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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20화 (320/1,108)

320화

화원 밖에 서 있는 일곱 명의 익숙한 호위가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 무리를 이끌고 있는 자는 고달이었다. 호위들은 수개월 전에 범한과 북제에 함께 다녀온 사이였다. 그리고 이들은 황제 폐하께서 자신들에게 범한 제사 보호를 맡겨 말도 못 하게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범한 곁에 있는 게 숨어서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더군다나 범한 대인은 무공 실력까지 출중했으니 그들로서는 그다지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는 편한 대상이었다.

등에 장도를 멘 호위들이 고달의 인솔하에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한목소리로 범한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인들, 제사 대인을 뵈옵니다.”

범한이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웃었다.

“일어나요. 모두 잘 아는 사이 아닙니까. 오늘부터 본관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모두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호위들은 범한 대인이 농담한다고 생각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썰렁하게 두 번 소리 내어 웃었다. 범한의 말이 진심이란 걸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이제 일곱 호위가 옆에 있으니 해당타타가 갑자기 미쳐 날뛰며 자신을 죽이려 들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아버님께 인사부터 올리고 와요.”

범한이 고달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평일이라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하나 본관을 따르게 된 이상은 이런저런 금기 사항 같은 거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고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범한 제사의 시원스러운 결정이 고마웠다. 이에 살짝 들뜬 기분으로 자신의 옛 상사께 인사를 올리기 위해 서둘러 앞채로 향했다.

* * *

“수놓은 베개? 좋은 술? 옷? 그리고 악기까지?”

범한은 자기 방에서 진지하게 하사품 품목을 듣고 있다가 아내를 잠시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 비록 협률랑을 지내기는 했지만 악기는 다룰 줄 모르는데요.”

“황궁의 규칙일 뿐이에요.”

임완아가 설명을 해주었다. 한데 범한이 지친 모습을 보이자 하사품 안에 끼어 있던 변기 같은 항목은 읽는 걸 생략했다.

지금 이 순간 뒤채 정원은 어수선할 정도로 바빴다. 등자경이 사람들을 시켜서 저택 밖에서 황궁에서 온 하사품들을 받아 오고 있어서였다. 한편 등 대가는 창고에서 물건을 분류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방에 있는 아씨 마님에게 찾아와 보여 주었다.

등 대가의 아내가 이 추운 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뛰어다니는 걸 보며 범한은 참다못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상이야, 벌이야?”

그러자 등 대가의 아내가 싱글벙글 웃었다.

“바늘 하나, 실 한 가닥도 대충 보시면 안 됩니다. 몽땅 황궁에서 하사품으로 주신 복덩이들 아닙니까. 그리고 경도에서 이리 많은 상을 하사받은 가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련님께서는 이번에 체면이 크게 서신 것입니다.”

“그 하사품들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범한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목숨을 건 대가로 받은 것들인데······ 체면 따위 차라리 필요 없네.”

임완아가 범한과 거의 동시에 똑같은 말을 했다. 부부는 하사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임완아는 황제 외삼촌의 저의가 불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공이 나중에도 몇 번이고 대신 칼을 맞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삼촌이 하사품이며 상을 내려준 거라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 쩨쩨하시네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사받은 금은의 수량을 읽을 때 자세히 들어 봤는데 정말 처참할 정도로 적은 양이더군요.”

범한의 말에 임완아가 웃었다.

“아직도 신경 쓰는 것입니까? 한데 재밌지 않아요? 하사품의 종류가 복잡해질수록 황제 폐하의 상공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뜻이니까요.”

“어찌 관심이 없으실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눈썹을 씰룩였다.

“우리 집은 지금 담박서국으로 유지되고 있어요. 매번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앞채의 아버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고 말입니다. 저 어르신께서 손에 쥔 은전이 정말 많으시다지만 나는 캥거루족으로 남아 있을 생각이 없거든요.”

캥거루족이란 단어에 임완아가 그 뜻을 은연중에 알아차리고는 웃었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을 하고 있기에 작은 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상공에게는 청루도 있지 않아요? 듣기로는 거기에서 한 달에 은자 몇만 냥을 벌어들인다던데요.”

범한이 실소했다.

“그건 사천립 거라니까요. 그러니 날 엮지 말아 줘요.”

임완아가 삐진 척을 하며 중얼거렸다.

“자기편 앞에서도 거짓말이라니 아닌 척하는 거 피곤하지도 않나 봐.”

“언제 어디서든 그래야 합니다. 제일 좋은 건 나 자신도 속여야 하는 거고요.”

“아까 오라버니께서는 왜 찾아오신 건가요?”

임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말했다.

“금군 대통령을 하지 않으시겠다며······ 내게 방법을 물으러 오셨어요.”

임완아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큰 오라버니 성품에 경도에는 안 계시려 할 거예요.”

그러자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게 경도에만 있는 걸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냥 폐하께서는 전투도 정복 활동도 잘하는 아들인데도 항상 외지에서 군을 이끌고 있는 게 걱정되어 그러신 게지요.”

“당신 앞이니 조금 솔직히 말하리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 갔다.

“사실 1 황자마마를 돕고 싶습니다. 하나 나는 신하 된 입장이니 그 일과 관련해서는 발언권이 조금도 없어요. 1 황자마마께서 대체 어떤 결심을 하셨기에 그리도 대담하게 내게 모두 털어놓으셨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됩니다.”

“어쩌면 큰 오라버니 생각은······ 내 체면을 생각해서 상공이 자신은 해치지 못한다고 여기셨을 거예요.”

임완아가 씁쓸하게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일을 단순하게만 보신다니까요.”

“경도는 물이 깊은 곳입니다. 그래서 한참을 수영해 봤는데도 탐사를 마치지 못한 곳 같아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봄에 강남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나와 같이 가요. 그곳에서 며칠 묶으면서 제대로 쉬는 거예요.”

“아직은 몰라요. 조정에서 상공을 흠차대신 신분으로 황실 금고를 조사하도록 할지 아니면 바로 유명무실한 직위에 임명할지 말이에요.”

임완아가 이어 진지하게 분석해 나갔다.

“만약 흠차대신 신분이라면 가족을 데려갈 수 없어요. 한데 명목상 강남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면 내가 따라가도 무방하기는 해요.”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께서 어찌 결정하시든 나는 어떻게든 당신을 데려갈 거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임완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으로는 달달하니 기분이 좋아서였다. 임완아는 범한과 자신의 신분이면 규율을 깨도 지적할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황궁의 마마님들께서 자신이 저 먼 강남까지 가는 걸 동의해 주실지가 걱정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가장 멀리 가본 곳이라고 해봤자 작년 겨울에 다녀온 창산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오늘 범한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소문으로만 듣던 그림처럼 아름다운 강남에 직접 가볼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너무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에요.”

돌연 어떤 일이 생각난 임완아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호위에게 상공을 보호하라는 밀지를 내리셨지만 결국에는 경도 사람들도 알게 될걸요. 물론 상공이 중상을 입은 터라 호위들이 와 있을 이유는 충분하지요. 그렇다 해도······ 호위의 신분은 좀 특별하잖아요. 상공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눈에 거슬릴 거예요.”

범한이 윗입술 위로 살짝 따끔거리게 난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염려 말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총명하신 분입니다. 호위를 이곳에 보내신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신 거예요. 그러니 여기 계신 군주마마께서도 자연스레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

* * *

방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범한은 살짝 화가 나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가가 귀찮게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정기가 소실된 후 주변 환경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과거처럼 민감하게 알아챌 수 없어서였다. 적어도 예전처럼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범약약이 태의정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태의정은 임완아가 방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중히 예를 갖추어 황급히 인사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얼른 얼굴을 돌렸다.

경국은 북제와 달리 남녀 간의 규율 같은 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임완아에게는 할아버지뻘 나이의 태의정이 옛날 사람처럼 행동을 하자 방 안에서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오라버니가 정신은 말짱해도 태의정 대인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범약약이 웃으며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범한은 순간 심장이 서늘해졌다. 아버지처럼 염치없는 분이 태의정의 무작정 찾아와 뻗대는 기술에 넘어가 이 불쌍한 아들의 처분을 맡기시다니.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태의원과 관련된 요구에 그는 일찌감치 결단을 내린 터라 활짝 웃으며 태의정을 바라보았다.

“대인, 무슨 일로 오셨는지 본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태의정이 말하려 하자 범한은 서둘러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나 본관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니 집 밖에서 수업을 할 처지는 아니고······.”

범한은 나이 많은 선생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저택에서 몇 가지를 말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걸 책으로 엮어 태의원으로 가져가시면 되겠지요.”

태의정이 수염을 한번 어루만졌다. 이것도 나름 괜찮은 성과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말했다.

“본디 의술의 도는 직접 손 기술을 가르치는 걸 으뜸으로 치지요. 책만으로 보고 배우는 건 그리 타당한 방법은 아닙니다.”

범한이 숨을 두 번 고르고는 말했다.

“책이 나온 후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다면 내 약약이를 통해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지요.”

태의정이 매우 황송해했다.

“어찌 아가씨께서 직접 나서시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황궁에서 수술할 때 그는 옆에서 모든 걸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범씨 가문 아가씨가 직접 침을 이용하는 것도 본 터라, 그녀의 솜씨를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약약이도 아는 게 없어서 내가 집에서 교육을 해야겠지만요.”

범한이 탄식했다.

“1 황자마마께서 앞서 내 의견을 전달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 일은 심도 있게 진행될 수 없습니다. 하나 일부 유익한 주의 사항이 있으니 어의분들은 그것을 참고해도 좋을 것입니다.”

범한이 눈이 가늘게 되도록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곧 제 스승님께서 경도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분께서 태의원에서 교육을 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실력이 약약이보다 훨씬 뛰어나시거든요.”

태의정은 매우 기뻤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게 있었다.

“비 선생께서는······ 과거 제가 여러 차례 모시려 해봤지만 응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모실 방도가 없었습니다.”

“황제 폐하께 성지를 내려 달라 청할 것이니 걱정 마세요.”

범한은 어린아이 달래듯 앞에 있는 노인을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못마땅하다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태의정이 만족감을 안고 떠나자 범약약은 그제야 놀란 마음을 토로했다.

“오라버니, 저는 실제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날 밤에도 오라버니의 지시만 따랐을 뿐이라고요.”

“어쩔 수 없지 않니.”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고온 소독과 감염 격리 방법에 대해 써놓을 거야. 그 이후의 일은 스승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그리고 이참에 너도 좀 배워 두고.”

범약약은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얼굴에서 환한 빛이 돌더니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 부부는 임완아가 생각지도 못하게 시원하게 승낙을 해버리자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라버니께서 한평생 사는 거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계속해 나가라고 늘 말씀하셨잖아요.”

범약약은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말을 이어 갔다.

“그날 밤 제가 한 건 별로 없지만 오라버니께서 살아나셔서 알았어요.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인지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오라버니께서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제가 직접 나서서 가르쳐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어요.”

순간 범한은 입이 떡 벌어져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내가 한 이상한 짓 때문에 경국에 여자 의사가 탄생하게 되는 건가?’

하지만 비개가 여자 제자를 거두어 저 아이를 전생의 3대 명의인 화타, 편작, 풍화 중 어떤 인물이 되도록 키워 줄지는 더 두고 봐야 했다.

‘안 돼! 여자인데 절대 화타와 편작 같은 괴물로 만들 수는 없어! 이왕 하는 거 당연히 아름다운 서왕모 같은 풍화가 되어야 해!’

범한이 상기되어 생기가 넘치는 누이의 말간 얼굴을 보며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하다못해 경국 판 <대장금>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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