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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34화 (334/1,108)

334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범한은 손으로 굳은 양 볼을 문지르며 갑작스럽게 날아든 소식에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고하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으며 공개할 예정이니 얼른 대비책을 세우라는 거였다.

그는 고하가 어떻게 자신과 섭가의 관계를 알아냈는지 추측할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는 앞으로 닥칠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며칠이면 북제에 자신과 섭가의 관계가 소문날 것이고 늦어도 열흘 이내에 경도 거리와 골목에도 이 소식이 전해질 터였다.

이렇게 소문이 퍼져도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북제에서도 유언비어라고 딱 잡아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말은 사람을 죽일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은 경도에 온 뒤 자신의 수상한 행적들을 파기 시작할 것이고 점점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게 될 터였다.

더구나 이건 원래 사실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기묘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범한이 섭가와 관계가 있을 거라 의심하지 않았지만 일단 소문이 퍼진다면 의심의 씨앗이 모두의 마음속에 심어질 것이다. 그 씨앗은 점점 자라나 사람들의 마음을 점거할 테고 어느덧 소문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로 받아들여질 게 뻔했다.

당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 황궁 사람들, 자신과 이익이 충돌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섭가의 후손이란 소문에 화들짝 놀라겠지만 누구보다도 사실이라 믿을 게 분명했다.

다만 이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지 모를 뿐이었다.

갈증을 느낀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책상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어 곧장 입에다 부었다. 사천립이 계속 보충해 데운 뜨거운 찻물이 입으로 들어오자 그는 찻주전자를 바닥에 던지고는 욕을 퍼부었다.

쨍! 소리와 함께 도자기 찻주전자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실 그는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비밀을 누군가가 들출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하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내가 섭경미의 아들이라고 외칠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밝혀지는 건 곤란했다.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준비되기 전에 이 사실이 경도에 알려진다면 자신은 예측할 수 없는 강한 위협과 충격을 받을 게 분명했고 어떤 파장이 불어닥칠지 알 수 없었다. 범한은 이처럼 자신이 주도할 수 없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고 상황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했다.

이게 바로 지금 그가 분노하는 이유였다.

도자기 파편을 밟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열려 있는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삭막한 설원을 바라보며 여러 번 차가운 공기를 들이쉰 그는 마침내 대비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깨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여종들은 범한의 화난 표정이 무서워 감히 안으로 들어가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범한이 고개를 저어 여종들을 물러가게 한 뒤 이전처럼 손으로 편지들을 갈가리 찢으려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편지지는 구겨지기만 할 뿐 찢을 수는 없었다.

당황한 범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해당타타의 편지에 적힌 놀라운 사실이 자신의 몸에 정기가 사라졌다는 상황까지 잊게 했던 것이다.

복도를 돌아 별장에서 가장 조용한 방 앞에 도달한 범한은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 환약을 만들고 있던 비개가 피곤함에 전 얼굴로 제자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범한이 스승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스승님, 큰일 났습니다.”

비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는 제자가 저렇게 당황한 거지?’라고 생각했다. 이후 해당타타가 전해 준 소식을 들은 비개는 범한보다도 더 당황해서는 약 가루가 잔뜩 묻은 두 손으로 산발이 된 머리를 줴뜯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광경을 보던 범한은 남몰래 한숨을 쉬며 아무리 급해도 스승님을 찾아온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비개는 독살에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상황을 판단하고 음모를 꾸미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당장 산에서 내려가야겠다.”

“당장 산에서 내려가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는 곧장 서로의 생각을 알아챘다. 가늘게 뜬 비개의 갈색 눈동자에는 살의가 드러났다.

“나는 진원으로 갈 테니 너는 상서 대인을 찾아가거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두 사람 모두 경도에 있는 두 명의 늙은 여우를 생각해 낸 것이다. 범한이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들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떠나려 할 때 비개가 갑자기 말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비개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음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 두려워할 필요 없단 말이다. 십여 년 전 일이 다시 재현되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독으로 수만 명은 죽일 수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들 수 있겠니?”

두 사람이 사람들을 독살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범한은 진저리를 쳤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생각만 해도 섬뜩한 장면이었다.

별장 안에 있는 여인들의 배웅을 받을 겨를이 없었기에 수를 놓고 있던 사사의 배웅만 받은 채 범한과 비개는 두 대의 마차에 각각 올라탔다. 마차들은 바닥에 깔린 얼음을 부수고 얼어붙은 길을 미끄러지듯 힘겹게 눈 덮인 산에서 내려왔다. 6처 검수들은 두 사람을 따라 내려왔고 고달을 비롯한 호위들은 산에 머무르면서 남은 사람들을 경호했다.

저녁 무렵 비개가 탄 마차가 엄격한 호위를 받으며 경도 교외에 있는 황실 행궁보다 화려한 장원에 도착했다.

“비개 대인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비개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리자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생각에 물었다.

잠시 뒤 장원 안에 등불이 켜지고 비개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이 굳은 표정으로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입궁한다.”

부하에게 명령한 진평평이 갑자기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별일도 아닌 일로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비개가 차가운 손을 비비며 반박했다.

“이게 큰일이 아니면 뭐가 큰일입니까?”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의 손잡이를 만지며 놀리듯 말했다.

“자네야 매일 약을 제조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이해하지 못한다고 치지만 범한까지 호들갑을 떠는 건 좀 실망스럽군. 조금만 생각해 봐도 별일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하긴 이 일로 심리적 압박을 오래 받아 왔으니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할 수도 있겠지.”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내달린 마차는 얼마 뒤 경도성 성문에 진입했다. 지금은 성문이 닫힌 시간이었지만 경도 수비를 책임진 진씨 집안도 감찰원 원장 대인이 경도에 들어가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마차가 황궁에 도착하자 진평평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건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네.”

비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감찰원에 가서 8처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있겠습니다.”

황궁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진평평은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언제든지 입궁해 보고할 권한이 있었다. 귀에 익은 소리를 듣던 진평평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소식이 경도에 전해진 뒤 이틀은 퍼지는 걸 막아야 하네. 그래야 감찰원에서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 않겠나. 그래도 범한의 배경을 드러내기에······ 이번이 가장 좋은 기회이네.”

서재 안에서 경국 호부 상서 범건이 꽈리 열매로 만든 음료를 마시며 범한을 바라보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구나.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기에 나는 네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이 소식이 경도에 전해지면 어찌합니까?”

잠시 아무 말 없이 부친의 두 눈을 바라보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동안 이 사실을 숨긴 이유는 제 정체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범건이 맑은 두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너는 여기 있지 않으냐. 그것도 아주 어여쁜 모습으로 말이다. 너와 섭가의 관계를 영원히 감출 수는 없어. 그리고 만약 밝혀야 한다면 내가 보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인 것 같다.”

“가장 좋은 시기라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범한은 아버지의 침착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를 본 뒤 줄곧 이어졌던 초조함이 사라지자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띠며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목발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상처를 조심해야지.”

그 모습을 본 범건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범한은 미소 지으며 가슴에 난 상처를 문질렀다. 아직은 약간 통증이 느껴졌지만 최근 비개가 옆에서 뛰어난 의술 솜씨로 돌봐준 덕분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네가 무서워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 봐라.”

범건이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항상 근엄한 상서 대인의 모습이던 그는 이미 모든 계산이 끝난 듯 초연했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범한은 양미간을 찌푸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이 평소와는 다르게 허둥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도대체 뭐가 무섭기에 이성까지 잃었던 걸까?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이 사실이 퍼져 나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시작할 것이고 황궁에서도 제 정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를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냐?”

범건이 냉소를 머금었다.

“설마 황궁에서 네 정체를 지금까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범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황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황태후 쪽도······ 지난번 동짓날 양고기 연회에서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사실을 모르는 건 평범한 일반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천하 사람들을 속이고 싶어 합니다. 만약 더는 숨기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상황에 변화가 오겠지요.”

범한이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게다가 황후가 제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녀와 섭가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원한 관계가 아닙니까.”

범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후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유사 이래 가장 세력이 약한 황후니까. 네가 고려해야 할 것은 동궁 황태자가 황후의 말에 따라 너와 대적할 경우다.”

황후의 가족 세력은 십몇 년 전 경도 피의 달 때 경국 황제의 손에 모조리 제거되었다. 줄곧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범건은 당시 가장 큰 역할을 했었기에 황후가 어떤 힘도 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

범건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황태자는 총명한 사람이다. 네가 지금의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한 황태자는 너와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할 테니 예전 일을 들먹이며 너는 건들지는 않을 거다.”

범한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고민하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장 공주는 어쩔 것 같습니까?”

섭가의 재산이 경국 황실의 호주머니에 들어가 지금의 황실 금고가 되었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당시 정부는 천하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섭가를 강제로 인수하기 위해 모반과 같은 명분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지금 섭가의 후손이 나타난다면 당시의 여죄를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설사 조사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황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섭가의 후손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할 터.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이었다.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란 소식이 알려진다면 장 공주는 분명 이 사실을 이용해 황실에 상응하는 대응을 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었다. 섭가의 재산을 수탈한 일은 황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므로 범한이 이 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벼락출세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물론 범한은 자신이 가진 또 다른 출생의 비밀 때문에 황궁에 있는 모자는 자신을 죽일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안다면 그들은 자신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터. 다만 화가 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거였다.

만약 황궁에서 오랜 시간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면 범한을 단순하게 섭가의 후손으로만 대우한 뒤 여론으로 압박해 범한이 황실 금고와······ 감찰원을 내려놓게 만들 수 있었다. 이미 무수히 많은 원수에게 둘러싸여 있는 범한으로서는 손에 쥔 권력을 잃는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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