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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23화 (323/1,108)

323화

황제의 명을 받고 요 태감이 처음 간 곳은 범한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범한은 없었다. 그는 몸이 좋지 않은 제사 대인이 어디를 갔을지 짐작할 수 없었고 상서 대인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범한의 특수한 신분상 집에 없다면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폐하가 황궁에서 범한을 데려오길 기다리고 있는 만큼 요 태감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다가 제사 대인의 부인이 처가에 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에 시위를 이끌고 그쪽으로 가던 길에 범한의 마차와 마주친 것이었다. 만일 눈썰미가 좋은 시위가 범한의 측근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아마 계속 눈발을 맞으며 고생했을 터다.

숨을 헐떡거리는 요 태감을 본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처가에 가야 하네. 왜 입궁하라 하는 것인가?”

폐하의 뜻을 전했는데도 범한이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요 태감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살면서 이처럼 폐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신하는 본 적이 없었다. 범씨 집안과 친분이 있는 그가 초조해하며 재촉했다.

“폐하께서 분부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작은 범 대인께서 지체하실수록 폐하의 기분은 나빠지실 겁니다.”

범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가야지.”

그는 눈 위에서 떨고 있는 태감을 일단 마차에 태운 뒤 일행에게 처가에 가서 완아에게 사실을 전하라고 분부하고는 황궁으로 향했다.

“요 태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범한이 몸을 반쯤 기댄 채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는 집안에서 태감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는 걸 알았기에 요 태감에게 은표를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요 태감도 범한에게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멋쩍게 웃었다.

“소신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대인께서 가보면 아실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짐짓 화난 척 말했다.

“하는 일이 형편없구먼.”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싶은 일이 있네.”

요 태감이 귀를 쫑긋거리고는 마차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께서 알고 싶은 일이 뭡니까?”

“지난번 현공 사당에 있었던 태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요 태감은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범한은 담담하기만 했다. 사실 이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태감들 속에서 검수이 나온 이상 그날 현장이 있던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태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보다 황실에서 일을 깨끗하게 처리했을지가 더 걱정되었다.

“대 내관은 어떻게 됐나?”

“대 내관은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요 태감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의 신임이 두텁긴 하나 연루된 이상 태극전에 머무를 수는 없지요. 더구나 두 달 전 못난 조카가 저지른 일로 도찰원에 조사를 받게 되면서 궁에서 쫓겨날 처지가 된 것을 폐하께서 숙 귀비의 체면을 봐서 다시 쓰게 했으니까요.”

요 태감은 말하면서 범한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대 내관에 대해 물어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대 내관이 범한과 은표를 주고받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으니······ 대 내관도 참 운이 없지요. 하던 일도 다 뺏기고 창고 관리직으로 가서 노년에 추위에 떨며 힘을 쓰고 있으니······.”

요 태감과 대 내관은 같은 해에 입궁한 사이였다. 비록 평상시에는 서로 배척하며 견제했지만 같은 일을 하는 만큼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요 태감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얼마 동안은 고생해야겠지만 그래도 폐하의 화가 누그러진 뒤 다시 말해 보면 들어주실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늘 태극전 당직은 누가 서고 있는가?”

“홍죽이 서고 있습니다.”

요 태감이 그건 왜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범한을 보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 말했다.

“어린놈이 올해부터 태극전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일 처리가 깔끔해 폐하께서 좋아하십니다.”

“폐하의 명을 전하는 일도 그······ 홍죽이 하는 건가?”

범한이 묻자 요 태감이 고개를 저었다.

“그놈에게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 * *

마차가 새로 난 길 입구를 지나자마자 요 태감이 소리쳐 마차를 멈춰 세웠다. 등자월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황궁 앞 드넓은 광장을 바라보았다. 오늘같이 눈발이 휘날리는 날에 상처 입은 제사 대인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이곳을 지나다가는 황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요 태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지난번 일이 있고 난 후로 금군 내부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는데 그 뒤로 병사들이 늑대처럼 눈을 부라리며 궁에 입궁하는 사람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입니다.”

범한이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 태감이 난처해할 건 없소. 이제 내리지.”

등자월이 약간 화난 표정으로 황궁 문을 바라보고는 범한을 안아 마차에서 내린 뒤 바퀴 달린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재빨리 검은 천으로 만든 큰 우산을 펼쳐 제사 대인의 머리 위를 가린 다음 감찰원 관리에게 밀고 가라고 지시했다. 눈이 검은 우산 위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 태감은 손으로 머리 위를 막은 뒤 따라온 시위들과 함께 황궁 문으로 달려갔다.

외투로 몸을 감싸고 얼굴을 절반을 가린 범한은 겨울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오늘따라 흐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발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황궁 문밖에서 요 태감의 말을 듣던 금군이 놀란 눈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일행을 바라봤다. 눈발 속에서 평상복을 입은 관리들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오고 있었으나 검은색 우산을 씌워 놔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감찰원 원장이 입궁한다는 말은 없었지 않습니까?”

금군 대장이 묻자 요 태감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범 제사입니다.”

화들짝 놀란 금군 대장이 급히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가서는 바퀴 달린 의자에 탄 범한이 눈바람을 맞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그러고는 황궁 문 앞에서 잠시 검사를 한 뒤 재빨리 안으로 들여보냈다.

* * *

차가운 북쪽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등자월은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정전 옆에 길게 난 길을 걸어갔다. 황궁 담장 모퉁이를 따라 깊이 들어간 일행은 오른쪽에 있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일찌감치 흰색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태감이 범한의 머리 위를 가려 준 뒤 상처 입은 그를 조심히 후궁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등자월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후궁 문밖에 서서 태감들에게 둘러싸여 점점 멀어지는 제사 대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멀어지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등자월이 바람에 날린 눈발에 두 눈을 끔뻑였다.

“어서방으로 가는 게 아닌가?”

얼굴을 덮치는 차가운 바람에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요 태감에게 물었다.

황제는 오래도록 범 제사가 오지 않자 이미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진 태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깊은 궁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바퀴 달린 의자는 연신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하얀 우산을 든 태감은 곧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황궁의 지세가 평탄하지 않았다면 충격에 범한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요 태감이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침······ 침전에 계십니다.”

영문을 모르는 범한이 의아함에 인상을 찌푸리자 요 태감은 순간 그가 최근에 다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폐하가 더는 기다리시지 않도록 빨리 가는 것도 중요했지만 서두르다가 제사 대인의 상처에 탈이라도 난다면 그것만큼 난처한 경우도 없었다. 이에 그가 주변 태감들에게 천천히 가라고 소리친 뒤 범한의 안색을 살폈다.

“작은 범 대인, 괜찮으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잠시 뒤 황궁 정원에 들어간 일행은 황후의 침전이 아닌 의 귀빈의 침전으로 향했다. 요 태감이 몇 걸음 앞장서서 걸어가 안에 통보하자 누군가가 안에서 나와 범한을 데리고 들어갔다.

황제는 평상복을 입고 따뜻한 침대에 앉아 의 귀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3 황자는 옆에 앉아 무언가를 베끼고 있었다. 태감들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들어오자 황제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상처를 입었으면 저택에서 몸이나 추스를 것이지 어디를 돌아다니는 건가?”

황제가 젊은 신하를 꾸짖으며 관심을 보인다면 신하는 마땅히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야 옳았다. 하지만 범한은 남몰래 냉소를 지었다.

‘정말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17년 동안 아무런 표현도 안 하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정말로 내 상처가 걱정된다면 오늘 이렇게 급히 입궁시키지도 않았을 거고.’

그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상황에 맞게 감동한 척을 했다.

“많이 좋아져서 바깥바람을 좀 쐴 겸 처가에 가서 완아를 데리고 오려고 했습니다.”

“완아가······ 임약보의 집으로 갔는가? 거기에는 바보 말고는······ 다른 사람은 없을 텐데.”

황제는 자신의 조카가 임약보 집안과 왕래하는 것이 못마땅한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의 안색을 슬쩍 살핀 의 귀빈이 호호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범한,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 그렇게 쏘다니다가는 범 상서 대인에게 몽둥이로 맞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황제가 약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범건이······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비록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안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의미를 눈치챈 범한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옆에서 책을 베끼고 있는 3 황자를 슬쩍 보고는 범한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자네가 태학에서 정리한 경책 몇 권을······ 짐이 승평이에게 공부해 보라 했네. 태부는 어렵다고 하는데 자네가 보기에 어떠한가? 승평아, 제사 대인에게 보여 드리거라.”

3 황자의 성은 이씨였고 이름은 승평이었다. 경국 법규상 황자들은 대신들을 존경해야 했으므로 황제가 3 황자에게 이런 분부를 내리는 건 특이할 게 없었다. 3 황자가 급히 붓을 멈추고 공손하게 바퀴 달린 의자 앞으로 걸어와 범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어찌 이러십니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어 피할 수 없는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는 태학사업이 아닌가. 그러니 이리하는 게 당연하지.”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황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범한을 3 황자의 스승으로 삼으려는 걸 알게 된 의 귀빈은 좋은 감정을 감추질 못하고 헤벌쭉 웃었다. 무예와 문예에 모두 뛰어난 데다가 조정에서 영향력까지 갖춘 범한을 스승으로 둔다면 3 황자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은가?”

황제는 의 귀빈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라서 아끼고 좋아했다. 황제의 말을 들은 의 귀빈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평아에게 좋은 스승을 찾아 주셨군요.”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범한은 씁쓸한 마음에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에 대한 나의 의견도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는 그가 3 황자가 건네 보인 책을 힐끗 보았다.

“장 대가의 경책으로 공부하는 건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수준이 어렵다는 태부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이 책들은 입문용이므로 3 황자께서 공부하셔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이후 황제와 신하 사이에 응당 오고 갈 말들을 주고받던 범한은 속으로 황제가 분명 다른 할 말이 있어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뜨거운 탕을 마시던 황제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밖에 눈이 그친 것 같네. 첫눈을 그냥 보내기 아쉬우니 짐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지.”

“네, 폐하.”

황제가 일어나자 의 귀빈이 웃으며 너구리 털이 박힌 진홍색 비단 도포를 걸쳐 줬다.

의 귀빈의 거처인 수방궁을 나서자 눈은 이미 그친 상태였다. 황궁 바닥은 촉촉하게 젖어만 있어 눈이 왔다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회색빛 하늘에 붉은 담장과 금색 처마 그리고 눈이 쌓인 겨울 가지들이 어우러지면서 매력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더구나 공기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맑았다.

황제가 외투를 걸친 채 앞으로 걸어가자 어린 내관이 범한의 뒤로 와서 바퀴 달린 의자를 밀었다. 그 모습을 본 면 저고리를 입은 태감과 궁녀들은 멀리서부터 비켜선 채 고개를 숙였다.

“눈이 내린 날은 짐에게 무릎을 꿇을 필요 없네.”

범한의 생각을 읽은 듯 황제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짐이 즉위한 뒤 정한 규정이지. 매일 무릎을 꿇으니 저들도 피곤하고······ 황실 금고 은전으로 산 옷도 더러워지지 않는가.”

눈과 함께 바람도 그치면서 더워진 범한은 옷깃 단추를 살며시 풀었다. 황제의 입에서 황실 금고란 단어가 나오자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범한이 무례를 무릎 쓰고 아무 말 하지 않자 황제가 차갑게 물었다.

“자네 아우는 지금 어디 있나?”

이때는 이미 황궁에서 가장 외지고 조용한 정원에 다다라 있었다. 앞에 보이는 작은 호수 중앙에는 다리로 연결된 정자가 있었는데, 눈이 살짝 덮여 있음에도 정자의 검은 돌에서는 뿜어져 나오는 스산한 기운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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