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장 공주는 정말 대단한 여인이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그녀가 동궁을 돕고 있다고 생각할 뿐 2 황자 저하와 손을 잡았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나신 장인어른과 같이 장 공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2 황자의 편에 서서 동궁과 척을 졌었어. 만약 이런 상황을 7, 8년 정도 유지하고 폐하께서 연로해지셨다면 2 황자가 동궁을 완전히 누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스승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상황을 간파해 내시지 않았습니까.”
제자의 아첨에 범한이 겸손을 떨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네. 자네는 폐하와 진 원장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가?”
사천립이 놀란 표정을 짓자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장 공주가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분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하네. 나는 그분들의 장기짝에 지나지 않아. 아마 폐하께서는······ 황태후마마가 화를 내시는 게 싫어 그리하셨겠지.”
그가 머리를 살짝 돌려 유리창 너머 온통 하얀 설산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지금은 경도에 안 계신 장인어른이네.”
줄곧 스승님이 상서 대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생각해 온 사천립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장인어른은 간사한 재상이라 불렸지만 보기 드물게 여러 방면에서 유능했던 사람이네. 경국이 지난 몇 년 동안 약간의 소란을 제외하면 대체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인어른의 능력 덕분이었네. 내가 장인어른을 존경하는 이유는 참을 때는 끝까지 참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줄 알기 때문이야. 장 공주로 인해서 둘째 아들이 사고검의 손이 죽었을 때도 장인어른은 망설임 없이 나와 완아의 혼사를 허락해 감찰원과 부친의 편에 서셨네. 지난 몇 년 동안 조정 안에서 끊임없이 진 원장이나 아버지와 다투셨던 분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어디 쉬우셨겠나. 중요한 상황에서 개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긴 탄식을 내뱉었다.
“게다가 장인어른은 재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주변 상황이 달라지자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셨네. 본인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조금의 미련도 없이 손에 있던 권력을 포기하신 거지.”
범한의 장인인 재상 임약보는 사직을 청한 뒤 오주에서 풍족한 노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경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최근에는 경도에 있을 때보다 건강도 더 좋아져서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사람을 알기는 쉽지만 자신을 알기는 어려운 법이네.”
범한이 감탄하며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과 자신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시기와 세력의 변화까지 냉정하게 판단한 장인어른의 능력은 배울 만하네.”
사천립은 아직 재상직이 비어 있어 문하중서들이 협력해 정사를 돕고 있는 걸 떠올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재상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질타했다.
“은근슬쩍 떠보지 말게나. 나는 그런 자리에는 관심도 없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생선 굽는 일처럼 간단한 줄 아는가. 앞으로 폐하의 뜻대로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잘 관리하는 것 말고 다른 건 할 생각이 없네.”
사천립이 웃으며 말했다.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관리하는 것도 일반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자네도 장인어른이 사직하신 뒤에 폐하께서 재상을 비워 두신 걸 알고 있겠지.”
범한은 일어나서 목발을 짚으며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문을 열고 설원에서 불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셨다.
“그런데 노령으로 퇴직한 문서각 호 선생이 폐하의 부름을 받고 경도로 돌아왔다고 하더군.”
사천립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느 호 선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 선생이 여러 명이던가?”
범한은 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서서 말했다.
“자네와 내가 개구쟁이이던 시절에 문학 개선에 힘을 쓰셨던 호 선생 말이네. 폐하께서 경도로 불러 대학사에 임명하신 뒤 나중에 문하중서가 되었다고 하더군. 이부 상서 안행서의 자리는 공석이고 진항도 경도 수비를 하러 갔으니 문하중서가······ 대학사 몇 명을 이끌고 재상직을 차지할 수도 있겠지.”
놀란 얼굴로 잠자코 있던 사천립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전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조정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된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조정 일은 외부인은 절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군요.”
그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들은 내용은 외부에 전할 수 없는 것들이라서 태학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 스승이 알려 준 이야기를 잘 기억한 뒤 수십 년이 지나서 역사책에 쓰거나 《반한재 주인의 산거필기》를 쓴다면 자신은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스승님은 역사의 승리자로 남을 것이었다.
사천립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주시하고 있는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는 진 원장의 나이가 폐하보다 적다는 걸 아는가?”
그 말에 사천립은 화들짝 놀랐다. 그가 멀리서 봤던 진평평의 모습은 당장 무덤에 들어가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노쇠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한창 장년인 폐하보다도 젊다고?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진 원장이 폐하보다 한 달 늦게 태어났네. 조정 일이 복잡해서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그래서 나도 나중에 그렇게 늙지 않을까 걱정이네.”
창밖에는 설원이 펼쳐져 있고 복도 기둥 끝에서는 마작 두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북제에 있는 범사철을 제외하고 유가 군주와 정주에 있던 섭령아까지 와서 창산 별장은 작년처럼 시끌벅적했다.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는 범한의 모습은 집 안에 풍기는 즐거운 분위기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도 개똥 같은 조정 안에서 진평평처럼 황제를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사람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손에 어떤 패가 들려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다른 사람이 가진 비장의 카드가 뭔지 모르는 이상 자신이 가진 비장의 카드를 절대 꺼내지 않았다.
사박사박 소리가 들리더니 검을 비옷을 입은 등자경이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 할 때였다. 열린 창문에서 범 제사의 손이 불쑥 나오더니 이리 오라는 표시를 했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로 다가가 작게 말했다.
“퇴각한 신양 사람을 진 원장이 종추를 보내 뒤쫓고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추는 왕계년만큼 추격에 뛰어났기에 범한은 그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등자월이 들고 있는 종이 가방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종이 가방 안에는 3처에서 작성한 정보 분석 자료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러자 등자월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북제에서 보낸 편지도 있습니다.”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범한이 뜻을 이해하고는 웃으며 타박했다.
“사내대장부가 아녀자들처럼 수다스러워서 되겠는가.”
등자월이 종이 가방을 건네주고는 입을 가리고 떠나자 범한은 웃으며 익살맞은 모습으로 떠나는 부하를 바라봤다.
범한은 경도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사천립을 내쫓은 뒤 종이 가방의 봉랍을 뜯었다.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편지들 사이에서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가 보였다. 조금 전 등자월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감찰원 봉랍은 송진에 진사를 섞어 사용하기 때문에 등불에 그을릴 필요가 없어 안정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편지 봉투를 틈 없이 메워서 누가 몰래 열어 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범한은 먼저 경도 계년조의 소식을 훑어본 뒤 3처가 작성한 각처의 정보를 살펴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 처의 일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언빙운이 최씨 집안이 대처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강남에까지 퍼지면서 최씨 집안의 사돈인 명가는 재산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감찰원 보고서를 모두 검토한 그는 마지막으로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를 꺼냈다.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적인 일은 나중에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그는 항상 이와 같은 순서로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다름없이 해당타타의 편지를 읽은 뒤 그는 늦게 본 걸 후회했다.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그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편지에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범한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얇은 편지지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는 내용은 간단했고 문장은 고리타분하지 않은 금문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안지, 잘 지냈습니까? 지난번에 보낸 편지는 잘 받았어요. 경국의 우편망은 정말 빠르고 편리하군요. 한 달 걸릴 게 열흘이면 도착하니 말이에요. 이전 편지에서 경도가 초겨울이라고 했을 때 상경은 이미 눈이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려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어요.’
‘제가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지 옆에 사람이 있거나 봄과 가을에는 잠에 쉽게 들고 또 겨울에는 잠자는 걸 좋아해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눈이 펄펄 내려 청록색이던 세상이 무미건조한 하얀색으로 뒤덮이면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푸른 잎사귀나 가까이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꽃이 없잖아요. 더구나 작은 정원에 매화꽃 몇 송이가 피어 있기는 하지만 올해는 작년보다 추워서 그런지 얼어 버려서 감상할 마음이 나지 않아요.’
‘이전에 보았던 당나귀는 팔았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맷돌은 뚱보가 갈고 있으니까요. 콩이 얼마 없어도 매일 쉰 번씩 돌리고 있어요. 당나귀를 판 돈으로 대나무 숯을 사서 집 안에 두었어요. 그리고 대인이 통풍이 잘되지 않아 독에 중독되기 쉽다고 해서 보내 준 도면대로 굴뚝을 만들었더니 집 안 공기가 훨씬 좋아졌어요.’
‘참, 지난 편지에서 물어본 오리들은 이미 다 자라긴 했지만 얼어 죽을 수 있어 집 안에서 키우고 있어요. 악취가 좀 나기는 하지만 대인도 알다시피 제게는 부릴 하인이 있잖아요? 매일 깨끗하게 청소시켜서 그럭저럭 참을 만해요.’
‘왕 대인이 몇 번 이곳에 와서 저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요청했지만 왕 대인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말에 거절했어요. 대인도 아시다시피 저는 사람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고 술에 취한 모습을 보는 건 더 좋아하거든요.’
‘반년 전에 백세송거에서 대인이 술에 취해 《홍루몽》에 나오는 ‘조상님의 은덕’을 불렀을 때 정말 듣기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며칠 전에 스승님 앞에서 불렀는데 스승님도 무척 좋아하시면서 가교저의 불쌍한 신세에서 이상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셨어요. 밖에 눈이 많아 와서 집 안까지 한기가 들이치던 날 스승님과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몇 개월 전에 대인과 함께 상경에서 놀던 날이 생각나더군요. 대인이 밝은 달을 보며 즐거워했던 모습과 작은 사당과 논두렁 말이에요. 대인은 논두렁 안에서 난처해하며 헐레벌떡 논두렁 밖으로 뛰어나오셨죠.’
‘맞다,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요. 소은 대인의 시신은 서산 절벽 사이에서 발견되었어요. 이미 장례를 치르긴 했지만 대인은 소은 대인을 압송한 사람인 만큼 안심할 수 있게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범한은 해당타타의 말에 많은 암시가 들어 있다는 생각에 기괴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우가 압박과 착취를 당하며 불쌍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실소가 터졌지만 그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어서는 자신에게 천일도 심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해당타타가 진짜 전하려 하는 이야기를 추측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을 곰곰이 음미해 보던 그는 소은의 시신을 찾았다는 내용과 고하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글귀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특히 ‘가교저의 불쌍한 신세에서 이상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셨어요.’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밝은 달, 작은 사당, 논두렁이 적힌 부분을 여러 번 읽어 봤다. 편지 내용과 맞지 않는 내용인 데다가 앞뒤 문장이 약간 억지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해당타타가 말하는 이때는 범한으로서는 일생에서 가장 낭패스러운 상황이었다. 당시 춘약에 중독되었던 그가 바지를 움켜쥐고 도망치듯 사당에서 뛰쳐나왔을 때 이따금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고 밭 진흙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것이······ 바로 해당타타가 자신에게 알려 주려는 정보였다.
“논두렁 안에서 논두렁 밖으로 뛰어나왔다고?”
미간을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밝은 달이나 사당 같이 쓸모없는 글자들을 제거한 뒤 남은 마지막 문장. 범한에게 이런 수수께끼는 실로 간단한 거였다.
‘논두렁 안이면 밭이잖아. 밭 안에서 밖으로 뛰어나왔다면 ‘古’ 자를 말하는 건가? 아냐, 땅을 뜻하는 자를 말하는 걸 수 있어! 땅을 뜻하는 자가 ‘地’ 그리고 ‘葉’이 있었지. 땅 지는 아니고. 엽 자라면······ 연잎 할 때 쓰는 잎 엽 자인데······. 책 접 그리고 땅 이름 섭, 그러고 보니 섭은 성씨로 쓰기도 했지. ‘葉’를 성으로 쓰면 섭씨. 그래, 이건 섭씨인 내 어머니 섭경미를 지칭하는 거야.’
편지지를 쥐고 있던 범한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문득 편지에 적힌 《홍루몽》 가교저의 신세를 언급하며 이상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이 생각나면서 그는 마침내 해당타타가 자신에게 뭘 말하려는지 이해했다.
고하는 자신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