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눈이 내린 뒤 황궁 안은 한기가 가득했지만 범한은 추위를 막아 주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바퀴 달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따뜻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었다. 범한은 이미 황제가 범사철에 대한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 범사철이 몰래 경도를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감출 수는 없었다.
“며칠 전에 서신을 받았는데 이미 상경에 잘 도착했다고 합니다.”
범한이 무심코 뒤에 있는 어린 내관을 바라봤다. 이때 황제는 산책에 집중하느라 뒤에서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어린 내관은 바로 홍죽이었다. 범 제사의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본 그는 왠지 모르게 순간 마음이 오싹해지면서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었다. 최근에 폐하를 근거리에서 보필하면서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된 그는 급히 고개를 숙여 범한의 눈빛을 피했다.
그러면서 홍죽은 마음속으로 범한의 기세가 이처럼 대단한데 자신이 어떻게 범씨 가문에 불리한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거 말고는 할 말이 없는가?”
황제가 호수 쪽으로 걸어가면서 가벼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대부분의 일은 천하 모든 사람이 알 만큼 투명하고 명확하게 처리되지만 몇몇 일들은 그렇지 못하네.”
범한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목을 돌리자 옷깃에 있는 털이 뺨에 스쳤다.
“폐하의 물음에 제가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어린 내관이 범한의 바퀴 달린 의자를 급히 멈춰 세웠다. 의자가 흔들리자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짐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서슴없이 거짓을 말할 수 있는가?”
황제가 고개를 돌려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눈가에는 몇 가닥 주름이 잡힌 게 분명 웃는 모습이었지만 눈동자는 차가웠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예의 없이 황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백성은 본디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소신은 폐하에게만 충성할 뿐 백성에게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을 한 사람도 있네.”
황제의 눈빛이 순간 이상하게 빛났다.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국가이며 군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었지.”
“허튼소리입니다. 누가 그런 오만방자한 소릴 지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오만방자한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원작자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사상가 맹자였고 그걸 이 세상에서 퍼뜨린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형부에서는 아직도 자네 아우를 수배하고 있네.”
황제는 재미있는지 두어 번 호탕하게 웃고는 몸을 돌려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짐이 자네를 벌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는가?”
황제가 걸어가자 홍죽이 천천히 바퀴 발린 의자를 밀기 시작했다. 범한은 의자에서 나는 소리에 머리가 아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현명하시니 소신의 고충을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고충? 둘째가 자신의 고충을 하소연하다 그리되었다는 걸 모르는가?”
“아······ 소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범한은 사극에서 황제와 가까운 신하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도 놀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2 황자의 일에서 그는 황제의 뜻에 따라 움직인 꼭두각시일 뿐이었고 더구나 황제에게 그는 평범한 신하와 같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의 두려움이나 긴장감도 없는 범한은 황제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약간 과장해서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 그만이었다. 다만 말을 노골적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 같지 않았다.
황제도 그걸 느꼈는지 낮은 목소리로 질타했다.
“지금 거짓으로 뉘우치는 척하는 건가? 진심으로 하는 말 같지 않군!”
범한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소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말을 반복하는 사이에 호수 다리에 이르자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경도 날씨가 추워지고 첫눈까지 내렸지만 호수는 아직 얼지 않아 푸른색 물이 찰랑대며 흐르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다리는 수리해서 견고한 편이었지만 바퀴 달린 의자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다소 버거워 보였다. 범한은 불안한 마음에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다리의 갈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뒤에 있는 어린 내관이 검수라면 자신의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앞에 정자를 미리 청소하고 준비해 둔 태감과 궁녀들이 멀찌감치에서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황제가 방석이 깔린 돌의자에 앉은 뒤 범한에게 차를 마시라는 눈짓을 해 보이고는 손가락으로 잣을 천천히 까기 시작했다. 어린 내관 홍죽은 눈치 있게 정자 밖으로 물러나 상황을 살피면서 지시를 기다렸다.
“어떠한가?”
황제가 물었다. 범한은 잔에 담긴 찻물이 뜨거운지 미간을 찌푸리다가 질문에 즉시 대답했다.
“폐하, 소신의 상처를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면······.”
“후자이네.”
뜻을 알아챈 범한이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감찰원 내부를 거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에 시선을 많이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범한은 계속 설명했다.
“현재 경내의 물건은 모두 차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북제 사람이 소문을 듣고 안에서 이윤을 보려 한다면 최씨 집안이 북제에 쌓아 둔 물건이 적지 않은지라······.”
이 말에는 황제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그가 북제 황제와 함께 이익을 나눠 갖기로 계획했다는 사실 말이다.
“북방에 노선은 총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은 4처에서 통제만 하고 있을 뿐 황실 금고에 파견된 감찰원 관리가 그곳에서 너무 오래 머무른 사람인지라 안심할 수 없어 잠시 사용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언빙운이 세운 계획을 되도록 자세히 설명하자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짐은······ 세세한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알고 싶네.”
범한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늦어도 1년 안에는 황실 금고 수입의 대부분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황제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실 금고가 이전에처럼 번성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자네도 그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범한이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 자네가 2 황자와 장 공주에게 손대는 걸 짐이 지지해 줄 거라 확신했던 건가?”
“그건······ 조정에 은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황제가 흠, 하고 콧소리를 냈다.
“조정에서 일을 진행해 영토를 넓히려면······ 은전이 필요하지. 짐은 운예가 황실 금고에서 돈을 꺼내 착복하는 걸 더는 지켜볼 수가 없네. 그래서 자네가 황실 금고를 넘겨받아 상황을 정리해 주었으면 하네. 먼저 황실 금고를 인계받은 뒤 상대방의 신분은 두려워하지 말고 매섭게 상황을 정리하도록 하게···. 짐이 자네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부디 실망시키지 말게나.”
“폐하의 총애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범한은 황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장 공주는 자신의 장모인 만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잣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향을 음미했다. 바람이 멈추면서 눈이 녹기 시작한 정자 밖은 조용하면서 약간은 한기가 느껴졌다.
“섭중이 창주로 돌아가서 짐이 친왕에게 금군 대통령을 하라 한 걸 가지고 말들이 있는 것 같더군. 자네는 들은 바가 없는가?”
황제가 마치 아무 의미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묻자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선례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보니 여러 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왜 내 의견을 묻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성상께서 깊이 헤아려 결정하신 일에 어찌 소신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뭐라 말하든 탓하지 않은 테니 말해 보게.”
황제는 계속 범한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은 채 정원의 나무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황제와 대화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녹정기(鹿鼎記)》라는 무협 소설 주인공인 위소보(韋小寶)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다가 결국에는 강희(康熙)에게 약점을 잡히고 만다. 범한 역시 황제 몰래 여러 일을 벌였다. 몰래 황궁에 잠입하기도 했고 북제와 은밀한 협상을 했으며 소은과 비밀스러운 대화도 나눴다. 만약 이런 사실들이 발각된다면 어떤 처지로 전락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황제는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 범한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황제와 놀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여기서 범한이 가진 우위란 바로 그와 황제의 진짜 관계였다. 그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가 알고 있다는 걸 몰랐다. 이에 범한이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연기할수록 황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 상황은 자연스럽게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1 황자 저하께서는 경도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또 친왕에게 품격에 맞지 않는 일을 시키시는 것 또한 규율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황궁은 경국의 심장인 만큼 부주의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범한의 말은 직설적이다 못해 지나쳤음에도 황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원치 않는다고? 세상일은 대부분 마음대로 되지 않네. 경도에 있기 싫다고 아들이 되어서 아비 혼자 외롭게 경도를 지키게 하겠는가? 범한, 자네는 웅변가로서는 자질이 없는 것 같군.”
범한은 순간 오싹해졌다. 1 황자가 자신 집을 방문했던 걸 황제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둘째도 이제는 분수에 맞게 처신할 것이니 더는 싸우지 말게.”
황제가 두 눈을 감으며 얼마 전 경도에서 있었던 일을 매듭지었다.
“알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그로서는 계속 싸울 필요가 없었다.
“현공 사당에서는 자네 공이 컸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황제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자네는 감찰원 제사이지 않나. 검수에 경도에 들어와 있음에도 2처는 사전에 미리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네. 이건 자네의 불찰인 만큼 직위를 빼앗아도 마땅하나 공이 커서 빼앗지 않은 거야. 다만 짐은 자네가 세운 공에 대해 아무런 상도 주지 않을 것이니 원망하지 말게나.”
“소신이 감히 어찌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제사 자리를 빼앗겨도 할 말이 없습니다. 흰옷의 검수에게 당한 것도 소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갑자기 흥미를 가지며 물었다.
“그 검수······ 아직도 정체를 밝히지 못했네. 싸우면서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는가?”
정자 밖에서 갑자기 불어온 차가운 겨울바람에 범한은 등이 얼얼하면서도 목덜미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황제가 질문한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신중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흰옷의 검수는 그림자였다. 진평평이 무슨 이유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자신이 먼저 알기 전까지는 황제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황제가 이 일의 진상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면 그는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 만약 자신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가 어렵게 얻은 황제의 마음도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이에 범한은 순간 깜짝 놀란 척하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흰옷의 검수가 사고검의 아우라 의심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동이성에 큰 혼란이 닥쳤을 때 사고검의 가족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죽었고 그 속에서 아우가 도망을 쳤다고 들었네. 짐이 생각하기에 그날 현공 사당에서 보았던 검광은 사고검법일세. 짐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사고검법의 검의가 확실해.”
자신의 추측대로 말이 이어지자 범한은 약간 안심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일 실제 증거를 포착할 수만 있다면······ 이 일을 명분으로 삼아 동이성에 군대를 보낼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소신이 입은 부상도 가치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