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이 세상에는 만인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귀신들도 얻으려면 고생해서 쟁취해야만 하는 더없이 기괴한 물건이 있다.
범씨 가문 마차에는 항상 한쪽은 네모지고 한쪽은 둥근 범씨 가문의 표식을 볼 수 있었다. 국고를 관리하는 호부 상서 범 대인에 이어 작은 범 대인 역시 강남 황실 금고를 물려받아 함께 경국의 모든 돈줄을 관리할 거라 그런지 범씨 가문의 표식에서도 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하면서도 몹시도 증오하는 돈은 우리를 천당에 보낼 수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사람을 벼랑 끝에서 바보처럼 웃게 만들거나 불바다 속에서 춤추게 하는 게 바로 돈이었다.
백성들이 돈을 좋아하듯이 조정도 돈을 좋아했기에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거둬들였다. 경국 조정은 개국 초기부터 토지에서 나는 생산물과 부역을 제외한 소금, 철, 차에 세금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조정의 가장 큰 수입원은 갑자기 나타나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다가 몰락한 섭가가 남긴 황실 금고였다. 그래서 조정은 황실 금고에서 생산하는 유리 제품, 독한 술, 장난감, 선박 등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감찰원을 통해 엄격하게 관리시켰다.
이런 점에 있어서 감찰원이 밝혀낸 최씨 집안 밀수 사건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그제야 경국 사람들은 황실 금고 관리에 문제가 있어 조정이 세금에서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도찰원은 침묵을 유지했고 신양에게 매수된 관리들도 침묵했다. 하지만 다른 편에 서 있거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관리들은 연이어 조정에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장 공주의 이름을 직접 거론한 상소는 없었지만 이들의 창끝은 분명 신양을 향하고 있었다.
한편 북제 젊은 황제는 이 일로 상당한 이득을 보게 되었다. 감찰원 범 제사가 요양을 핑계로 창산에 들어간 것은 사람들에게 넌지시 정보를 던진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범 제사가 내년에 황실 금고 인수를 수월하게 하려고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태학에 있는 학생 중 성격이 급한 몇몇 이들은 황실 금고 관할권을 범 제사에게 당장 넘겨줘야 한다는 상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범한은 장 공주보다 명성이 좋은 데다가 공을 세운 이력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며칠 경도 찻집에서 흥미진진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신양에 있는 그분이 분노에 이성을 잃고는 작은 범 대인을 암살하려 검수을 보냈다는 소문이었다.
감찰원 8처 역시 업무 능력이 탁월했다.
* * *
다만 모든 사람이 범한과 장 공주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일부 고결한 문인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답답함에 한숨을 지었다. 사천립과 같은 사람들이 왜 돈에 이처럼 열중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포월루 큰 사장이 되어 경도 유흥업소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그는 가난한 서생에서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장 공주가 황실 금고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사위를 죽이려 할 만큼 황실 금고가 가치 있는 것일까? 최씨 집안과 명씨 집안을 이용해 북방과 동이를 넘어 해외에까지 물건을 밀수하면서까지 황실 금고의 돈을 착복한 이유는 뭘까? 그렇게 십여 년 동안 빼돌린 돈은 도대체 어디에 사용했을까?
“군대를 양성했겠지.”
범한이 옆에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군대는 모두 폐하와 조정이 관할하고 있네. 대도독인 연소을도 움직이려면 폐하의 조서가 있어야 하지. 모두가 알다시피 군대에서 폐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위엄을 가지고 계시네. 이런 위엄에 대항하려 한다면 효과가 있을 만한 물건은 하나밖에 없지.”
말을 잠시 멈춘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말했다.
“바로 돈이네. 연소을이 자신의 병력을 손에 쥐려면 군관들에게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돈을 쥐여 줘야 하네.”
사천립이 글을 쓰던 오른손을 멈추고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가 범한을 찾아 창산에 들어온 이유는 태학의 부탁을 받아 경국을 대표하는 문신인 범한의 뜻을 알기 위해서였다. 《반한재 시집》을 발행해 경국 시단에서 견고한 지위를 확립한 범한은 북제에서 장묵한의 서적을 마차 한가득 가져오면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범한이 거중랑이자 학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태학은 그를 널리 알리는 서적을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이 책을 담박서국에서 간행해 북제와 동이성에 인재들이 본다면 경국에 춘시를 보러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범한은 창산에 들어가 한동안 태학에 오지 않았고 서무 대학사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경로를 통해서 경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범 대인의 제자인 사천립을 찾아와 부탁한 것이었다.
사천립은 태학에서 직접 찾아와 부탁한 데다가 포월루에서 기생을 관리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다행히 그는 설원에 있는 시체들을 보거나 검수들을 만나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손발이 닳도록 간청해 스승을 서재에 앉히기는 했다. 그런데 스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인생 철학이나 문인으로서의 뜻은 이야기하지는 않고 감찰원이 2 황자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나 장 공주가 황실 금고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이유와 같은 조정의 비밀들만 털어놓고 있었다.
이런 내용은 종이 위에 기록할 수도 없었고 설사 자신이 그대로 쓴다고 한들 태학에서 인쇄해 간행할 수도 없었다.
그가 스승의 눈치를 살피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스승님, 이런 일들은······ 세상에 알릴 수 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전기를 쓴다는 게 범한으로서는 너무 황당무계했다.
‘나는 아직 젊은데 태학 서생들이 내 전기를 쓴다는 게 말이 돼? 그런 건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거잖아?’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천립을 보며 웃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게!”
상스러운 욕을 한차례 퍼부은 그가 한숨을 쉬었다.
“태학은 그렇게나 할 일이 없는 건가? 장 대가가 남긴 서적은 언제 정리한다고 그러는 거지? 담박서국에서 인쇄를 기다리고 있고 폐하께서도 재촉하시는 상황이지 않은가. 폐하께서 3년 안에 정리하라고 하신 걸 자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도 밥만 축내는 것들이 쓸데없는 짓이나 벌이면서 정작 중요한 건 안 하는군.”
사천립이 우물쭈물하다가 태학을 대신해 해명했다.
“장 대가의 서적은 이미 인쇄가 시작되었습니다.”
범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전기를 쓴다는 게 너무나도 황당해서 그러네. 내가 시 몇 편 쓰고 노래 몇 번 부르고 장 대가와 두 차례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내가 정말 잘하는 건······ 사실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 아닌가.”
범한의 말에는 진실하다 못해 루소의 자기비판처럼 참회하는 듯한 느낌까지 풍겼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지 글로 세상을 노래하는 게 아니네. 이런 사실을 자네는 쓸 수 있겠나?”
범한이 사천립의 두 눈을 직시하며 계속 말했다.
“나에 대한 전기는 내가 죽은 뒤나 아니면 이 시대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 써도 늦지 않을 걸세.”
사천립이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뱉었다. 스승이 자신의 전기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더는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범한이 말한 조정의 비밀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었다.
“제가 보기에 북방에 있는 연소을 대장은 돈을 이용해 충성심을 사려 할 겁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별 이득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반년 동안 범한의 밑에 있으면서 사천립은 담주에서 온 사사처럼 담이 커져서 말도 직설적으로 하게 되었다.
“폐하께서 수를 쓸 수 없게 군대를 꽉 잡고 계시긴 하지만 장 공주에게는 연소을과 같은 심복이 있으니 은전으로 충심을 사려 하겠지.”
범한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제자의 말을 생각했다.
“군대를 양성하는 건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황실 금고에서 10년 동안 빼돌린 돈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하고도 남을 거네.”
범한이 정말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처럼 담담히 설명했다.
“2 황자가 경도 관리들을 매수하는 데도 황실 금고 돈이 들어갔고 여론을 장악하는 데도 황실 금고 돈이 들어갔네. 심지어 신양 지방 관리나 제후들과 친분을 쌓은 데도 황실 금고 돈이 사용되었지. 경국 관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면 배부르다고 할 때까지 입 안 가득 넣어 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 그러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사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반역에 해당하는 것 아닙니까.”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나. 지금 황위를 노리고 있는 2 황자가 만약 정말 성공해서 황권을 손에 쥔다면 자신과 장 공주가 사용한 돈을 다시 돌려받으려 할 거네. 아주 단순한 이치지.”
범한은 순간 《녹정기》에서 위소보가 오삼계를 농락하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황제가 되면 돈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지. 천하가 자신의 것일 텐데 그깟 돈이 아깝겠는가.”
사천립이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스승님께서 이미 최씨 집안을 무너뜨리셨고 곧 있으면 황실 금고도 받을 테니 상대측 돈줄이 끊이는 것 아닙니까? 그럼 2 황자 저하의 계획에도 상당한 차질이 생길 텐데요. 그래서 신양에서 지난번에 경도에서 파문이 일어났을 때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군요.”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반응을 보인다고? 장모님은 이미 5, 6년 전에 반응을 보이셨네.”
그는 5, 6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담주에 있었을 때 지금은 시커멓게 타버린 집에서 첫 살인을 했었다. 경도에 온 뒤 감찰원을 이용해 그 사건을 조사해 본 그는 유씨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황궁에 있는 두 여자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아냈다.
그해는 폐하가 처음으로 범씨 집안과 임씨 집안의 혼인을 언급해 황실 금고 관할권 이전 문제가 불거진 때였다. 진평평의 강력한 반대로 혼사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위기감을 느낀 장 공주는 엄청난 부를 놓지 않기 위해 범한을 죽일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4년 뒤 진평평이 고향에 내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범건이 다시 혼사를 제안해 황제의 허락을 받아 내었다. 이에 범건은 등자경을 담주로 보내 범한을 서둘려 경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범한은 아무것도 모르던 열두 살 때부터 이미 지금의 혼란을 감당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셈이다. 그는 이미 상당한 권력을 손에 쥐었음에도 당시 일을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후 외양간 거리 사건도 자신이 2 황자의 연회에 참석하는 걸 알고는 장 공주가 재상의 둘째 아들을 부추겨 자신을 살해하도록 한 것이었다.
장모는 실패했을 뿐이지 이미 여러 번 자신을 죽이려 했다. 이런 생각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살면서 겪은 위험은 대부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미모를 지닌 장 공주의 음모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 공주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일을 진행해 왔다. 이처럼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걸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그녀가 신양 사람을 동원해 자신을 암살하려 한 걸 보면 상당히 당황하고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이 자신감에 찬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낼수록 좋지. 예전처럼 침착하게 대응한다면 생각을 읽을 수가 없잖아.’
그는 신양에 있는 장 공주가 지략이 출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외양간 거리 사건을 북제 영토를 빼앗는 계기로 전환한 것이나 언빙운을 팔아 경국 조정의 어지러운 국면을 타개한 것만 봐도 장 공주의 음모 능력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점이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찰원이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음모를 꾸미는 일이었고 여기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언 공자는 장 공주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두렵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감찰원이 가진 힘 때문이었다. 이건 신양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힘은 음모자에게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