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장 공주가 어쩔 것 같으냐고?”
범건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만약 영리하다면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겠지.”
“왜 그럴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폐하의 생각 때문이란다.”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은 잠시 뒤 범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황제는 자신이 가진 출생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황제가 어떤 계획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지금 자신이 가진 계획을 드러낼 생각은 없을 터. 그러니 이 사실을 들은 황제는 범한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놀라고 나중에는 분노와 초조함을 느낄 게 분명했다.
황제는 범한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손에 쥐고 흔들기를 좋아했기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 발생하는 걸 싫어했다. 그리고 분노한 황제가 맨 처음 지시할 일은 비밀을 누설한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 공주가 요란법석을 떨며 범한을 공격하려 한다면 황제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범한을 보호할 것이고 장 공주에 대한 미움도 더욱 커질 게 분명했다.
범건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아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는 감찰원 제사이고 또 최근 반년 동안 충분한 권력을 손에 넣지 않았니. 담주에 있던 네가 경도로 온 뒤 나와 진 원장은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네가 설 바닥을 견고하게 다져 주었다. 이미 상당한 기반을 쌓았는데도 이런 사소한 풍파를 두려워하다니. 이런 풍파는 네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범한은 마음속에 또 다른 걱정이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은 상당히 시끄러워지겠지만 황실은 두려워할 것 없다. 이 일을 알게 된 뒤 황태후와 폐하께서 백성들을 의식해 이틀 정도 너에게 냉담하게 대할 수는 있겠지.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결국 폐하의 태도에 달렸어.”
어떤 일이든 치밀한 계략을 세우는 호부 상서 범건이 마지막으로 덧붙여 설명했다.
“현공 사당 검수 사건을 계기로 폐하께서 너를 신뢰하게 되었으니 네 편에 서주실 거야. 네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고 폐하께서 항상 너의 공로를 염두에 두고 계시니 황족의 이익, 황후와 황태자, 심지어 장 공주와 황태후의 압력보다도 너를 먼저 생각해 주실 거다. 즉 네가 폐하에게 날아오는 검을 막았듯이 폐하도 너를 대신에 풍파를 잠재워 주실 거란 말이다.”
범건이 냉소를 지으며 아들을 바라봤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인 거다. 만약 몇 년이 지난 뒤 이런 일이 터졌다면 그때는 이미 폐하의 고마운 마음이 식었을 테니 도움을 받기도 힘들겠지. 그러니 이왕 밝혀질 거면 며칠 안에 밝혀지는 게 나아. 일러서도 안 되고 늦어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시기.
이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보던 범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 일로 인해서 집안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될 뿐입니다.”
범씨 집안이 섭가의 후손을 받아들인 건 황제의 계획이었지만 황제는 분명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모든 책임은 범씨 집안이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범건이 천천히 두 눈을 감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보 같은 놈. 네게 타격을 주지 못할 일로 이 아비가 타격을 입을 것 같으냐? 조정에서 나를 공격하려면 먼저 네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밝혀야 하지 않겠니?”
그 말을 들은 범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버지 말씀은 밖에서 뭐라 떠들든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이 사실을 누가 증명할 수 있겠니?”
범건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하자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저는 이 기회를 빌려서······.”
“이 기회를 빌려서 섭가 사건을 바로잡겠다고?”
범건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아까 초조해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걸 다시 밝혀서 뭘 하려고 그러니? 그건 십여 년 전에 폐하께서 이미 정리하신 일이야.”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제가 섭가의 후손이란 게 밝혀지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범한이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장 공주와 남다른 포부를 가진 사람들이 이 사실을 통해 자신이 황가의 혈통이라는 걸 알아낼까 봐서였다. 이 말을 하려던 그는 앞에 앉아 있는 범건을 보고는 애써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자신과 황제의 관계에 대해 범한은 범건과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두 부자는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현재의 화목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범건 역시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진 끝에 범건이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네 마음속에 깊이 숨겨 두도록 해라. 다른 사람이 알아채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니? 이 아······ 아비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진 원장은 이런 일이 생기기를 줄곧 바라 왔을 거다. 그러니 그는 아마 경도에 소문이 퍼지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퍼지는 걸 단속하는 방식으로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드러내 세상 사람들이 네 정체를 궁금해하게 만들 거야.”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속으로 아버지의 추측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절름발이 노인이라면 분명 그런 방법을 동원하겠지. 섭가 후손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단속해 경국 백성들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게 만든다니 실로 교묘한 방법이 아닐 수 없어. 다만 내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진평평 대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런저런 고민에 피곤해진 범한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나와 진 원장은 생각이 늘 달라서 네 문제를 가지고도 오랜 시간 의견이 충돌했었어. 그래서 나는 진 원장을 믿지 않고 진 원장도 나를 믿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두 사람 모두 너는 신뢰하고 있단다.”
그가 아들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너를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끌어들인 걸 보면 결국에는 그가 이긴 것 같구나. 그래서 나는 이 일도 그가 꾸민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으면 북제에서 어떻게 네가 섭가의 후손인 걸 알았겠니. 물론 그렇다고 해도 네가 걱정할 건 없어. 지금쯤이면 진 원장이 입궁해 너를 대신해 계획을 세우고 있을 테니까.”
이후 두 부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던 중 범한이 뜬금없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무런 맥락도 없는 사죄이자 이유도 알 수 없는 사죄였다. 범건이 바라던 평안한 삶을 버리고 감찰원을 손에 넣고 권력 쟁탈의 길에 들어선 게 죄송하다는 거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가진 출생의 비밀 때문에 범씨 집안을 알 수 없는 위험에 빠뜨려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보이는 죄스러움이었을까.
어쩌면······ 죄송하다는 것은 자신은 진정한 아들이 되고 싶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은 게 죄송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 * *
범 상서는 진평평이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폭로할 가장 좋은 시기를 만들려고 일부러 범한이 황제를 구하다가 중상을 입도록 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한편 이때 진평평은 깊은 황궁 안에서 갑자기 이 일을 들춰내려는 사람이 누군지 추측하고 있었다.
정치가라면 모름지기 허울뿐인 명분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범한이 행복할 수 있도록 손에 권력을 쥐여 주는 일에만 열중할 뿐 범한이 섭가의 후손으로 정정당당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저와 범건, 범건의 어머니, 폐하, 비개만 아는 사실입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의 메마른 목소리가 어서방에 울려 퍼졌다.
“폐하께서 황태후가 춘시 이후 이 일을 알아챘다고 말씀하셨으니 총 여섯 명이 아는 것이군요. 소신이 보기에 이 여섯 명 중에서 사실을 누설할 사람은 없습니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평상시 맑고 고요하던 눈동자가 오늘은 분노로 가득 차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매서워 보였다.
“아무도 누설하지 않았다면 그 북제 사람은 어떻게 알았다는 것이냐!”
춘시 사건으로 인해서 범한은 감찰원 제사 신분이 드러나면서 경국 젊은 관리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실 금고를 장악하게 된다면 그의 권위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에까지 오르게 될 게 분명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어떠한 사실도 추측해 내지 못하겠지만 깊은 황궁 안에 있는 황태후는 달랐다. 그녀는 오랜 시간 황궁에서 나랏일을 보고 음모를 접하면서 정치적 촉감이 누구보다도 예리했다. 그런 그녀가 춘시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강력하게 추궁하자 황제도 어쩔 수 없이 범한이 자신의 서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황태후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놀랐지만 결국에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과거 그 ‘요사스러운 여자’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건 사실이지만 황가의 핏줄에게는 항상 포용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북제 사람이 스스로 추측해 낸 것 같습니다.”
진평평은 자신이 사실에 가장 근접한 추측을 해냈다는 걸 모른 채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고하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건가? 북제 국사가 자신의 머리를 이용해 이런 추측을 해낼 수 있다고?”
황제의 반박에 진평평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사실 장 공주마마가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범한이 지금 이 말을 엿들었다면 일거양득이라며 감탄했을 거다.
황태후는 범한이 섭가의 후손인 걸 알았고 장 공주는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다. 과거 장 공주는 손바닥 뒤집듯 언빙운을 북제에 팔아 버렸고, 몰래 북제 대가 장묵한과 내통해 거래했으며, 북제 황태후와 긴밀히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황실 금고 상품을 밀수해 북제 백성들에게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그녀는 황실 금고의 권한을 넘겨주기 싫다는 이유로 범한을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있었고 검수을 이용해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 적도 있었다.
이는 황제 역시 아는 사실이었다. 이런 부분들을 종합해 봤을 때 장 공주는 이 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고 북제는 그녀가 남몰래 폭로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녀는 누구보다도 큰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평평은 심사숙고한 뒤 조심스럽게 이 말을 꺼냈다. 만약 구체적인 정황이 없었다면 그는 황실에 북제와 결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해 황제가 신양에 있는 여동생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근거 없이 장 공주의 이름을 들먹인다면 황제가 그의 의도를 의심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이처럼 직접 장 공주의 이름을 말한 것은 첫 번째로 그녀에게 가장 큰 동기나 혐의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이 순수한 충성심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의도를 의심받을 걸 알면서도 폐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황제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민했다.
“운예는 안지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건 알아도······ 내 혈육이란 건 모르는 것 같소. 알았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겠지.”
황태후가 이 사실을 장 공주에게 알려 줬다고 하더라도 장 공주는 범한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그건 범한이 아니라 황제를 겨냥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말을 들은 진평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장 공주라고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잠시 뒤 황제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운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고 보도록 하지.”
만약 장 공주의 계획이라면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퍼진 뒤 상서를 올려 황제에게 조심하라고 간언하거나 심지어는 범한을 죽이고 범씨 가문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할 터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으시겠습니까?”
진평평이 마른기침을 했다. 입궁을 서두르는 바람에 머리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해 헝클어진 모습이 더욱 늙어 보였다.
황제가 그를 힐끗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짐도 영광스러운 삶을 산 것 같은데 장년의 나이에 이렇게 고독한 삶을 살게 될 줄은 몰랐소. 자네와 범건을 제외하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