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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43화 (343/1,108)

343화

마차 한 대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새로 난 길 입구에 깔린 청색 돌 위를 지나갔다. 추운 겨울이라 길 표면이 얼어 있어 사륜마차도 함부로 빨리 내달릴 수 없었기에 마차를 모는 소문무는 조심히 채찍을 휘둘렀다. 장화를 신은 감찰원 6처 검수가 마차를 따라가면서 주변을 경계했고 계년조는 평범한 백성처럼 솜저고리를 입고 거리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마차에는 원형과 사각이 서로 교차하는 문양에 흑금으로 테두리가 꾸며진 범씨 집안의 표식이 있었다. 마차 안에는 범한과 고달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두 명의 호위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범한이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호가 너무 거창해서 오히려 눈에 띌 것 같군.”

고달이 창문에 단 두꺼운 가림막을 걷고 거리를 살펴본 뒤 대답했다.

“창산에서도 검수이 나타났던 만큼 경도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번 일로 크게 진노하신 폐하께서 저희에게 대인의 안전을 반드시 책임지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거리를 한번 훑어봤다. 거리에 행인이 많지는 않았지만 민가와 가게 안에 있는 사람을 비롯해 주변의 모든 사람은 마차 안에 범씨 집안의 사람이 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을지 추측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마차 안을 훔쳐봤다. 며칠 동안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면서 천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범한이 폐하의 서자라는 소문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차가 향하는 방향을 가늠하던 경도 백성들은 작은 범 대인이 입궁하러 간다는 걸 알아채고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오늘 경도에 모두를 경악하게 할 만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궁은 항상 멀게 느껴졌지만 실은 매우 가까웠다.

마차가 황궁 광장 외곽에 멈춰 섰다. 현공 사당 사건 이후 금의위의 경비가 한층 더 삼엄해져 있었다. 범한은 마차에서 내려 소문무가 전해 준 외투를 걸치고 목발을 겨드랑이에 꼈다. 범한의 상처가 좋아져서 굳이 목발을 짚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고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고달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범한이 일행을 이끌고 음습하고 웅장한 황궁을 향해 걸어갔다.

성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지키고 있던 금군 호위들이 재빨리 주위를 에워싸 바람을 막아 주었다. 이런 대우는 노쇠해 몸이 좋지 않은 원로대신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황자들도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그는 1 황자가 부하들에게 암암리에 지시를 내렸다는 건 몰랐다. 1 황자는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내는 태도를 통해서 모든 금군 장군에게 자신의 뜻을 명확히 전달했다. 바로 범한의 지위는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범 제사와 1 황자 사이의 관계도 이미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늘 성문에서 안내하는 사람은 범한이 처음 입궁했을 때 만난 후 내관이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였기에 후 내관은 얼굴 가득 아첨하는 표정을 지었다.

“범······ 도련님,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오늘 일찍 일어나길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타박을 하다가 물었다.

“지난달에 계관국으로 가서 지난번에 입궁했을 때는 요 태감이 맞이했는데 오늘은 어찌 후 내관이 나와 맞이하는가?”

후 내관은 해관국령으로 진급되어 황궁에서 약과 질병을 책임지고 있었다. 황궁 안에서 신임받는 사람만 갈 수 있는 요직에 발령된 그가 오늘은 성문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게 이상했다.

후 내관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요 태감이 일 때문에 출궁해 폐하께서 저에게 오늘 대신 맡으라 하셨습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 내관을 따라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대평 궁전 정원을 걸으며 중요하지 않은 한담을 늘어놓던 범한이 한숨을 쉬며 넌지시 말했다.

“요 며칠 동안 본관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네. 그런데 후 내관은 이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대해 주는군.”

예상치 못한 말을 듣자 후 내관은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범 도련님께서 앞으로 더욱 대성하시도록 제가 옆에서 보좌할 것입니다.”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웃어넘겼다. 자신과 황실의 숨겨진 관계를 알고 나서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과 달리 황궁 안 태감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경국 황궁에 사는 태감들은 모든 황자를 똑같이 대우할 뿐 절대 편을 만들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편에 섰다가 만일 다른 쪽이 용상을 차지하게 된다면 자신들에게 남은 건 죽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감들은 황태자 이외 세 명의 황자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공손하게 행동하면서도 멀리했다.

태감들이 범한에게 아첨하는 이유는 그가 관리이기 때문이지 황제의 아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익숙한 궁을 몇 채 지난 뒤 어서방 앞에 도착하자 후 내관이 문 앞에서 안에 말을 전달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눈짓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문이 열리자 범한은 목발을 짚고 안으로 들어가 높은 책장 앞에 섰다. 그러고는 일부러 서투르게 목발을 옆에 내려놓은 뒤 의자에 앉아 상주문을 보고 있는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황제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인사를 받았다.

“알아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게. 다 보고 나면 다시 이야기하세.”

‘어서방 안에서 자리를 찾아 앉으라고?’

먼지떨이를 쥐고 있던 홍죽이 황제의 말을 듣고는 잽싸게 뒤편으로 걸어가더니 걸상 하나를 가져와 범한 옆에 두었다. 범한이 미소 지으며 어린 내관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한 뒤 앉았다.

‘저 어린 내관은 여드름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은데.’

상주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보지 않던 황제의 눈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어서방은 조용했다. 문 안과 밖에 대기해 있는 태감들도 숨죽인 채 침묵을 유지했다. 황제와 단둘이 있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소문이 퍼진 뒤에 만나서 그런지 긴장되면서 목구멍이 가려워졌다. 그가 참지 못하고 살짝 기침하자 소리가 어서방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범한은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상주문을 계속 검토했다.

범한이 재빨리 정자세로 앉은 뒤 황제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황제가 일하는 모습을 볼 기회는 소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약간은 주의력이 흐트러진 범한이 자신도 모르게 황제의 얼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인 황제의 얼굴 속에서 자신과 닮은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혈연관계라면 얼굴에 비슷한 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오랜 시간 검토했음에도 아직도 책상에는 상주서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황제는 새로 하나 읽을 때마다 기뻐하기도 했고 격양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영토가 광활한 경국은 총 7로 26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주와 현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매일 관아에서 보내오는 수많은 상주문을 읽고 넓은 영토를 다스린다는 건 실로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황제는 세상이 알아서 돌아가게 내버려 두거나 내각에 권한을 맡기고 놀러 다니는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권력을 조금도 놓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재상 임약보를 조정에서 내쫓은 뒤에는 문하중서들이 협력해 정사를 돕도록 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범한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황좌는 재미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왕처럼 정원을 가꾸며 사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서 겨울 구름 사이로 따뜻한 햇볕이 비췄다. 마지막 상소문을 읽은 황제는 피곤한 두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켰다.

태감들이 순서대로 수건, 청심차, 간식, 정신을 맑게 하는 향을 들고 들어왔다. 그때 범한이 겨울에도 찬 수건을 사용하는 걸 보고 물었다.

“폐하, 겨울에 찬 수건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닦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차가운 수건으로 뼛속까지 시리게 해야 정신이 바짝 들지 않으냐.”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했다.

“폐하, 뜨거운 수건을 사용하시는 게 건강에는 더 좋습니다.”

황제가 싱긋 웃었다.

“뜨거운 수건은 몸을 나른하게 해서 졸릴까 봐 쓰지 않는다.”

범한도 따라 웃었다.

“수건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습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목이 막힌 듯 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물론 너무 뜨거워 손이 데면 안 되겠지요.”

황제가 의미 장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래, 일리가 있군.”

그러고는 범한 뒤에 놓인 목발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놈도 어미를 닮아서 고집이 세군. 아니면 일부러 내 눈에 들고 싶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황제는 예전 어느 사람이 떠오를수록 범한이 분수에 맞지 않는 헛된 욕심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맑고 고결한 태도를 지닌, 좋은 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일어나 어서방을 나서면서 범한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범한이 급히 목발을 짚고 따라가려 하자 황제는 웃으며 돌아봤다.

“자네 몸이 좋아진 걸 알고 있네. 짐 앞에서 불쌍한 척하려는 것인가?”

황제가 화를 내지 않자 범한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자신을 질책할 거라 생각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헤헤 웃으며 목발을 옆에 내려놓고는 황제를 따라갔다.

범한과 ‘부황’의 첫 번째 심리 싸움은 범한의 승리였다.

* * *

긴 황궁 처마를 따라서 서북쪽으로 걸어갔다. 함광전, 태극전과 같은 웅장한 건축물들은 모두 지나면서 더는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난 궁녀와 태감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길을 비켜줬고 황제와 범한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홍죽뿐이었다. 점점 걸어갈수록 궁녀와 태감들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 정원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적막했고 잔설이 남은 가짜 산에는 새나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디를 가는지 눈치챈 범한은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갔고 황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전은 보이지 않고 낙후한 전당이 나타나자 황제는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고 안에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이 있었다. 건물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않아 몹시 낡아 있었다.

황제를 따라 계단을 오르던 범한은 긴장돼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건물 밖은 낡았지만 안은 누군가 청소를 하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2층에 오르자 황제가 한숨을 쉬며 난간으로 걸어가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깥 풍경만 바라보았다. 이 건물이 있는 곳은 황궁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정원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야생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눈을 맞아 쓰러진 풀이 무수히 많은 시체처럼 보여 음산했다.

그리고 아주 멀리 희미하게 화양문의 각루도 보였다.

범한은 가만히 황제 옆에 서서 안을 살펴봤지만 자신이 생각한 초상화는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내관 홍죽이 차를 우려낸 뒤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까 어서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게 한 것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황제가 두 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지만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군주에게는 군주의 도가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였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기만 하자 황제가 이어 말했다.

“한 나라의 군주인 짐은······ 반드시 사직과 천하의 백성들을 생각해야 하네.”

황제가 차분히 말하면서 아주 먼 곳을 바라봤다.

“황제는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자네 어머니가 말했었지. 그래서 황제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든 때로는 놔버려야 할 때가 있어. 자네를 담주에 16년 동안 버려 뒀다고 짐을 원망하지 말게나.”

범한은 이날이 오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착실히 준비를 해왔지만 막상 그 말을 듣게 되니 목덜미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차오른 두려움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른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신······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황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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