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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19화 (319/1,108)

319화

“마마, 감히 못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범한은 신하일 뿐입니다. 또한 감찰원도 감히 조정에 대고 망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1 황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곳까지 온 건 그에게는 어리석은 모험이었다. 경도를 통틀어 범한 말고 이런 말을 꺼낼 만한 다른 이가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설마 다시 진원으로나 가봐야 하는 걸까.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셨으니 그 누구도 그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도 다시 진원에 가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오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왕림하신 건······ 어떤 결단을 내리셨기에 그런 것입니까? 마마의 눈에 제가 선의로 남을 돕는 어진 신하로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범한은 그의 의중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1 황자가 잔 속에 담긴 향 차를 느긋하게 마셨다.

“범한, 자네는 다른 사람은 속였을지 몰라도 나는 속이지 못했어. 잊지 않고 있다네. 그때 현공 사당에서······ 자네가 아우부터 구한 후 부황을 구하러 나선 사실을 말일세. 그때 자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네.”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형성된 가치관 때문에 황제와 1 황자가 동시에 자신에게 미묘한 신뢰감을 갖게 된 건 범한으로서도 의외였다.

1 황자가 오늘 이곳까지 온 건 감찰원 쪽에 자신의 태도를 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또한 겸사겸사 범한에게서 무언가 유익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범한은 침묵만 유지하고 있으니 그로서도 더 이상 과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임완아가 가운데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서 나중에 경도에서 변고가 일었을 때 감찰원이 자신을 돕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범한이 유용한 정보를 알려 준다면 그는 그걸로 족했다.

“태의정이 집에 여러 번 찾아왔다던데?”

1 황자가 뜬금없이 화제를 돌렸다. 여러 해 동안 말 위에서 생활한 그로서는 관료 사회의 이런저런 꼬인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범한이 속으로만 웃고는 관련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제가 태의원에서 일하기를 바라거든요. 황제 폐하께서 반대를 하셨는데도 제가 태의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냥 한담일 뿐인데 1 황자는 외려 진지하게 나왔다.

“범한, 나도 자네가 태의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날 밤 광신궁 밖에서 어의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자네 의술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걸 나도 알게 되었어.”

1 황자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사실, 경도의 많은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네. 자네가 어떻게 범 낭자를 시켜 자신의 배를 가르고 치료를 했는지 말일세. 그래서인지 어의들은 자네를 신선으로 보고 있더군.”

범한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들 말은 믿지 마십시오. 모두 비개가 제 스승인 걸 알고 있으면서······. 만약 저들도 네 살 때부터 매일 무덤에 가서 시체를 보고 물에 부은 시체의 배를 가르고 살았다면 저와 같은 능력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랬었군. 이제 보니 모든 걸 ‘천재’라는 두 글자로 해석할 수는 없는 거였군.”

1 황자가 감탄을 하더니 다시 범한에게 권했다.

“태의원이 감찰원보다 강한 권력 기관은 아니네만 평안함을 가져다줄 수는 있네. 그러니까 태의정은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자네가 지닌 의술을 전수한다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될 거란 생각 말일세.”

그가 진지하게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 죽이는 것보다 좋은 일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는 군에 있었으니 다친 군졸들에게 좋은 의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거든.”

“왜 의술을 전수해야 하는 것입니까?”

“천하 사람들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지.”

“태의정도 똑같은 생각일까요?”

“그럴 걸세.”

“마마께서는 오늘 태의정을 돕기 위해 오신 거였군요. 어쩐지 앞서 하신 말씀이 너무 이상하다 했습니다.”

범한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범한이 득의양양하게 웃자 1 황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설마 내가 한 말을 모두 헛소리로 들은 건가?”

사실 헛소리에 가깝기는 했다. 범한에게 당당한 감찰원 제사 직을 내려놓고 의술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되라니. 그리고 누구도 권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직선적인 태의정과 1 황자는 동시에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범한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가슴 위 상처 부위가 살짝 욱신거려서였다. 이어 1 황자의 말에 깜짝 놀란 범한이 말했다.

“놀리는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태의정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는 존경심을 갖고 있답니다.”

외과 수술을 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었다. 첫째로는 마취, 둘째로는 소독, 셋째로는 기구였다. 지금 이 세계의 수준으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범한이 마취용으로 사용하는 건 가라방이었고 소독용으로 사용하는 건 경항이었다. 이는 모두 자신의 신체 기능이 강했기에 사용 가능했다. 만약 다른 백성들에게 사용한다면 약에 중독되어 죽기보다는 오히려 부작용으로 죽을 수 있었다.

기구와 관련한 문제는 더 난이도가 높았다. 범한과 비개가 다년간 방법을 생각해 보고 3처가 그동안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혈 문제도 아직 해결이 안 됐는데 어떻게 개복을 한단 말인가?

범한은 위의 문제점들을 1 황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단어들을 써가며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1 황자도 드디어 범한이 쓴 의술은 강력하고 위험한 방법이어서 환자의 몸과 칼, 미약이 서로 안 맞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 그리고 범한도 어려서부터 수행하지 않았다면 견뎌 내지 못했을 거란 사실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래도 서역 정벌군 중 화살에 맞아 치료받지 못한 군졸이 떠올라 1 황자는 유감스러운 마음에 다리를 한 대 툭 치며 탄식했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단 말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 범한은 누이의 유난히 차분했던 손놀림이 떠올랐다. 범한이 1 황자를 안심시켰다.

“기본이 되는 물건들은 며칠 후 약약이를 태의원으로 보내 의원들에게 참고시키도록 하겠습니다.”

1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먼저 자네는 백성에게 복을 준다는 말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군.”

이는 1 황자가 범한에 대해 갖고 있는 궁금증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범한은 이익을 중시하는 권력을 쥔 신하였다. 하지만 몇 차례 마주하면서 범한의 포부는 겨우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 것 같았다.

범한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백성에게 복을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꼭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지요.”

1 황자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마마께서 서역에서 수년간 서호와 교전을 벌이며 무수히 많은 적을 죽인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서호가 침입하는 걸 막은 것이니 이 역시 백성에게 복을 준 셈 아닙니까?”

범한의 아첨에도 1 황자는 침착하게 꾹 참고 있었다.

“다시 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감찰원은 음험하고 무서운 밀정 기관이라고만 여기고 있지요. 하오나 제가 감찰원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고 최대한 올바른 길로만 가도록 한다면, 우리 경국 조정의 천하는 견고할 것이며 이로써 천하 백성들도 편안히 살 수 있을 테니······ 이것이야말로 백성에게 복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적은 어쩌면 같을 것입니다. 하오나 방법만큼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범한의 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전생의 초등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처럼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소설가 루쉰이 <후지노 선생>이란 수필에서 밝힌 의과 대학을 관두게 된 일화를 말해 주었다. 물론 이 내용은 장묵한이 지니고 있던 고서에서 우연히 발견한 천 년 전 이야기라고 둘러댔다.

1 황자는 조금 경악했다.

“국민의 몸을 구하는 것보다 국민의 정신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1 황자가 다리를 툭 치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우리 경국은 이야기 속 나라처럼 연약하고 무능하지 않다네. 그러니 문치로 교화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1 황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경국 국민은 소박한 풍속과 맑고 깨끗한 자기 발전의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전생의 루쉰이 질식할 것만 같다고 말한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 중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이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의원이 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저에게 문인까지 그만두라고 한다면 저란 사람은 뭐가 되겠습니까? 의술을 버리고 정치를 해야 할까요? 문인의 길을 포기하고 군대에 가야 할까요?”

1 황자는 여전히 범한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네는 정말 천재적인 인물이야. 그런데 왜 가슴속에 있는 학문을 모두 풀어 놓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이 세계가 더 좋게 변한다면······.”

범한이 살짝 힘겹게 손을 내저었다.

“대부분 사람은 이 세계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는 정말로 드물죠. *저는 일단 자기 자신부터 바꾼 후 이야기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전 이 세계를 바꾸려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말로는 죽음이었다. 범한은 그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이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교적 이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는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실려 있었다.

1 황자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 웃었다.

“자네에게 상을 내리는 성지가 왔나 보군. 이제야 오다니.”

그런데 범한은 자조적으로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숨어 있는 건 자기 몸 상태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러니 앞장서서 천하 걱정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 * *

범씨 가문으로 황명을 받들고 온 요 태감이 세 번 포성을 울렸다. 저택 내부에서는 서둘러 향을 올릴 상을 준비하고 길을 청소한 후 모든 사람이 대청으로 가 대기했다.

한편 그사이 1 황자와 북제 공주는 계속 남아 있기 뭐해 돌아갔고 태의정은 꿋꿋하게 서재에 앉아 있었다.

성지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건 중대사였으므로 범한도 어쩔 수 없이 침실에서 들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황제는 범한이 치료 중인 걸 감안해 침대에 누운 채로 성지를 받을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요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범한은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적지 않은 물건을 내려 주셨음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고 있는데도 끝날 줄 몰랐다. 범한은 포상 내역에 신경 쓰지 않았기에 진지하게 듣지도 않았다. 요 태감의 목소리는 오히려 최면제 같았다. 따스하고 푹신한 긴 의자에 누운 채 눈만 살며시 뜨고 있었더니 곧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범건 상서가 가볍게 기침을 한차례 하며 눈빛으로 범한에게 주의를 주었다. 임완아도 살짝 놀라 범한의 손바닥을 살며시 꼬집어 주었다. 그 바람에 범한은 억지로라도 두 눈을 뜨고 버티고 있다가 마지막 내용은 들을 수 있었다. 비단 5백 필, 몇 무의 밭, 금괴 약간······. 한데 신선하고 재밌는 건 없었다.

범씨 가문에는 은전 빼고 있는 게 없었다. 이는 경국 사람들도 다 아는 일이라 황제 폐하는 은전을 상으로 내리지는 않았다. 대신 범한에게 작위를 돌려주고 범건의 작위도 1등급 상향 조정하여 부자에게 영예를 안겨 주었다.

성지를 모두 읽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흩어졌다. 그러자 요 태감은 작은 소리로 황제의 밀지를 읽어 내려갔다.

한데 말만 밀지였고 단순히 황제 폐하의 좋은 뜻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면 그다지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범한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자신에게 일곱 호위를 내려준다는 내용을 들어서였다. 범한은 그제야 황제 폐하께서 인색한 분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성지에 나온 황제 폐하의 다른 뜻은 무의식적으로 흘려들어 버렸다

지금 범한이 가장 걱정하는 건 자신의 신변 안전이었다. 내년에 강남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정기가 원상회복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죽 아저씨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갈수록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 범한으로서는 오로지 스스로 방법을 찾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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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석 : 이 문장은 QQ라는 SNS에서 우연히 본 걸 가져온 것입니다. 읽었을 때 꽤 의미 있는 글이다 싶었고, 이내 수많은 청대, 명대, 당대, 이공간계와 관련한 내용이 떠올랐지요.

범한은 이 세계를 바꾸는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작가인 제가 게을러서 그도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의 엄마가 너무 부지런한 거였어요. 셋째, 제가 어떤 부분에서는 지적 수준이 허접해 전문적인 건 쓸 수 없어서입니다. 예를 들어 외과 수술 같은 건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거든요. 그러니 황당하고 웃긴 부분이 있어도 모두 그냥 웃어넘기고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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