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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18화 (318/1,108)

318화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사고검의 제자라고 말씀하셨으니 신하 된 입장에서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특히나 황제 폐하께서는 그냥 하신 말씀일지라도 향후 몇 년간 조정의 동향을 결정할 수도 있는 내용이니까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경국이 무를 숭상하는 건 천하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작년에 자신이 외양간 거리에서 검수를 만난 일은 황제 폐하께 북쪽으로 출병할 좋은 구실거리가 되었고, 그로써 경국은 넓은 영토를 점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황제 폐하께서 죄를 뒤집어씌우고 핑곗거리로 삼는 취미에 인이 박인 신하들은 그 누구도 감히 나 잘났소, 하는 식으로 나서서 않았다.

현공 사당에서의 일을 원칙대로 처리한다면 범한이 직접 감찰원에 나가 어린 내관을 심문하고 검수의 시체를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범한은 현 상황에서 불분명한 게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던 터라 자신이 더 깊게 파고들어도 되는지 일단 따져 보기만 했다.

그리고 범한은 몸이 안 좋기도 해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직접 감찰원에 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 대인을 포함해 모든 가족이 그의 출타를 막고 있었다.

범한은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도 감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는 목숨 아끼기를 황금같이 하는 사람인데 지금은 체내에 있던 정기가 모두 흩어져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너무나도 낙담한 나머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유난히 더 조심하는 중이었다.

물론 범한은 자신이 공력을 모두 잃은 상태란 걸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소리를 내며 누군가 서재 문을 여는데도 문밖에 있는 호위 무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범한이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살짝 틀어 보니 역시나 아내와 누이였다.

등자월은 제사 부인과 아가씨 얼굴에 살짝 노기가 서린 걸 알아차렸다. 이에 자신이 그만 나가 봐야 할 때인 걸 눈치채고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물러갔다. 범한은 그에게 언빙운을 불러 달라는 말을 전하려 했지만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얌전히 치료에만 신경 쓰라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그쪽 일에 신경을 쓰다니요.”

두 사람이 손발을 맞춰 가며 열심히 연습한 것처럼 범한에게 약을 새로 발라 주고 약을 먹이면서 한 소리 해댔다.

범한이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 이름은 잘못 지어진 것 같아요. 도통 한가로울 새가 없다니까요.”

왜 한가로울 수 없는 걸까. 범한이 출궁해 집으로 돌아오자 그 순간부터 범씨 가문 저택이 경도에서 가장 떠들썩한 곳이 되어 버렸다. 3원 3사 6부의 관원들이 하루 종일 줄기차게 병문안을 왔고, 수많은 권문귀족들은 너도나도 문지방을 밟아 댔으며, 대신들은 자신들의 파벌도 신경 쓰지 않고 범한에게 잘 보이려 했다. 이에 범씨 가문 저택 대문이 있는 성 남쪽 거리는 검은색의 마차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있었고 선물 상자도 용이 휩쓸고 지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범씨 가문 저택에 오는 사람들은 귀한 약재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범한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이에 범한은 진짜로 유명한 약재를 뺀 나머지를 모두 포월루로 가져가 처리했다.

현공 사당의 검수 사건으로 범한은 경국에서 대단한 권세를 쥔 대신이 되었다. 이전에 갑자기 성장해 감찰원 제사가 되었을 때와 비교한다면 이번에는 황제의 목숨을 구한 공이 기반이 되어 주었다. 이에 그의 권세는 예전보다 더욱 견실했고 경국 관원들에게는 두려움이 일도록 만들었다.

관원들에게도 보고 듣는 귀가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다친 후 황궁에서 여러 날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궁에서 흘러나온 소식에 따르면 범한이 치료를 받던 날 밤 황제 폐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와 같은 성은을 입다니, 이는 범한이 진평평이란 홀아비와 견줄 수 있을 만큼 총애를 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많은 이들이 조심스레 범씨 가문에 아부하는데 그것이 과연 범한에게 진정으로 승복해서 한 행동이었을까. 특히나 용맹한 젊은이들의 경우도 그랬을까. 그들은 ‘황제 폐하께서 검수의 습격을 받을 때 자신은 왜 그분 곁에 있지 못했을까.’라고 아쉬워하며 범한이 운이 너무 좋았다며 질투했다.

“이번에 집에 은전이 많이 들어왔군.”

농담이 아닌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전생에 어느 작은 행정 구역의 수장이 병이 나자 몇백만 원을 벌어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 높은 대신이 되어 보니 경국도 대놓고 뇌물을 주는 사회였다.

“우리 나리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시네요.”

임완아가 담담하게 웃더니 아이를 달래듯 그에게 약을 먹였다. 임완아는 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저들 신하들이 아첨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치료 중인 범한은 병문안을 핑계로 아부하러 온 관원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있었던지라 애꿎은 범건 상서만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에 범건은 조정에서 국사를 돌보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모든 시간을 손님 접대에 쓰고 있었다.

범약약이 방문자들을 향해 원망을 쏟아 냈다.

“그냥 한 번만 오고 말 것이지 왜 계속 오는지 모르겠어요. 이쪽에서 귀찮아하는 건 생각도 안 하나 봐요.”

“각부 대신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에요.”

임완아가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감탄하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웃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태의정이더라고요. 정말 인내심 하나는 대단해요. 앞서 네 번 왔는데도 상공이 만나 주지 않았잖아요. 결국 황제 폐하께서도 그에게 한 말씀 하셨대요. 상공은 태의원으로 갈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렸어요. 아까 등 대가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태의정이 오늘도 왔대요. 그리고 저 서재에 들어앉아서 나갈 생각을 않는다는군요. 아버님께서 차 대신 냉수를 내주면서까지 눈치를 주셨는데 모른 척하고 있대요.”

임완아가 혀를 끌끌 차며 감탄했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범한은 소리가 나게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도 낯짝 두껍기로는 경국 제일인 태의정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탄복하는 중이었다.

그날 밤, 황궁에서 태의정은 범한의 의술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쫓겨나지 않고 광신궁에 남아 몰래 훔쳐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데 그 일로 범한의 의술이 기묘하다는 걸 알고는 어떻게든 범한을 태의원으로 들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범한에게 ‘이상한 의술’을 전수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 마음이 얼마나 견고한지 계속 찾아오더니 이제는 막무가내로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경국 의원 입장에서는 외과 수술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범한이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명줄이 길어서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외과 수술을 보급하려면 몇 가지 중대한 난제들부터 해결해야 했으므로 실제로는 보급이 거의 불가능했다.

범한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여 상처 부위의 붕대를 정리해 주고 있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돌연 어떤 가능성이 생각났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서재에서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문소리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님이 왔습니다.”

문밖에서 하인이 공손하게 아뢰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임완아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 *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에 온 손님은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는 얼굴로 불청객 1 황자를 맞았다.

“황궁에 있을 때 오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1 황자마마께서는 매화 정원으로 납시지 않고 오늘 이곳으로 행차하신 것입니까?”

임완아 역시 입을 삐죽 내밀며 타박했다.

“큰 오라버니, 저택에 손님들도 많은데 어찌하여 이런 북새통에 오신 것입니까?”

1 황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누이가 시집간 지 이제 겨우 1년여 남짓. 그런데 어찌하여 온통 시댁 편만 드는 건지.

“왜 그리 말이 많은 게냐.”

오라비와 여동생이 서로 몇 마디 승강이를 벌이다가 1 황자가 그냥 져주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큰 공주도 나와 함께 왔느니라. 지금 범 부인과 대화 중이니 신아 너도 가보거라.”

그가 말한 큰 공주는 당연히 북제에서 혼인을 하기 위해 경국까지 천 리 길을 온 여인이었다. 범한은 놀라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 두 남녀가 혼인 전에 이렇게나 감정을 키워 갈 줄은, 더군다나 황실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궁에서 외출하도록 놔둘 거라 생각 못 해서였다. 그리고 범한은 귀국길에 큰 공주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누어 봤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임완아와 범약약은 말로만 듣던 이국의 공주에게 크나큰 호기심이 있던 터였다. 그래서 1 황자가 범한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두 사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서재에 고요함이 흘렀다. 범한이 살짝 오른손을 들어 상대에게 차를 권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1 황자마마, 축하드립니다.”

금군 대통령이 된 걸 축하해 준 것이었다. 한데 1 황자는 순간 미간이 경직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내 미간에 들어간 힘을 풀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엇이 축하할 일이란 말인가? 본왕은 서쪽 정벌을 하는 대장군인 것을.”

범한이 웃으며 받아쳤다.

“2등급이 강등되기는 하셨지만 그리도 금군의 핵심 아닙니까. 그러니 변방의 음산(陰山)과 같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범한의 말 속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건가 싶어 1 황자는 그를 쓱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다시 입을 뗐다.

“본왕은······ 금군 대통령을 맡고 싶지 않아. 북쪽으로 보낸 연소을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보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연소을을 저 멀리 보내시고 섭씨 가문을 배제하신 건 신양에 있는 미친 장모를 방어하시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북쪽으로 간다면 연소을은 기뻐할망정 황제 폐하께서는 대단히 씁쓸해하실 겁니다!’

“1 황자마마께서 이 환자를 보러 오신 게 직장에서의 고충을 토로하기 위해서란 말씀은 마십시오.”

범한이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듣는 것만큼은 잘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들어 주는 것만으로는 안 되네.”

1 황자가 범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비록 ‘직장’이란 게 무슨 뜻인지 이해는 못 했지만.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 있어.”

‘내가’라고 했다. ‘본왕’이 아니고.

범한은 황자가 별안간 호칭을 바꾸어 사용해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이제 보니 동이성 혈통의 1 황자는 진지하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이런!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못마땅해 속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후 1 황자를 보았다.

“금군 대통령은 중요한 위치 아닙니까. 황제 폐하께서 마마의 충성을 신임하시니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범한, 신하로서 어찌 헛된 의견을 내겠습니까!”

그러자 1 황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한, 솔직하게 말하지. 경도로 돌아온 초기에는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네. 서쪽에 있을 때 경도에 시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어. 한데 무장인 나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다네. 천하 백성들과 조정 문무백관들에게 어찌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도······.”

그가 화제를 돌렸다.

“한데 경도로 돌아와 몇 달 동안 자네를 지켜보니 행동은 매서운데 따스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았더군. 그리고 일을 할 때는 재능까지 발휘하고 말일세. 둘째를 제대로 혼내 준 건 일단 차치하더라도 현공 사당에서의 일로 자네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어.”

“그리고 황궁에서는 자네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상처까지 치료하지 않았는가!”

까만 얼굴의 황자가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과연 자네가 해결 못 할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 그러니 자네가 꼭 내 일을 도와줬으면 하네.”

대놓고 칭찬하는 통에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평평은 1 황자가 어려서부터 일부러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지내 남들과 다르니, 함께 있게 되면 가급적 멀리 피해 앉으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칼을 쓰지 않고도 살인이 가능한 황제 폐하가 1 황자를 혼탁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었으니 황자가 분노하며 반항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 황자의 세력은 대부분 군 측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조정 내부에서 계략을 짜는 것과 관련해 도움을 줄 만한 측근이 없었다. 단지 지금 문제는 1 황자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점이었고 이는 범한으로서는 정말로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범한은 이렇게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형제’가 생겨 기뻤다. 그리고 지금 1 황자가 처한 처지를 동정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결연하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이와 같은 생각을 떨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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