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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26화 (326/1,108)

326화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제가 강남에 3 황자 저하를 데리고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강남은 물 좋고 사람 좋고 풍경 좋기로 유명한데 안 보낼 이유가 없지.”

그러고는 의 귀빈이 갑자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범한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가까이 다가갔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제야 의 귀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궁에서 멀리 데려갈수록 좋네. 시간을 끌 수 있다면 몇 년 끌면서 데리고 있으면 더 좋고.”

의 귀빈의 생각을 눈치챈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무턱대고 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닙니다. 게다가 황실 금고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고요. 그냥 한번 보고 오는 것이라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습니다.”

의 귀빈도 범한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알기에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폐하께서 자네가 경도가 아닌 곳에 오래 있는 걸 허락하실 리도 없으니.”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위로했다.

“3 황자 저하께서는 나이도 어리시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더구나 황태후께서 손자들을 아끼시는데 누가 감히 건들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희는 다른 집안과는 다릅니다. 국공가도 아직 힘을 가지고 있고 저희 부친께서도 당분간은 자리에서 물러나시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저도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의 귀빈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조정에서 범한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이었다. 조정과 황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으므로 조정에 힘이 될 사람이 있다면 의 귀빈과 3 황자는 궁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런 말까지 오갈 수 있다는 건 서로가 서로에 대한 계산이 끝난다는 의미였다. 명랑하고 솔직한 의 귀빈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범씨 가문을 가까이하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3 황자 저하를 강남에 함께 데리고 가려면 먼저······ 의 귀빈께 허락을 받을 일이 있습니다.”

범한은 3 황자가 듣고 있는지 슬쩍 확인하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범한의 진지한 목소리에 그녀가 긴장하며 물었다.

“제가 3 황자 저하를 지방의 주와 군에서 일하고 있는 저의 제자들처럼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귀빈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오랜 세월 공부에 매진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의 귀빈의 안색을 슬며시 살피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3 황자 저하를 동생처럼 가르치고 싶은데······ 그러다 보면 불경하게 보이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동생처럼 가르치고 싶다’는 말이 마음에 든 의 귀빈은 범사철이 참혹한 매질을 당한 뒤 북제로 쫓겨났다는 사실은 떠올리지 못하고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싱글벙글 웃는 의 귀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한은 속으로 ‘의 귀빈이 왜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뻐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가 의 귀빈의 마음을 확인해 보기 위해 넌지시 떠보았다.

“어쩌면······ 잘못했을 때······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매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때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 어떻게 매질하지 않고 제대로 가르칠 수가 있겠어.”

그녀가 연신 한숨을 쉬며 솔직하게 털어놨다.

“최근 며칠 동안 내가 그 기생집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를 거야. 평상시 둘째 황자와 잘 어울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때려죽일 놈이 평아를 꼬드겨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 어린 평아가 뭘 알겠어?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한 거지. 그나마 자네가 더 커지기 전에 일을 해결해 줬으니 다행이지. 폐하께서 이 일로 화가 나신 게 아니면 좋겠는데······.”

범한이 속으로 웃으며 3 황자는 의 귀빈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속으로 3 황자가 여덟 살 아이답지 않게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의 귀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애를 잘 가르쳐 주게. 한평생 무탈하게 살 수만 있다면······ 지금 정왕처럼 무기력하게 살아도 난 괜찮아.”

이 말을 들은 범한은 코끝이 찡해 왔다. 자식에게 가장 좋은 건 어머니이며 어머니가 없는 아이는 잡초와 같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이 바로 이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황태후 궁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범한은 수방궁에 머물면서 의 귀빈과 함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생기 없이 차가운 황궁 안에서 의 귀빈만큼은 진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신 군주를 뵈옵니다.”

밖에 궁녀들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임완아가 작은 손을 비비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래는 비취색 치마를 입고 위에는 소매에 복슬복슬한 여우 털이 달린 붉은색 외투를 입은 게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범한이 양손을 펼치자 완아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범한이 아내의 찬 손을 어루만져 주며 물었다.

“어떻게 온 거예요?”

생동감 있는 빨간색 외투와 귀티 나는 비취색 치마가 서로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황궁에서 식사하는 만큼 화려한 색의 옷을 입는 건 당연했다.

범한의 물음에 임완아가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집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더니······ 소문무가 해준 얘기를 듣고 입궁하셨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대보 오라버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태감이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지 뭐예요. 입궁한 뒤에는 먼저 황태후와 황후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다행히 모두 황태후 궁에 계셨어요. 황궁 안을 쏘다니며 인사할 필요가 없으니 그나마 편하게 끝난 셈이죠. 그곳에서 인사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상공을 보러 온 거예요. 갑작스럽게 불려 오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니까요.”

“잘했어요. 그런데 대보는 어떻게 했어요?”

범한의 가장 큰 관심은 손위 처남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약약이가 집에서 봐주고 있어요.”

임완아는 궁녀가 가져다준 뜨거운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고는 의 귀빈 옆에 앉아서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의 귀빈은 먼저 궁녀에게 몇 마디 지시를 한 뒤 뜨거운 수건으로 완아의 얼굴을 닦아 주며 폐하가 범한에게 말한 내용을 알려 줬다.

완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정해진 거예요?”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강남에 놀러 다녀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났다.

그때 함광전에서 식사를 하라는 태감의 목소리가 들리자 의 귀빈은 재빨리 3 황자를 뒤채로 데리고 가 몸단장을 시키고는 자신도 몸단장을 했다.

범한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은근슬쩍 물었다.

“황태후마마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어요?”

완아가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안 보이자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파혼시키고 싶으면 저와 진작 상의했었어야죠.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하면 할마마마가 허락을 해주시겠어요? 게다가 저는 이런 일에 나설 자격도 없다고요.”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약약이가 싫어하는데 오라버니인 제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하긴 내가 너무 늦게 알려 주긴 했죠. 포월루 사건으로 홍성이 황실에서 미움받는 틈을 타서 이 일을 처리하려고 한 건데 쉽지가 않네요.”

“폐하께서 정하신 혼사를 무산시키는 건 쉽지 않아요.”

완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상공이 약약이를 너무 예뻐하는 것 같아요.”

범한이 키득키득 웃었다.

“누이를 예뻐하는 건 당연한 거죠.”

“제가 봤을 때는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야 해요.”

뒤채를 바라보던 완아는 엿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확인하자 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로는 부족해요. 이 일은 아버님께서 직접 폐하께 말씀하셔야만 성사될 수 있어요.”

범한이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두 집안 사이가 시끄러운데도 아버지께서는 홍성을 마음에 들어 하세요. 홍성이 매일 기생집을 쏘다니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신다니까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면서 친밀한 관계를 이어 왔으니 2 황자 저하만 아니면 두 집안이 갈라설 일은 없을 거란 말만 하시고 있죠.”

완아가 피식 웃었다.

“아버님께서도 왕년에 유정강에서 이름을 떨치신 분이니 당연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시겠죠.”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과거를 가지고 웃는 건 규범에 어긋나기에 완아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한편 누이의 혼사 때문에 마음이 조급한 범한은 완아의 말이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그는 약약이 태의원에서 명성을 쌓고 있으니 해당타타 쪽에서 하루빨리 일을 처리해 혼사를 막을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외삼촌께서 왜 입궁하라 하신 거예요?”

완아가 정말 궁금한 점을 물었다.

“셋째 일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범한은 아내를 가만히 쳐다보며 윤기 나는 턱을 쓰다듬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외삼촌이 사랑하는 상공에게 온 힘을 기울여 친모를······ 가난뱅이로 만들라고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때마침 의 귀빈이 단장을 마치고 나왔다. 장막이 걷히면서 빛이 들어오자 범한은 몸을 돌려 의 귀빈과 북제 큰 공주가 손을 맞잡고 나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옷에서부터 장신구, 화장까지 모두 세심하게 꾸민 두 여인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예상치 못한 미모에 범한이 감탄하며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큰 공주가 그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짓고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완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작은 설’이라 불리는 동지에는 경국 전체가 쉬었다. 조정도 하는 일을 멈췄고 군대도 경계를 늦췄으며 국경도 이날만큼을 문을 걸어 잠그고 휴식을 만끽했다. 항상 장사하는 상인들도 동짓날에는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이는 북쪽에 있는 북제도 마찬가지였다. 동지에는 천하 사람들 모두가 가족들과 둘러앉아 편안하면서 소박한 행복을 누렸다.

경국은 동짓날에 양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어 이날이 되면 경도 민가 거리에서는 불을 때는 연기가 자욱하게 깔렸다. 주방 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솥 위를 배회하다가 창문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거리마다 자욱하게 깔린 뜨거운 안개에서는 마른 고추 냄새, 양고기 누린내, 각종 약재가 가진 특유의 냄새, 무의 달콤한 냄새가 모두 뒤섞인 미묘한 냄새가 났고, 거리에서 이 냄새를 맡는 사람들은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군침을 삼켰다.

함광전 식탁 가장 끝자리에 앉은 범한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귀 모양의 양고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하얀 국 위에 둥둥 떠 있는 버섯과 진귀한 채소들을 바라보고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궁에서 먹는 양고기는 민가에서 먹는 것과 달랐다. 분명 정교함은 더 대단했지만 향불의 따뜻함이 없었다.

‘두부와 무가 없는데 양고기를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게다가 뜨뜻미지근한 양고기를 먹는데 왜 입술이 덴 것처럼 저린 거지?’

억지로 탕을 한 그릇 마신 그는 간장에 밥을 비빈 다음 밥알을 한 톨 한 톨 음미하며 재미없는 ‘집안 잔치’ 시간을 견뎠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눈을 최대한 내리깔고 소리 없이 식사하며 황족들의 대화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외롭게 놓여 있는 바퀴 달린 의자처럼 외롭게 있을 뿐이었다.

황태후의 거처인 함광전은 후궁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물론 북제 상경에 있는 휘황찬란한 황궁에 비교한다면 소박했지만 그래도 웅장하고 화려했다. 특히 겨울날 촛불을 밝혀 놓으니 궁전 안에 있는 장식물들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더욱 화려해 보였다.

오늘 함광전에 온 황족 자제들은 묵묵히 식사할 뿐 가장 상석에 앉은 노부인과 그 옆에 앉은 황제와 황후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늘이 동짓날인 만큼 황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으며 거기에는 정왕가 가족들과 연금되어 있던 2 황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범한이 함광전에 들어오는 모습을 본 2 황자와 홍성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 살기를 드러내며 달려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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