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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36화 (336/1,108)

336화

진평평이 황송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황제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자네도 당시 황태후께서 무슨 명목으로 섭가의 재산을 몰수했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모반입니다.”

“그렇지. 맞아, 모반이었네.”

당시를 떠올리는 황제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우리 두 사람도 그 결정에 동의했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섭가의 산업을 계속 유지하고 보호할 만한 능력이 있는 건 황실뿐이었으니까.”

“맞습니다.”

진평평이 담담히 대답했다.

“당시에는 관련된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어떤 죄명을 씌우든 상관없으리라 생각했지요. 그게 17년이 지난 뒤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황제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상관없네. 짐이 섭가에 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면 되지 않은가? 그럼 누구도 가타부타 말을 할 수 없을 거네.”

“불가능합니다.”

진평평이 단칼에 황제의 생각을 반대했다.

“폐하께서 그 아이를 불쌍히 생각하시는 건 알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집안의 어르신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진평평이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넌지시 말하자 황제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평평이 말하는 대상은 바로 황태후였다.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런 일을 대비해서 세워 둔 계획은 있는가?”

진평평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터졌고 또 폐하께서 이전에 보이신 뜻이 있는지라 계획을 세워 두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범한이 가진 출생의 비밀을 계속 감춰 두고 싶어 했기에 감찰원에서도 이런 일을 대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거였다.

진평평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신양에서 상소를 보내면 폐하께서는 엄히 질책하시고 황제들에게도 몇 마디 훈계하시면 됩니다. 범한 쪽에서 결단코 사실을 부인한다면 백관들이 의심은 하겠지만 근거 없는 소문만 믿고 상소를 올리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조정에서 안지가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범한은 황실 금고 일 때문에 내년에 강남에 가야 하니 조정의 수군거림에서 도망칠 수 있습니다.”

진평평이 미소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폐하, 비록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이왕 폭로될 거라면 지금이 좋습니다. 범한이 황실 금고 일을 핑계로 2년 정도 경도를 떠나 타지에 나가 있으면 소문도 점점 잠잠해질 것입니다.”

“자네는 소문이 잠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사리리가 유정강에서 기생으로 있을 때 그녀가 어느 친왕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큰일은 없었습니다. 범한에 대한 소문도······.”

진평평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근거 없이 떠돌 뿐 큰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문에도 이 일을 눈에 띄게 실어야 합니다.”

황제가 허탈하게 웃었다.

“다만 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비해야 하네.”

진평평이 약간은 슬픔이 배어 있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황후께는 제가 가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 쉬었다.

“명분을 줘서는 안 되네. 짐은 이미 그 아이에게 미안한 게 많아.”

* * *

6개월 뒤 경도 거리 곳곳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자 감찰원 제사인 작은 범 대인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이었다.

섭가는 이미 20여 년 전에 모반을 꾸몄다는 죄목으로 재산이 몰수되었기에 후손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인물이 경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은 범 대인이라니. 소문을 처음 들은 경도 백성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이내 호기심을 느끼며 사방팔방 소문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소문은 경도 전체에 쫙 퍼져 나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범씨 집안은 반역에 연루된 죄인을 숨겨 준 꼴이 되니 화를 피할 수 없을 터. 그리고 조정에서 범한을 미워하던 문무백관들에게는 공격할 빌미가 주어진 셈이었다. 물론 황실에서 어떤 말도 없고 소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관리가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경도 백성들과 관리들은 시로 명성을 떨친 범한이 고결한 문인으로서의 명성을 버리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감찰원과 돈 냄새가 진동하는 황실 금고를 손에 쥐게 된 걸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번 소문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 거라 생각했다.

황궁은 이런 소문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이 평온한 모습이었고 감찰원만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8처에서 찻집과 술집에서 소문을 퍼트리는 백성들을 체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후 일석거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약간의 지위를 가진 그들이 이처럼 겁에 질린 토끼 눈을 하고 있는 건 조금 전 침을 사방으로 튀기며 이야기를 하던 두 명의 서생을 감찰원 8처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체포해 갔기 때문이다.

감찰원의 이런 반응에 사람들은 범 제사가······ 섭가와 관련이 있다고 더욱 믿게 되었다.

감찰원 안, 무릎에 양털 담요를 덮은 진평평이 검은색 커튼을 살며시 걷었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문 채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다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 8처 관리들이 서생 두 명을 체포해 가자 일석거 안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술기운에 두려운 게 없었던 문인들은 잠시 뒤 감찰원이 범 제사 신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두고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신비한 섭가 여사장이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로 이 세상을 떠난 뒤 모든 가산은 황실 금고로 들어갔어.”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지은 남자가 자신의 의견을 털어놨다.

“작은 범 대인이 정말 그 여사장의 자식이라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거야.”

“모반이라고?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경여당 대행수들은 왜 아직까지 잘 살고 있는 건가? 말이 안 되지 않나?”

눈썹이 짙은 서생이 비꼬는 말투로 반박했다.

“내 생각에는 여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주인 없는 틈을 타서 조정이 섭가의 재산을 갈취하려 그런 거네. 그런데 갑자기 섭가의 후계자가 나타났으니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지.”

“당황할 게 뭐가 있겠는가?”

“폐하는 범 제사가 황실 금고를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런데 황실 금고 재산은 원래 범 제사의 것이었으니 관리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거지.”

“황실 금고를 범 제사가 관리한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냉소를 지었다.

“이 일로 범 제사도 화를 면치 못하겠구먼.”

그때 주인장이 식은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손님들 목소리를 낮춰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감찰원 관리들 귀에 들어가면 저희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평소 손님을 거의 상대하지 않는 일석거 주인장은 오늘 오랜만에 가게에 나와 서로 잘 아는 손님들과 인사하는 중이었다. 사실 그는 주변을 살펴보며 남몰래 술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서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석거는 몰락할 위기에 처한 최씨 집안이 운영하는 곳인 만큼 범한의 소문에 관심이 많았다. 최씨 집안 사람들은 철천지원수인 범 제사의 출생과 관련된 소문이 들리자 남몰래 기뻐하며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조정이 섭가 자산을 강제로 몰수했다고 말한 젊은 청년이 술에 취해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듯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주인장은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시오? 감찰원이 천하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설사 감찰원이 그러려 해도 폐하께서 용인하지 않으실 거요. 어제 감찰원에 잡혀갔던 사람들도 오늘 보니 멀쩡하게 돌아왔더구려. 잡담을 나누는 게 경국 법률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니 잡아가도 멀쩡하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거지.”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낭패를 본 사람은 범 제사네. 만약 자신이 정말 섭가의 후손이라면 벼슬길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실 자신의 생각을 모두 털어놓은 대화는 아니었다. 백주에 술집에서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모두 털어놓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조정이 범한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일단 관직을 모두 빼앗은 다음 목숨을 빼앗을 거라고 생각했다.

“범씨 집안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범 상서는 몇 년 동안 호부를 관리해 왔고 유능한 관리라 명성이 자자하니 예전 일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지는 않겠지?”

소문이 경도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경도 사람들은 범한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호부 상서 범건이 어떻게 신비한 섭가 여사장과 관계를 맺어 자식까지 낳았는지도 궁금했다. 범 상서가 과거 유정강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당시 천하에서 가장 부유했던 섭가 여사장까지 꾀어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반면 소문이 퍼지는 과정에서 명문가 규수와 가난한 집 여식들은 범 상서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소문대로라면 당시 낮은 관직에만 머물러 있던 범건은 섭가가 모반이라는 대죄로 몰락하자 자신과 여사장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지키려 모험을 강행한 셈이었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황실의 눈을 피해 자식을 몰래 키워 온 범건의 이야기는 연애 소설의 인기 있는 소재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범건이 범한을 16년 동안 담주에서 키운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감찰원 8처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 소문의 정확성이 아주 높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범한이 감찰원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 있었지만 진평평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람들의 입을 강제로 닫게 하지 못했고 한담하길 좋아하는 경도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둘 줄도 몰랐다. 그냥 아연실색한 얼굴로 소문이 갈수록 커지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어제 체포된 사람이 오늘 무사히 돌아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은 범 제사가 억지로 소문을 막으려 한 일을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미래는커녕 죽을지 살지조차 알 수 없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지난 2년 동안 범한은 경국에서 좋은 명성을 쌓은 데다가 나라 안팎에서 나라의 체면을 세워 주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가 당시 모반을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섭가? 섭가가 뭡니까?”

이때 술집에서 젊은 청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참 동안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음에도 그는 작은 범 대인이 섭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니 경국 사람 중 당시 찬란한 명성을 떨치던 섭가를 잊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섭가를 모른단 말인가?”

나이 먹은 사람들은 무시하는 눈빛으로 젊은이를 바라보며 수염도 아직 자라지 않은 나이라면 섭가를 모를 수도 있으니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섭가는 과거 장사로 천하를 주름잡았던 곳이네.”

중년 사내가 지난날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유리를 만들어서 은을 받고 팔던 곳이 섭가야.”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연해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 비누, 향수를 파는 곳이 섭가네. 참, 향수는 생산이 중단되었으니 자네는 뭔지 잘 모르겠구먼.”

“유일하게 섭가만이 독한 술을 만들어 낼 줄 알았지.”

또 다른 사람이 보충해서 설명했다.

“당시 섭가는 조정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무기를 제공했네.”

“황실의 금고가 아니고요? 경국 조정에서 매년 대량의 돈을 주고 그곳에서 무기를 가져온단 말입니까?”

중년 남자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북제, 동이성, 심지어 더 멀리 있는 해외에서까지 돈을 벌어 오는 황실의 금고가 원래 섭가였단 말이네!”

질문한 젊은 청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나, 정말 대단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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