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흰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는 연필의 모습은 미녀가 발끝으로 잔잔한 물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등자월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 제사 대인이 밀서를 쓰는 모습을 지켜봤다. 얼음장처럼 추운 서재 안에서 연필로 편지를 쓰는 범한의 모습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종이 위를 스치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사실 더 기괴한 건 편지 안의 내용이었다. 감찰원 밀서인 만큼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더구나 연필은 필적을 닦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비교적 모호한 말을 사용해 편지를 쓰면서 특히 일과 관련된 단어를 쓸 때는 암호를 사용했다.
이 편지는 왕계년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편지 안에는 최씨 가문과 관련된 일이 적혀 있었다. 경도에서 박해를 받은 최씨 가문은 2 황자와 신양을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량의 밀수품을 북제에 가지고 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쪽 통로가 여전히 막혀 있는 탓에 갈수록 재고만 쌓이고 있었다.
현재 최씨 가문이 신양을 통해 빼돌려 쌓은 물건을 계산해 보면 황실 금고 연 생산량의 6분의 1이나 되는 분량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장 공주는 황실 금고를 오랫동안 관리하면서 간이 굉장히 커져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은 범한과 언빙운이 몇 개월 동안 2 황자를 공격하고 최씨 가문을 압박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는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상대방을 뼈도 뱉지 않고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순간을 말이다.
편지를 쓰던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편지의 가장 마지막 줄에 “밥상을 차리게.”라고 썼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범한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고는 붕대로 감싼 상처가 가려운지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편지를 한 통 다 쓴 뒤 얼어 경직된 손을 풀던 그는 순간 담주에 있었을 때가 생각났다. 사사는 매일 자신을 도와 책을 베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글을 쓸 때는 손을 품 안에 넣어 녹여 주고는 했는데 그 감촉이 정말 좋았다.
마음이 약간 난잡해진 그가 다시 연필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편지는 해당타타에게 보내는 거였다. 옛 생각에 마음이 난잡해져서인지 편지의 말투도 약간은 거칠어졌다.
북제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해당타타와 편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었기에 꽤 친숙해진 상태였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양국을 대표하는 젊은 실력자였기에 서로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유지하는 게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되는 건 분명했다.
편지에는 경국 경도에서 최근 발생한 일들이 적혀 있었는데 물론 현공 사당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경국 황제가 검수을 만난 건 천하가 놀랄 만한 대사건이었으므로 북제 상경에도 이미 소식이 전해졌겠지만 당사자가 직접 전하는 것이 소문으로 듣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용 안에는 은밀하게 다른 의미도 숨겨져 있었다. 바로 자신이 최씨 가문을 손대려 하니 해당타타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어린 황제도 함께 움직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편지 맨 마지막에는 자신의 재능이 이전처럼 뛰어남을 증명하는 시를 적었다.
‘은혜에 보답하는 걸 소임으로 삼을 뿐 사사로운 이익과 명예에 얽매이지 않네. 옛사람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었고 쓸쓸히 변방에 묻히는 걸 두려워했지. 조정의 옛사람들이 어찌 나를 생각해 줄까. 무거운 옷과 두꺼운 신발을 신으니 화려한 술만 나부끼네. 북쪽 추위가 극심하다 들었는데 백성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모르겠구나.’
이 시는 북송 시대 정치가 사마광이 쓴 <고한행(苦寒行)>에서 마지막 몇 구절을 베낀 것이었다. 범한이 만족한 얼굴로 편지를 한번 읽어 보고는 차가운 양손을 비비며 상황과 완벽히 어울리는 시를 적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백성의 고통을 걱정하는 뜻이 담긴 구절에서 해당타타는 분명 오래도록 의미를 생각하고 음미할 것이었다. 그는 해당타타가 자신의 편지에 속아 감동할 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즐거웠다.
빠뜨린 내용이 없는지 확인한 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랍하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움찔하면서 편지에 쓰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시골 아낙네처럼 몸을 흔드는 친구가 자신의 고리타분한 편지를 읽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잠시 고민하다가 새로 편지지를 하나 펼치고 쓰기 시작했다.
‘타타, 잘 지냈소? 이전 편지는 공적인 일을 적은 것이고 이 편지는 일상을 편히 이야기하려고 쓰는 것이오. 오늘 경도에 경력 5년 첫눈이 내렸소. 이전보다는 훨씬 이른 시기에 내린 것이오. 상경은 이곳보다 눈도 더 많이 오고 날씨도 추울 텐데 괜찮은지 모르겠소. 이제 좀 지나면 낭자의 작은 정원 울타리에 뻗은 납매 가지에서 하얀 눈을 뚫고 빨간 꽃이 피어오르겠구려.’
‘맞다, 낭자가 키우는 오리는 잘 크고 있소? 얼어 죽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나는 여기서 아주 잘 지내고 있소. 누렁이, 검둥이, 흰둥이도 경도 밖 농가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거기 사람들이 통통한 고양이 세 마리를 조상 모시듯 정성껏 기르고 있으니 잘 지내지 못할 수가 없지요.’
‘나는 모든 게 좋습니다. 먹고 자면서 집 안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소. 다만 최근 이틀 동안은 태의원에 가느라 바쁜 누이의 얼굴도 보기 힘들었고 완아도 처가에 가 있어 좀 적적하오. 귀여우신 큰 처남께서 최근 외로움에 우울해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가지 말라 할 수 있겠소.’
범한은 생각나는 대로 써서 내용이 산만해지자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이 사씨인 제자는 최근 기생집을 운영하기 시작했소. 장사도 잘되고 음식도 아주 맛있으니 언제 한번 경국에 오면 내가 대접해 드리지요. 갑자기 생각난 건데 이름은 까먹었지만 상경에 있는 술집의 술도 달았던 게 기억나는구려. 그날 낭자와 허튼소리를 많이 했는데 기억할지 모르겠소.’
‘낭자가 이전에 보낸 편지들은 읽어 봤는데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소. 성녀라 불리는 분이 명문가 규수의 교양은 배우려 하지 않고 편지에 볼품없는 시나 글귀를 끼워 넣는 걸 좋아해서 되겠소? 내가 비록 거짓으로 시선이란 명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작문을 고쳐 주는 데는 흥미가 없소.’
‘지난번 편지에 사리리 낭자가 잘 지낸다고 했는데······ 앞으로 이런 내용은 전하지 말아 줬으면 하오. 지난번 일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남아 있는 데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낭자의 입에서 사리리 낭자의 소식을 들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오.’
‘타타, 언제 한번 경국에 놀러 오시오. 아내가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오. 그리고 기회가 돼서 물어보는 건데 천일도 공법을 외부인에게 전해 줄 수 있소? 최근 낭자 쪽 수련 방법에 흥미가 생겨서 그러오.’
자연스럽게 한 질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범한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뻔뻔스럽고 능글맞은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문장이었다.
‘창밖에 눈이 거세질 것 같으면 집 밖에서 그 젊은이가 장작을 패오. 젊어서 그런지 힘이 넘치나 보오. 반면 나는 젊은데도 마음속에 늙은이가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이든 귀찮고 재미없소. 밖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게 나보고 그만 쓰라고 재촉하는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소. 방에 난로가 허술해서 온도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아 춥소. 말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구려. 마지막으로 나를 도와 그를 잘 보살펴 줘서 고맙소. 잘 지내시오.’
평범한 일상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에는 유용한 정보가 상당히 많이 담겨 있었다. 편지 내용을 한번 읽어 본 뒤 그가 밑에 추가로 적었다.
‘왕계년, 또 훔쳐보면 내가 목철 조카보고 자네 딸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라고 할거네!’
* * *
“이전보다 한 통을 더 쓰셨군요?”
등자월이 손에 들린 편지를 세어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범한을 바라봤다.
“해당타타 낭자에게 두 통을 보내시는 겁니까?”
“뭔 질문이 그렇게 많아? 기존 방법대로 상경에 보내게.”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잘 봉인된 편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계년조 조직원에게 전해졌다. 편지를 세어 보던 조직원이 질문했다.
“왜······ 같은 사람에게 두 통을 보냅니까?”
등자월이 조직원을 노려보며 입술을 두어 번 씰룩거렸다.
“뭔 질문이 그렇게 많아?”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보안이 철저한 감찰원의 우편망이······ 사랑 편지를 보내는 데 사용되다니.’
* * *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심정 대로 근거지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탄 범한은 완아와 대보를 맞이하기 위해 처가로 향했다.
“태학사업이란 직책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나? 게다가 나는 태상사에 가지도 않는데 왜 태상사 소경이 될 수 있었던 거지?”
범한의 말을 듣던 등자월이 설명했다.
“소경은 두 가지가 있는데 임 소경이 주소경을 맡고 있고, 대인은 부소경이십니다······ 부소경은 유명무실한 직위이니 매일 태상사에 가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태학사업은 총 일곱 부분을 이끄는 직책으로 태상사 소경과 태학사업 모두 정 4품 직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말을 쉬며 범한의 안색을 살피고는 넌지시 말했다.
“대인께서는 감찰원 제사 자리를 받으셨으니 원래는 조정 관리직에 임명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 관례를 깨고 대인에게 두 직책을 맡긴 것은 폐하께서 대인을 총애한다는 걸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지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 부분은 황제 성지에서 맨 마지막 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수상했다. 생각이 깊은 황제가 단순히 총애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이런 직책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이 두 직책에서······ 무슨······ 특별한 점은 없겠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등자월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상사가 종묘의 자질구레한 일을 주관하는 곳이니 비교적 자유롭게 입궁을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소경이란 직위는 흔한 것이라 특별할 건 없습니다. 그리고 태상사업은 최근 몇 년 동안 임명된 적도 없었고 새 정책이 계속 실행되면서 관직이 약간은 복잡해져서······.”
말꼬리를 늘이며 고민하던 등자월이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이전에 태상사업은 태부의 조수로 입궁해서 황자들에게 강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범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황제가 자신에게 이런 직책을 내린 의도가 뭔지 알 것 같았다.
‘태상사 소경 말고도 태학사업이란 직책을 준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황자들의 스승이 되라고? 나보고 지금 버르장머리 없는 3 황자를 책임지고 가르치라는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매일 입궁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럼 강남은 언제 내려가라고?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나한테 맡길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때 마차가 삐걱 소리를 내고 멈춰 섰다. 창문 가림막을 살짝 걷어 보니 날리는 눈발 속에서 태감이 대내 시위 몇 명을 이끌고 마차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태감이 추운 듯 마차에 탄 범한을 바라보며 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자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차 안에까지 들렸다.
“소인이 대인을 찾으려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얼른 저와 함께 가시지요. 폐하께서 입궁하라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