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341화 (341/1,108)

341화

만약 범한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면 오죽이 미쳐 날뛸 것이고 천하는 그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었다. 그러니 오죽이 있는 한 황제는 범한을 아끼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자식에게 죄책감을 가진 아버지이자 인자한 황제인 척해 왔던 것이다.

어쩌면 황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범한을 아끼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황제인 만큼 범한이 충성심에 불타는 대종사급 종을 둔 걸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신묘 사람을 이용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황제는 오죽을 제거할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진평평은 이런 이유 말고도 황제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같은 다른 이유도 있을 거라 추측했다.

신묘는 지금까지 세상일에 관여한 적이 없었기에 누구도 신묘의 사람을 만난 적 없었고 신묘의 사람도 몇백 년 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만약 오죽이 신묘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면 범한과 섭가의 관계는 영원히 묻힐 거고 당시 모든 일도 잊힐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황제가 가장 바라던 결과였다.

다만 황제는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란 사실이 이렇게 빨리 알려져서 자신의 아들이 신묘의 첫 번째 표적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묘를 이용해 오죽을 죽이려 했던 그의 계획과는 다르게 오죽은 범한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신묘의 사람을 유인해 죽였고 범한의 생명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진평평은 오죽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약간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는 신묘 사람이 세상에 나왔다는 걸 알고 계시면서도 범한의 신분이 폭로된 뒤 나나 범한에게 알려 주지 않으신 건가. 폐하께서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진평평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바퀴 달리 의자를 굴려 벽난로 앞으로 가서 손을 뻗었다. 따뜻함에 하품을 하던 그가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즐기려고 벽난로를 만들었지. 무엇이든 잘하면서 왜 이번 일은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했을꼬? 아가씨 집마다······.”

* * *

동틀 무렵 경도 ‘외삼리’라 불리는 외지고 조용한 곳은 아직 어두웠지만 은은하게 둥근 건축물은 볼 수 있었다. 전부 검은 목재로 지어진 사원은 분분히 흩날리는 눈발 아래에서 더욱 세상과 동떨어져 보였다.

검은 목재로 지어진 사원은 경묘였다. 경국에서 유일하게 비밀에 싸여 있는 신묘와 소통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자 황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원이었다.

사당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지만 경묘 대제사는 나오지 않았다. 북제 사원의 고하와 비교하면 이름 없이 묵묵히 수행하는 고행자에 불과한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휘청거리며 눈 덮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안아 들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체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 * *

범씨 집안은 현재 앞채와 뒤채로 나뉘어 성 남쪽 방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두 저택 사이에 놓여 있는 정원에는 가짜 산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라서 나무에 피었던 꽃도 다 떨어지고 대나무와 매화 가지만 곧게 뻗어 고즈넉한 분이기를 자아냈다.

이른 새벽녘 조용한 정원 어디에선가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훅욱, 후욱, 후······욱.”

범한이 얇은 옷만 걸친 채 정원 담장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자마자 단련을 시작한 그는 호흡이 가쁘고 힘겨워 보였다. 당직인 호위 두 명과 6처 검수 몇 명이 재빨리 정원 모퉁이에 서서 아침 일찍 단련을 시작한 범 제사의 안전을 책임졌다.

멀리 서재 밖에서는 등자월과 고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범한의 모습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범한이 매일 아침 달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범한도 두 사람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매일 두 번의 수련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해온 습관이었다. 그러니 그는 부상을 입은 뒤 정기를 단련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힘들어도 부지런히 자신을 단련하는 것은 범한이 가진 가장 좋은 인품 중 하나였다.

뒤채에서 지내는 종들은 정원 담장을 따라 달리는 범한의 모습이 익숙한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행랑 돌계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를 닦고 거품을 뱉으며 수다를 떨었다. 뒤채에서는 황실 금고 최상품인 이것을 종들에게도 사용하게 했는데 범한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열 바퀴를 돈 뒤 범한은 서재 밖 처마에 서서 양손을 허리에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저으며 놋대야를 들고 있는 여종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집안 여자들은 모두 아직 창산에 있었기 때문에 앞채에서 보낸 여종들이 범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종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땀범벅이 된 범한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은 왜 굳이 자기 몸을 힘들게 하시는 거지?’

여종이 놋대야를 걸상에 올려놓고는 범한에게 외투를 걸쳐 준 뒤 손가락으로 물의 온도를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아주 뜨거운 물을 준비해 오긴 했지만 날씨가 추워서 금세 식을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야에 있는 수건을 집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이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다음 벅벅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건에서 흘러나온 물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세수를 마친 그의 얼굴은 뜨거운 열기에 벌겋게 익어 있었지만 눈은 더 맑고 분명해져 있었다. 그가 수건을 다시 대야에 던져 넣은 뒤 옆에 있던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늘 입궁할 거네. 자월은 1처로 가서 요 며칠 동안 감찰원에 무슨 일이 없었는지 알아보게.”

등자월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떠나자 범한은 고달을 바라봤다.

“잠깐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할 일을 전해 주겠네.”

경도에 소문이 퍼진 뒤 황실에서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기에 범한은 호위 네 명을 창산에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하며 온 고달은 범한의 말을 듣고는 약간 안심하며 서재 밖에서 대기했다.

조용한 서재에 들어간 범한은 암담한 눈빛으로 의자에 앉았다. 오늘 자신의 몸 상태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체내에서 정기가 폭발한 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경맥은 여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내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정기는 잠시 온순해져 있어 내장의 기능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기를 억지로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경락이 저절로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창산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뒤 과묵해진 범한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론하는 데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진평평과 범건, 비개 세 사람은 범한이 연달아 일어난 사건에 놀란 데다가 아직 정치적 투쟁을 감당한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범한이 며칠 동안 모든 일을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이 처리하게 내버려 둔 채 나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오죽은 과거 그에게 이 세상에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만 믿어 온 범한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신경 써주고 아껴 줘도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해 왔다.

자신을 지켜 주는 호위, 감찰원, 계년조가 중요한 순간에 의견이 갈린다면 그가 최후에 믿고 의지할 것은 자신이 가진 무공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체내의 정기가 모두 흩어져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등딱지 안에 숨어 들어간 거북이처럼 입을 다물고 나서지 않았다. 모양은 좀 빠지는 짓이었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했다.

서재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낮게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등 대가의 부인이 탕약과 환약이 든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순간 방 안에 진한 약초 냄새가 풍겼다.

중요한 일을 맡길 만큼 신뢰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범한이 복용하는 약은 등 대가의 부인이 전담해서 준비했다. 쟁반을 책상에 내려놓은 등 대가 부인은 범한이 약을 먹으면서 급히 물을 찾지 않도록 따뜻한 차 몇 잔을 준비해 가지런히 책상에 놓았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한 손으로 탕약을 들고 한 손으로 환약을 쥔 채 설탕물에 알사탕을 먹는 것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숨에 먹었다. 약이 워낙에 많다 보니 쉬지 않고 빠르게 털어 넣었음에도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쟁반 위에 있던 약을 말끔히 비울 수 있었다.

“많이 쓰실 텐데요.”

그 모습에 놀란 등 대가 부인은 자신이 약을 먹은 듯 연신 입을 쩝쩝거렸다. 부인은 범한이 안타까우면서도 매일 이렇게 많은 약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먹어 내는 게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감찰원 비 대인은 칼 상처도 다 나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약을 처방해 주시는 거지?’

범한이 그런 등 대가 부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침 식사 비용을 절약했군.”

두 사람이 함께 웃으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등 대가 부인은 쟁반을 들고 서재에서 나갔다. 범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스승님의 처방대로 매일 상당량의 약을 복용하면서 몸은 많이 좋아졌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고하가 정말 천일도 공법을 나에게 전수해 줄까?’

그가 미소 지으며 고하가 자신을 맹호로 키우고 싶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장 공주나 자신과 같은 경국 사람도 북쪽 상삼호처럼 계속해서 용맹함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 경국 조정으로서는 긴장과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셈이었다.

천일도 공법을 외부로 전수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므로 고하는 분명 신중하게 진행하려 할 것이었다. 천일도를 전수한 제자 중에서 해당타타만이 자신과 관계가 좋았으니 범한은 나중에 남쪽으로 내려간 뒤 해당타타에게 공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기대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던 중 눈길이 앞에 줄지어 놓여 있는 찻잔에 멈춘 순간 맑은 황색 찻물이 외눈박이 괴물처럼 보였다. 자신의 이상한 상상력에 웃음이 난 그는 순간 목구멍에 쓰디쓴 위액이 치솟으면서 토하고 싶어졌다. 너무 많은 약을 순식간에 들이켠 탓이었다. 그가 재빨리 차를 마신 뒤 가슴을 쓸어내려 속을 진정시켰다. 등 대가 부인 앞에서 호탕하게 약을 들이켜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원한, 위협, 황궁, 강남과 같은 고민거리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무수히 많은 환약과 같았다. 아무리 쓰더라도 속이 괴롭더라도 전부 삼켜야만 했다.

* * *

고달은 서슬 퍼런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한 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언제든지 무슨 일이 생기면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뭘 본 것인지 장검 손잡이를 쥔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범한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쿵 내려앉은 것이다.

‘제사 대인이 오늘 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거지? 요 며칠간 발생한 일을 보면 즐거울 게 하나도 없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