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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45화 (345/1,108)

345화

말문이 막힌 범한은 자신과 어머니의 수법이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북제 상경에서 장묵한과 대화를 나눴을 때 그도 설명하기 힘들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우연히 역사책에서 봤다고 말했고 역사책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변소에서 똥 닦을 때 썼다고 둘러댔다.

태감이 여러 차례 재촉하자 황제는 결국 몸을 돌렸다. 떠나는 그의 앙상한 뒷모습에는 슬픔이 배어났다.

작은 건물에는 홍죽과 범한만 남았다. 황제의 뒷모습이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지자 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배를 움켜잡고 건물이 떠나가라 웃는 모습이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옆에서 놀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범 제사께서 오늘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실성한 게 아닐까.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해야 하나.’

한참 후에야 마음을 가라앉힌 범한은 너무 웃어 아픈 배를 어루만지며 숨을 헐떡였다.

“나 혼자 올라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건물에 올라가는 과정에서도 범한은 여전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섭경미란 사람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수많은 좋은 시를 놔두고 굳이 이 시를 인용해 범건과 황제를 비롯한 사람들을 다그치는 데 사용했으니 말이다. 마오쩌둥의 시와 그녀의 마음이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던 걸까.

건물로 올라왔을 때 범한은 웃음기를 완전히 거두고 평상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봉건 왕조에 살면서 그 시를 베낀 걸 보면 어머니가 마지막에 황실과 충돌한 것도 이해가 됐다.

냉정함을 회복한 그는 아까 황제가 보였던 진심을 잊은 채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차갑게 식은 차를 들고 구석진 방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침착한 모습으로 초상화 앞에 섰다.

그림 속에는 황색 옷을 입은 여인과 유유히 흐르는 큰 강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여인은 강가의 푸른 돌 위에 서서 큰 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살짝 날리는 모습도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앞쪽에 하늘 높이 치솟는 파도와 모래들도 자세히 그려져 있었고 멀리 맞은편 기슭에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도 그려져 있었다. 흙이나 돌을 나르는 걸 볼 때 아마도 강둑을 수리하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이 그림을 그린 화공의 솜씨는 정말이지 대단했다. 사소한 부분의 세밀함과 풍경의 웅장함을 그대로 녹여 냈을 뿐만 아니라 맞은편 기슭의 심각한 상황과 가까이 산과 돌이 어우러지는 풍경까지 모두 적절하게 묘사하였다. 더욱이 두 산 사이로 흐르는 큰 강의 거센 파도와 물보라는 실감 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당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강물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풍경들이 그림의 중심은 아니었다. 운 좋게 이 그림을 본 사람은 누구나 강가에 서 있는 황색 옷을 입은 여인에게 시선이 간 뒤 나중에 풍경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은 옆모습만 보였는데 옥처럼 영롱한 귓불 주변에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입술을 살짝 다물고 있는 게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그녀의 눈썹이었다. 검처럼 아름다운 눈썹은 부드러운 여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남자처럼 호방한 기색도 없었다. 그저 맑고 깨끗해서 저도 모르게 호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때 범한의 시선은 옆모습을 한 여인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는 눈동자였지만 안에는 아주 많은 감정이 감춰져 있는 듯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북제 상경성 밖 서산 절벽 동굴에서 소은이 어머니를 묘사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바로 그 눈빛이야. 유연함, 슬픔, 실망 그리고 생명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고 고난을 동정하면서 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눈빛 말이야.

범한이 탄식하며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벽에 걸린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려는 것 같았다. 건물 구석방에서 그는 차갑게 식은 차를 손에 들고 오래된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건물 밖에 햇볕이 사라지더니 바람과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에 든 차가운 차를 마시지 않은 채 오래도록 우두커니 앉아 있다 보니 입술이 말라 왔다. 그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그림 속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을 향해 말했다.

“대단한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제대로 돌보지는 못하셨네요.”

그가 긴장한 듯 잠시 멈칫하더니 머릿속으로 말을 좀 더 조리 있게 다듬었다.

“저는 어머니만큼 훌륭한 일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저 자신을 잘 돌볼 거예요.”

그가 일어나 그림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잠시만 여기 계세요. 제가 그림을 가져가게 허락하지는 않으실 테니.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자주 보러 오게 될 거예요.”

며칠이 걸릴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를 일이었다. 범한이 그림 가까이 다가가 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모두 지난 일일 뿐······ 풍류를 아는 인물을 꼽는다면 나를 제일로 꼽겠지.”

이 말을 끝낸 뒤 그가 방을 나갔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뒤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다시 돌아온 범한은 방에 서서 그림 속 여자를 자세히 바라보다가 대뜸 질문했다.

“이과? 박사셨나?”

그림 속 여자는 자신의 아들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꺼내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마음이 시큰해지자 괜히 웃으며 눈가에 어린 눈물을 감췄다. 그가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

“감사해요.”

그가 정말로 떠났다. 그림 속 황색 옷을 입은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세차게 흐르는 강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가 등지고 있는 방문은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일이었다.

문을 나온 뒤 범한이 손에 들고 있던 식은 찻물이 담긴 찻잔을 던졌다. 소리를 내며 찻잔은 정확하게 다른 찻잔 위에 떨어졌다. 두 찻잔이 딱 맞물리면서 아래 찻잔에 있던 찻물이 넘쳐흘렀다. 손에 있던 찻잔을 다른 찻잔 위에 던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는 사소한 동작에 불과했다.

내려간 범한이 홍죽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두 사람이 건물을 떠나 한기가 가득한 황궁 돌길을 향해 걸어갔다.

범한을 황궁 밖까지 배웅한 홍죽은 태극전을 돌아 석문을 거친 뒤 어서방으로 갔다. 그는 길을 가면서 만난 궁녀들과 농담도 하고 어린 내관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이에 태감과 궁녀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홍 태감을 바라봤다. 왜냐하면 홍 태감은 폐하를 옆에서 모시게 되면서 지위가 올라가자 사람이 신중해지고 음흉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도 기뻐하는 걸까.

눈앞에 어서방이 보이자 홍죽은 자신의 태도가 점잖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걸음을 재촉하며 길옆 돌 위에 쌓인 눈을 두 손 가득 쥐고 얼굴에 비볐다. 상기된 얼굴 피부와 근육을 차갑게 식힌 그가 비로소 안심하며 마른기침을 두 번 했다. 그러고는 황궁 태감 어르신인 늙은 홍 내관에게서 배운 대로 침착한 표정으로 어서방 문을 열었다.

황제는 이때 서무 대학사와 목소리를 높이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쟁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담한 서무 대학사는 황제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당당하게 주장했다. 홍죽의 귀에 희미하게 무슨 강에 대한 말과 돈을 융통하는 내용이 들렸고 간간이 호부라는 단어도 나왔다.

홍죽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옆에서 대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서무 대학사가 저렇게 폐하와 각을 세울까 생각했다.

겨울은 강을 정비하기 좋은 기간이었다. 이에 문하중서는 두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 두고 호부가 자금을 마련하기를 기다리며 각 지역의 주와 현에서 사람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부에서 끝내 자금을 내주지 않으면서 강 정비 사업이 지체되고 있었다. 이로써 모든 사람에게 질타를 받게 된 범 상서는 만약 폐하가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했다.

태평성세를 이룩한 경국 국고에 돈이 없다니. 문하중서가 호부에 이유를 물어봤지만 호부는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며 황실에 자금을 융통하는 게 먼저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실의 자금은 원래 황실 금고에서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황실 금고가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할 정도로 돈이 말랐다는 것인가. 황실 금고의 일은 장 공주와 관련이 있는 만큼 황제의 체면과도 연관된 일이었다. 더구나 최근 감찰원이 최씨 집안을 조사하며 황실 금고를 직접 건들고 있는 만큼 조정 대신들이 황제에게 이 일을 물어보는 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무 대학사는 입궁해 황제를 찾아간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군신 사이의 대화는 화목해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마른기침을 하며 슬며시 범한, 강남 등 알쏭달쏭한 말을 하자 서무 대학사의 안색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범한이 강남에 가면 경국 재정 문제가 말끔히 해소될 거라 믿는 듯했다.

서무 대학사가 목소리를 낮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기간을 맞추지 못해 내년에도 큰 홍수가 나면 어떡합니까? 범 제사의 능력이 출중하긴 하지만 강남 일이 복잡해 처리하려면 족히 1년은 걸릴 것입니다. 설사 내년은 하늘의 덕으로 무사히 넘긴다 해도 그다음 해는 어찌합니까?”

황제가 웃으며 서무를 위로했다.

“범한이 며칠 뒤에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 기간을 맞출 수 있을 걸세.”

서무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하고는 어서방을 나갔다. 경험이 풍부한 두 사람은 정말로 범한이란 젊은 청년이 강남에 간다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걸까.

사실 서무 대학사가 오늘 폐하를 찾아온 것은 이런 표면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현재 조정 문관의 우두머리인 그는 폐하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황실 금고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도에 두 소문이 불어닥친 뒤 조정이나 황실에서 범한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황실은 많은 일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조정으로서는 항상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황제가 범한이 경도를 떠나는 기간을 설명해 준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첫째는 황실 금고를 반드시 정리할 것이며 강력한 수단도 불사할 것이란 거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서무를 통해서 조정 관리들에게 범한의 신분에 대한 추측을 그만두라고 말한 거였다. 범한은 어차피 경도를 떠날 것이니 모반을 저지른 섭가의 잔여 세력이니 황제의 사생이니 하는 추측은 그만두고 소문이 사라질 수 있게 하라는 거였다.

“홍죽.”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문득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더냐?”

홍죽이 재빨리 대답했다.

“범 제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에서 큰 웃음소리가 났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홍죽이 어린 나이에 황제를 근거리에서 모시게 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누구라 지칭하지 않았음에도 방금 출궁한 작은 범 대인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황제가 순간 어두워진 안색을 숨기고 미소 지었다.

“그럼 됐다. 얽매이는 게 없어야 조정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게지.”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를 짓던 홍죽에게 황제가 소스라치게 놀랄 말을 내뱉었다.

“다음 달부터는 황후 옆에서 시중을 들도록 해라.”

황제가 손바닥 가운데를 누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자 날벼락을 맞은 듯 홍죽은 화들짝 놀라서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우는 소리를 냈다.

“폐하, 이 노비가······ 이 노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차라리 때리시고 내쫓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쪽 궁중의 수령 태감이 되란 말이다. 짐이 특별히 발탁해 줬건만 저리 놀라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든 홍죽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는 감동한 표정으로 울었다.

“이 노비가 무슨 수령 태감을 하겠사옵니까. 저는 그저 폐하 곁에 머물고 싶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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