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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28화 (328/1,108)

328화

“임 대인이 최씨 집안을 대신해서 매일 홍려사에서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최씨 집안의 물건과 재물을 압수한다면 양국의 우호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버럭 화를 냈다.

“최씨 일가는 경국에서 가장 큰 밀수꾼이잖아! 내가 남쪽 오랑캐들을 대신해 잘못을 바로잡았으면 와서 감사 인사를 할 망정이지 원망을 쏟아 놓고 있다니······ 남쪽 오랑캐들은 정말이지 예의라는 걸 모르는 족속이군.”

위화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 안에 들어온 물건과 은전을 토해 내기 싫어서가 아닙니까.’

경국 사절로 북제 상경에 머무르고 있는 임문은 최씨 집안에 일이 터지자 그 속에 담긴 내막은 모른 채 자국 백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싸우고 있었다.

“사실 임 대인보다는 참사관 왕계년이 더 골치가 아픕니다.”

위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 대인은 홍려사 안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왕 대인은 매일 태상사에 달려가고 있습니다. 최씨 집안은 경국의 유명한 거상이고 관리인 만큼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태상사가 직접 폐하를 찾아가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황제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범한도 재미있는 사람이지만 심복도 참 제멋대로이군. 범한이 최씨 일가를 물어 죽이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소란을 피우는 건 아마도 범한이 깔끔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위화는 여전히 남쪽 동업자에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폐하, 만약······ 이번 일의 진상이 남쪽에 전해져서 경국 황제가 범한이 한 짓을 알게 된다면 격노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럼 황제가 다시 군대를 일으키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여름에 협상을 진행하면서 그는 범한이 온화한 문인처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뼛속까지 차갑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금의위 지휘사로 부임하는 즉시 범한을 자신의 최대의 적으로 보고 항상 그를 쓰러뜨릴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는 마침내 범한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악랄한 계책을 생각해 내었다. 이에 기쁨에 상기된 얼굴로 황제에게 찾아가 계획을 이야기했지만······ 실망스럽게도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하네.”

황제가 조소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국경에 있던 최씨 집안 물건을 짐이 갈취한들 무엇 하겠는가? 설마 짐이 그깟 상인의 돈을 탐낸다는 건가? 조정이 과거 계속 장 공주와 교분을 이어 가면서 양쪽 모두 적지 않은 이익을 누린 건 사실이네만······. 이번에 범한과 함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자네는 정말 모르는가?”

황제가 탁자에 놓인 책을 집으면서 계속 말했다.

“경국의 황실 금고는 곧 있으면 범한에게 넘어가네. 자네에게 범한의 숨통을 끊어 놓을 만한 계책이 있는 게 아니라면 예의 바르게 대하도록 하게. 그래야 범 제사가 짐이 다스리는 국가의 백성들을 위해······ 매년 편의품들을 보내 줄 게 아닌가.”

위화가 물러가자 황제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조금 전 차갑던 표정과 달리 평온한 얼굴로 나른한 허리를 쭉 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이때 출중한 미모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장막을 걷고 나오더니 지휘사 대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셨나요? 들어 보니까 범한과 관련된 것 같던데요.”

“리리, 범한이란 말에 이렇게 긴장하다니 짐이 질투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보지?”

젊은 황제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당겨 안은 뒤 귓가에 대고 말했다.

“범한이 남쪽 신양을 겨누기 시작했어. 짐은······ 살짝 협력해 주는 중이고.”

사실 살짝만 협력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최씨 집안이 일궈 놓은 북제 노선은 완전히 망가졌고 가지고 있던 물건과 은전도 금의위에게 모두 뺏겼으니 말이다. 이로써 장사로 천하를 호령하던 최씨 가문의 한쪽 손은 망가져 버렸다. 그리고 경국 내부에 걸치고 있던 한쪽 손도 일찌감치 음산하고 무서운 감찰원에 의해 잘린 상태였고.

사리리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긴장되지요. 범 제사는 저희 중매를 서주신 분 아닙니까.”

젊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의 ‘괴상한 계획’을 따른 덕분에 고하가 사리리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황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사리리 신분을 고려할 때 황궁에 입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뭘 보고 계십니까?”

사리리가 궁금해하며 황제의 손에 든 책을 뺏자 황제가 급히 도로 빼앗으며 말했다.

“범한이 짐만 보라고 《석두기》 최근 장을 보내 줬네. 천하를 통틀어 단 하나만 있는 거니 함부로 만지지 말게.”

사리리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포근히 안겼다.

“범한은 어떻게······ 자기 장모의 사람을 건들 수 있죠?”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짐보다 담이 훨씬 큰 것 같아. 게다가 남쪽 황궁은 우리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니 그 속에 담긴 내막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 * *

북제에서 가장 존귀한 강은 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와 황궁을 거쳐 상경성으로 내려가는 옥천하강이었다. 이 강은 상류로 갈수록 황궁과 가까워져서 조용했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려서 강변에 얼음 조각들이 얼어 있었고 날씨도 무척이나 추웠다. 황궁의 검은색 처마가 보이고 겨울나무들이 쭈뼛쭈뼛 서 있는 이곳에는 누가 사는지 모를 작은 정원이 있었다.

대략 열세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작은 정원 안에서 힘을 쓰고 있었다. 볼이 오동통한 소년이 이를 악물고 큰 맷돌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어찌나 힘을 썼는지 한겨울이었음에도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이지 가여운 모습이었다.

한참을 기를 쓰던 소년은 손잡이를 놓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콩이 없다고! 왜 비어 있는 맷돌을 갈라는 거야! 당나귀 살 돈도 없어? 당나귀 사서 갈아!”

그러나 정작 그를 화가 나게 한 사람은 한가롭게 두꺼운 이불을 깐 의자에 누워 멍한 표정으로 눈이 내리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밖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하품하며 일어났다.

“오늘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콩을 어디서 사라는 거야? 게다가 네가 있는데······ 당나귀가 왜 필요하지? 당나귀는 며칠 전에 팔았고 작은 정원에는 닭이랑 오리밖에 없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려면 돈이 필요하단 말이야.”

서로 맞지 않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북제로 쫓겨난 범사철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북제 젊은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해당타타 낭자였다.

해당타타는 꽃무늬가 그려진 솜저고리를 입고 양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미소를 지으며 범사철을 바라봤다.

“네 형이 며칠 전 편지에서 너를 잘 교육하라고 써서 보내왔어.”

그 말을 들은 범사철은 정말이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상경에 도착하고 며칠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고는 저 촌스러운 시골 처녀가 시키는 대로 막일을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아도 그녀가 어디론가 보내 버렸다.

범사철은 몇 번이고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명성도 높고 무공도 강하고 생각도 민첩한 그녀를 상대로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상경에서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분노와 좌절에 휩싸인 범사철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데? 뭘 가르친다는 거야?”

해당타타가 아무 말 없이 씩 웃기만 하고는 다시 누워서 두 눈을 감았다. 눈 내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잠을 잘 모양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범사철은 말을 듣지 않으면 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걸 알기에 다시 맷돌 손잡이를 잡으며 욕했다.

“생긴 건 시골 촌구석 아낙네 같아서는 형님에게 시집갈 생각을 하는 거야? 나중에 나한테 형수 소리 들을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작은 정원에 놓인 맷돌을 쉰 번 돌린 범사철이 숨을 헐떡이며 맷돌에 기대 쉬었다. 허리는 시큰하고 등은 욱신거리는 게 몸을 곧게 펼 수조차 없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서 오른 열기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면서 김이 나는 게 온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땀 닦은 뒤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동상 걸리지 말고.”

해당타타가 가지런하게 접힌 옷을 건네주며 말했다.

범사철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물었다.

“씻을 곳이 없잖아. 몸에서 땀 냄새가 나면 어떡하지?”

해당타타가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네 형이 만든 물건은 아직 상경에 도착 안 했어.”

범사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괴롭힘당하라고 형님이 나를 북제에 보낸 건 아니라고.”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는 법이지.”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예전에 황궁에서 대화할 때 범한이 했던 말이 있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했는데?”

범사철이 호기심에 물었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힘들게 하며,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게 하고 하는 일마다 안 되게 하는데, 그 이유가 참을성을 기르게 하고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사실 범한이 맹자의 이 구절을 말한 이유는 북해 갈대밭에서 춘약 때문에 고생하는 해당타타를 놀려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범사철과 해당타타는 그가 그런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땀에 젖은 머리에 차가운 바람이 불자 범사철이 덜덜 떨며 말했다.

“저녁밥······ 먹을 수 있는 거지?”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먹지 않을 거야.”

그때 작은 정원 밖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도련님,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범사철이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왕계년이 서 있었다.

낯선 타향에 와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범사철은 아는 사람을 만나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격한 그가 환호를 지르며 울타리 밖으로 달려나가려 하자 해당타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사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 해.”

해당타타의 목소리가 겨울바람을 타고 범사철의 귓가를 울리자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좌절한 표정을 지었다. 터벅터벅 울타리로 걸어간 그가 몸을 돌려 힘껏 소리쳤다.

“내가 상경에 온 건 막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야!”

이미 의자로 돌아가 누워 있던 해당타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은전 천 냥을 만 냥으로 불리기가 어디 쉬운가? 범한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거야. 그리고 잊지 마. 네 은전이 지금 나한테 있다는 걸.”

울타리 밖에서 왕계년이 범사철에게 해당타타 낭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범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해당타타에게 대들어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 눈짓을 읽은 범사철이 씩씩대며 울타리 문을 밀고 나오자 왕계년이 처마 아래 누워 있는 해당타타를 향해 인사했다.

“낭자,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해당타타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왕 대인, 최씨 집안일을 이렇게 서둘러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까?”

범 제사의 계획을 해당타타가 알고 있는 줄은 몰랐던 왕계년이 흠칫 놀라며 두 사람이 어디까지 계획을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했다.

“낭자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인지?”

범사철의 계획을 자세히 알고 있는 해당타타가 웃으며 넌지시 당부했다.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급하게 진행할 것 없지요.”

왕계년은 부하를 시켜 눈을 막을 갓모자와 비옷을 범사철에게 입히게 한 뒤 해당타타에게 인사를 하고 황궁 옆 작은 정원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뒤에서 다시 해당타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온 편지를 왕 대인도 보셨습니까?”

해당타타가 의자에 기댄 채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놀라 몸을 움츠리는 왕계년을 바라봤다. 고개를 돌린 그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을 물으시는 거라면 사죄드릴 테니 소신을 대신해 제사 대인에게 제 여식을 희롱하지 말라는 편지를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당타타가 호탕하게 웃으며 왕계년 대인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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