었다.

“녀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붙임성이 좋은 모양이군.”

황제가 어린 내관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얼른 내 앞에서 사라져라. 이 일은 범한이 진작 짐에게 말했던 것이다. 만약 짐이 네 영민함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진작 너를 없애 버렸을 것이야. 그런데도 너는 그 애의 편을 들고 있구나.”

“네?”

놀란 홍죽이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뒤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른 안 꺼지고 뭐 하느냐?”

“네, 폐하.”

홍죽은 우는 얼굴로 말했지만 속마음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일어나지 않고 기어서 어서방을 나갔다. 황후궁으로 쫓겨나든 다른 곳으로 가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방을 나가 옆방으로 달려간 홍죽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그제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수건을 건네받은 그가 눈물과 먼지로 꾀죄죄한 얼굴을 대충 아무렇게나 닦았다. 뒤숭숭한 마음에 부하들을 모두 내쫓고 자리에 앉으니 불현듯 무서움이 밀려왔다.

“작은 범 대인의 말이 맞았어. 이 세상에 폐하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어린 내관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께서 탐을 내도 좋다 허락하셨으니 차라리 일을 공개적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는 범한의 주도면밀함이 감탄스러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폐하가 주변 어린 내관들이 돈을 탐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이 점을 가장 중요한 일을 숨기는 데 사용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폐하는 나중에 작은 범 대인이 자신에게 접근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하던 홍죽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격해졌다.

‘이제 어서방을 떠나게 되었으니 작은 범 대인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

황궁을 떠나는 마차 안에서 범한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달과 두 명의 호위는 밖에 있었기에 안에 탄 사람을 소문무뿐이었다. 그는 계년조 안에 황실에서 심어 놓은 밀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왕계년이 감찰원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관리들을 추려서 뽑은 만큼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일을 추진하려면 또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영주 일은 실마리를 찾았는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차 위에서 조심히 주변 동정을 살피던 소문무가 가볍게 대답했다.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 지주는 감옥에서 병들어 죽은 것입니다. 검사관도 대인의 약이 사용됐다는 건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주의 가족들이 이대로 얌전히 있어 이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제사 대인이 자신에게 비밀을 유지하라는 당부를 한다는 걸 아는 소문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은밀한 일을 제사 대인이 맡겼다는 것은 자신이 마침내 심복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심복으로서 생각해 봤을 때 이번 일은 여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정4품 관리인 지주를 암살한다는 것은 감찰원이 건립된 이후에 거의 없었던 일이다. 앞으로 아무 일 없으면 다행이었지만 만약에 변고가 생긴다면 감찰원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지주는 아무런 파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천자의 제자였다.

소문무의 생각을 읽은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 지주를 죽인 것은 향민들의 가산을 강제로 점거했을 뿐만 아니라 도적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네. 그러니 그놈 목숨을 빼앗은 거로 끝났으면 그놈한테도 싸게 먹힌 셈이야.”

소문무가 간청하듯 말했다.

“대인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뒷받침할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체포한 도적들도 입을 꾹 다물고 그 지주가 자신들과 결탁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이네. 만약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면 내가 이런 방법을 썼겠는가.”

소문무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너무 위험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다못해 대인께서 상주문을 올렸거나 문하중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폐하를 만나 이야기하셨더라면 증거가 없더라도 폐하께서 대인의 체면을 봐서 그 지주를 체포했을 겁니다.”

범한은 웃으며 고개만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지주의 일은 절대 폐하가 알게 해서는 안 됐다. 그가 두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자 머리 회전은 오히려 빨라졌다. 그가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주 일에 관여하게 된 것은 어린 내관 홍죽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늘처럼 큰 은혜를 입게 된 홍죽은 앞으로 이 점을 끊임없이 되새길 터였다.

지금 어서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어린 내관 홍죽은 영주 사람으로 원래 성이 진(陳)씨였다. 과거 범한이 죽인 지주가 지현(知縣)이던 시절 그는 어느 곳 임산물 때문에 홍죽의 진씨 집안의 가업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자 진씨 집안의 두 인재가 산을 넘고 고개를 지나 경도에 가서 소송을 걸겠다고 주장했다.

일이 발각될까 겁을 먹은 지현은 악랄한 방법을 사용해 일을 잠재우기로 했다. 바로 한밤중에 산 도적들을 이끌고 진씨 집안에 쳐들어간 것이다.

그날 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확실치 않았다. 다만 어린 소년이었던 홍죽과 그의 형은 산에서 노느라 집에 돌아가는 걸 잊어버려 다행히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총명한 두 형제는 밤에 산을 넘어 구걸하며 동산로까지 갔지만 관아에 가서 고자질하지 못했다. 이후 온갖 고생을 하며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두 형제는 결국 버틸 수 없게 되자 어린 아우인 홍죽이 신공을 연마하고 바짓가랑이에 피를 묻혀 궁에 들어온 것이었다.

겁에 질려 황궁에 들어온 홍죽은 선배 태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이 든 궁녀들에게 엉덩이를 꼬집히는 모욕을 당하면서 더욱 겁이 많아져 자신의 성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어느 날 물을 길어 함광전 옆길을 지나가던 홍죽은 밖에서 졸고 있는 늙은 홍 태감과 마주쳤다. 늙은 태감은 궁복이 아닌 낡을 옷을 입고 있어 상대방의 신분을 알아채지 못한 홍죽은 늙은 태감이 얼굴 주변을 날아다니는 파리도 쫓아내지 않고 부서진 대나무 의자에 기대 졸고 있자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순간 자신과 같은 처지란 생각에 주변 나뭇잎을 꺾어 흔들며 파리를 쫓아내 줬다.

물론 잠에서 깨어난 늙은 홍 태감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흐름처럼 홍죽을 제자로 받아들여 황궁에서 호의호식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성씨가 없는 어린 내관에서 자신의 성을 줬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대나무 의자에 기대 있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대나무 ‘죽(竹)’ 자를 이름으로 지어 줬다. 이것이 바로 홍죽이란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날 이후로 늙은 홍 태감은 홍죽의 생사에 관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말도 섞지 않았다. 홍죽은 어서방에 오게 된 뒤 늙은 홍 태감에게 아부하려고 애썼지만 늙은 홍 태감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어린 내관은 홍죽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홍씨 성을 가진다는 것은 황궁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늙은 홍 태감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자 순식간에 황궁 안에는 홍 태감이 홍죽을 거둬들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아무도 홍죽을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에게 수월한 일을 맡기면서 잘 봐달라 아첨했다.

홍죽은 머리가 영민한 데다가 어린 시절 참상을 겪으면서 신중함도 배웠다. 덕분에 홍죽은 여러 좋은 기회를 얻고 또 대 내관이 세력을 잃게 되면서 운 좋게 어서방에 들어와 폐하 옆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회와 인연이 맞아떨어져 얻어진 결과였다.

어서방에서 여러 일을 경험하게 된 후 지주가 큰 관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마음속에 복수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별로 없는 그로서는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폐하 앞에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 간청할 용기도 없었다.

바로 이때 하늘에서 그의 앞에 한 사람을 보내 주었다.

* * *

마차가 덜컹거리자 눈을 뜬 범한이 피곤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홍죽을 대신해 복수할 방법을 궁리한 그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알리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한 오늘에서야 그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범한은 홍죽이 황궁에서 빠르게 입지를 굳히고 있고 황제도 그를 신임하는 만큼 3년 안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만약 그때가 된다면 그의 말 한마디에 조정 6부에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복수를 해줄 게 뻔했다. 그래서 범한은 반드시 3년 먼저 깔끔하고 후환 없이 원한을 갚아 주고 홍죽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높은 수준의 전략이었다.

사망한 지주는 영주 지주였고 홍죽은 교주 사람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관련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은 너무나도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범한은 누군가가 홍죽과 이 일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신중하게 처리했다.

훗날 폐하가 영주 지주의 죽음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감찰원을 동원해 조사할 것이므로 피해 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더구나 황제가 파벌도 없고 황실과 연관도 없는 보잘것없는 지주의 목숨을 자신의 아들보다 더 귀하게 생각할 리는 없었다.

범한이 마차 창문을 살짝 열어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황궁 각루를 바라보며 속으로 어린 내관이 얼른 출세하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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