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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44화 (344/1,108)

344화

황제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먼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한껏 온화해져 있었다.

“자네의 형제들을 포함해서 천하 사람 중에는 짐을 원망하더라도 그걸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없네. 그런 걸 보면 안지, 자네는 정말 모친을 많이 닮았군.”

범한이 목을 쭉 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제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랬나? 자네가 짐의······ 친아들이라고 말한 거네.”

범한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기막힘과 분노, 슬픔이 담긴 웃음이었다. 한참 뒤 마음을 추스른 그가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자신도 입궁하면서 세웠던 계획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서자 역할에 너무 몰입되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황제에게 예를 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의 연기에 속은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경도에 파다한 소문을 짐이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도 짐이 인정을 하는 것은 안지, 자네가······ 짐의 혈육이기 때문이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황제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고집과 강인함을 보고는 연민의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황제가 이어 말했다.

“다음 달이면 열여덟 살이 되지.”

범한이 고개를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신, 태어난 날을 모릅니다.”

이 말이 황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항상 냉정한 황제도 이 말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했다.

“정월 18일이네.”

범한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태어난 날을 알게 되는군요.”

보면 볼수록 범한이 마음에 든 황제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황량한 시골에서 자네를 이렇게 잘 길러 준 걸 보면 담주에서 유모가 상당히 고생을 했겠군. 짐이 언제 시간을 내서 담주에 가봐야겠다. 안지야, 유모는 요즘 잘 계시느냐?”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할머니께서는 건강하십니다. 소······ 항상 편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래.”

범한이 더는 ‘소신’이라 자신을 칭하지 않자 황제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범한은 새로운 ‘군신 관계’에 적응한 듯 천하지존인 황제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모두 아래 민요를 소리 내어 읽어 보자.

범한은 황제의 아들이다. 이전에는 범한이 알고 있다는 걸 몰랐던 황제가 이제야 범한이 안다는 걸 아는구나. 황제에게 자신이 안다는 걸 숨긴 범한은 이제는 방금 안 것처럼 황제를 속이려 드는구나. 황제는 범한을 모르고 범한은 황제를 안다네. 황제는 범한에게 자신의 아들이라 하고 범한은 자신은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이건 생각의 문제였고 심리 문제였다. 황궁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범한은 이 점을 이용했다.

잠시 뒤 각자 꿍꿍이를 가진 ‘부자’가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범한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안색은 온화해져 있었고 황제와의 대화도 군신 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을 담주에서의 생활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황제는 이러한 분위기에 취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범한이 원했던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일국의 군주가 바쁜 나랏일을 팽개치고 황궁 외진 곳에서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았다. 태극전 나이 든 태감이 황급히 건물 아래로 달려오더니 애타는 목소리로 여러 차례 부른 끝에 마침내 황제가 내려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 뒤에 범 제사가 서 있는 걸 본 태감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황궁 안을 아무리 뒤져도 안 보이시더니······ 눈물겨운 부자 상봉을 하고 계셨던 거군. 내가 그걸 방해해 천자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곤장을 맞을지도 몰라.’

그의 생각대로 황제의 안색은 한눈에 봐도 안 좋았다. 사실 황제는 아들 중에서 짧은 시간 안에 경국에서 가장 많은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학식과 교양도 출중하고 일 처리 능력도 뛰어난 범한을 가장 좋아했다.

게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현공 사당에서 3 황자를 구한 일과 경도 소문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이런 범한의 충직한 모습과 악랄한 수단을 부리면서도 중립을 지킬 줄 아는 모습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이 중년의 천자는 그동안 범건에게 근거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한 나라의 황제였지만 어쨌거나 그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오늘에야 드디어 범한에게 사실을 말해 주고 서로를 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자 그는 무척이나 기뻤다. 범한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도취된 황제에게는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 즐거운 시간에 갑자기 나타난 태감이 찬물을 끼얹으니 황제는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건물 안팎에 구경꾼들이 많았기에 황제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몸을 돌렸다. 범한의 수려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는 얼굴을 보자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점점 온화하게 변했다.

“이전에도 말했고 자네도 봤듯이 일국의 군주는 일이 많네. 자네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니 이 일로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는 말았으면 좋겠네.”

자신의 친아들 앞이라도 존엄한 황제는 말을 낮출 수는 없었다. 비록 미안한 마음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뜻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양손을 공손히 모아 올려 화답했다.

그러자 순간 신양에 있는 누이가 생각난 황제가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경도에 너무 시끄러워 공개 석상에서 다루지 못한 일들이 많네. 진평평은 자네가 조정에 있기가 난처할 테니 일정을 앞당겨 강남에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하던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황제 앞에서 감히 자기 의견을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기에 범한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소신,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덧붙여 말했다.

“다만 강남에 가본 적이 없는지라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짐이 원하는 것은 모든 일이 말끔하게 처리되어 매년 황실 금고가 조정을 위해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네가 잘 알고 있겠지. 짐은 자네가 최근 두 달 동안 한 일을 높이 평가하고 있네.”

황제가 말한 일은 감찰원이 최씨 집안을 수사해 황실 금고 밀수 사건을 드러낸 것이었다.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다만······ 이 일 때문에 안지, 자네가 조정에서 적을 만들게 되어, 짐은 그게 좀 걸리지만······. 흠, 아무튼 일은 잘 처리했네.”

황제는 범한이 조정을 위해서 황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기 곤란한 일을 대신 처리해 주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신양과 2 황자를 공격했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소신은 폐하에게만 충성하는 고립된 신하로 남을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흡족해하자 범한이 틈을 이용해 청했다.

“강남은 길이 멀고 험한 데다가 소신이 감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장사를 잘 모르는 게 사실입니다. 이에 모든 사무를 혼자 처리하다가는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아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신······.”

그가 황제의 안색을 힐끗 살핀 뒤 눈을 꼭 감고 말했다.

“경여당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황제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경여당 대행수들이야 황실 금고 일에 관해 잘 알 테지만 조정의 규정상 그들은 경도에서 나갈 수 없네.”

황제는 범한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염치없다고 생각되는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했다.

“안지, 이렇게 짐 앞에서 직접 청하다가 짐이 자네의 마음을 의심할 거란 걱정은 안 하는가?”

범한이 숨김없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천하의 모든 땅이 폐하의 것입니다. 소신, 폐하를 대면한 자리에서 청해야 폐하께서 소신의 깊은 충심을 믿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황제가 그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과거 섭가는 국체를 흔들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그러니 일국의 황제인 그로서는 당시의 일이 재현되는 걸 원치 않았다. 더구나 눈앞에 있는 범한은 그녀의 친아들인 만큼 섭가가 사라진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범한이 힘들게 말을 꺼낸 걸 보면 거짓은 없어 보였다.

“자네의 지위도 높아졌으니 금이니 은이니 하는 것은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리고 짐은 이미 6년 전에 자네가 장성하면 황실의 금고를 맡기겠다 결정했네. 이게 본래 짐의 뜻인데 의심할 게 뭐가 있겠는가?”

범한이 감동한 기색을 보이자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자네도 짐을 속이려 해서는 안 되네. 황실 금고의 일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경여당 대행수들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짐에게 이런 요청을 하는 걸 보면 경도에 갇혀 있는 그들을 꺼내 주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범한이 탄식을 내뱉으며 솔직하게 털어놨다.

“어찌 폐하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소신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 출생의 배경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작년에 경여당에 갔을 때 대행수들이 경도에 발이 묶여 있어 힘들어하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대행수들의 나이가 아직 정정한 만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게 해주신다면 조정에도 큰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작년에 경여당에 갔을 때 그는 이 일은 언젠가는 해결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오늘 기회가 되자 황제 앞에서 공개적으로 요청을 한 것이었다.

그의 솔직한 말에 황제는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자 황제는 실소를 지었다.

“왕공 집안 중에서 경여당에 사업을 맡긴 곳이 많으니 모두 데려가지는 말게. 자네가 모두 데려가 버리면 정왕부터 자네를 용서하려 하지 않을 것이야.”

범한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자 황제가 이어 말했다.

“그들 중에 짐 앞에서 꼿꼿이 서서 친왕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거친 사람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 자네가 더 한 것 같군.”

황제가 잠깐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건물 구석진 방에 그림이 있네. 이따가 가서 보게.”

초상화가 황궁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범한은 주저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그림이옵니까?”

“자네 어머니가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초상화네.”

그녀를 떠올리자 황제의 눈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따가 보러 가게. 덧붙여 말하자면 자네는 어머니와 그렇게 많이 닮지 않았어.”

범한이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미모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성격은 괴팍하고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러니 이렇게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게지. 그녀는 시나 문학과 같은 것들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실무만을 중시했네.”

눈앞에 서 있는 아들이 시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게 생각나자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손가락으로 범한을 가리켰다.

“그녀가 지은 시나 문장은 세상을 집어삼킬 만한 기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성정에 기인한 것이었지. 그런 걸 보면 이 부분에서는 자네와는 차이가 크네. 아주 큰 차이가 있어.”

홍죽은 건물 밖에서 태감이 애 달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폐하가 작은 범 대인과 즐겁게 대화 나눈 걸 차마 방해하지 못했다.

범한이 웃으며 호기심에 물었다.

“어머니께서······ 지은 시나 글을 폐하께서도 들어 보셨습니까?”

“한 수 들어 봤지.”

황제가 아득한 먼 날을 떠올리며 읊었다.

“북쪽 나라의 풍광은 얼음이 천 리까지 덮였고 눈발이 만 리에까지 날리는구나. 황성궁 안과 밖을 둘러보니 아득해 끝이 없구나. 큰 강도 얼어붙어 세차게 흐르던 물줄기도 사라졌네. 산은 은색 뱀들이 춤을 추는 듯하고 땅은 코끼리처럼 뛰며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시험하는 것 같네. 날이 맑으니 요염하게 붉은색으로 치장한 것 같네. 강산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무수히 많던 영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위나라 황제와 한나라 무제는 문학적 재능이 없었고, 당나라 태종과 송나라 태조도 문학에는 자질이 없었네. 천하를 호령한 서쪽 오랑캐 서만의 다한도 활로 독수리를 쏠 줄밖에 몰랐지. 모두 지난 일일 뿐 풍류를 아는 인물은 꼽으려면 지금을 바라봐야겠지.”

‘위나라 황제와 한나라 무제? 당나라 태종과 송나라 태조라고?’

범한은 놀라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자 황제가 꾸짖었다.

“설마 이 시가 별로라는 게냐?”

범한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기세는 대단하나 소신이 한나라 무제, 당나라 태종, 송나라 태조가 누구인지 몰라 그럽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마오쩌둥의 <심원춘(沁園春)>을 살짝 고친 거잖아. 어머니께서는 고치시려면 철저하게 고쳐서 쓰셔야지. 서쪽 오랑캐 서만의 다한이라니······. 원래 시대로 칭기즈칸이라 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꿀 것이지 칭기즈칸의 존칭인 다한(大汗)을 사용할 건 뭐야. 정말 나보다 더한 분이야.’

황제가 설명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뛰어난 군주라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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