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의 귀빈이 3 황자를 데리고 화원을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임완아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의 귀빈께서는 늘 편한 모습인데 어째 오늘따라 긴장한 모습이신데요?”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아이가 컸으니 어머니로서 예전 같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나중에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저분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임완아가 난처한 낯빛으로 자기 배에서 아무런 신호가 없다는 걸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상공이 다친 마당이니 그 말을 하기 곤란해 억지로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밖에서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대요? 천지개벽할 정도로 소란이 인 건 아니겠죠?”
그러자 범한이 나지막한 소리로 의 귀빈으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는 멀찌감치 있는 내관과 궁녀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바람이 조금 차군요. 안으로 들어가야겠어요.”
황궁의 아랫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기 불편한 게 있음을 안 임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관을 불러 긴 의자를 들도록 했다.
* * *
방 안으로 돌아온 범한은 침대에 누워 침대 꼭대기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후 입을 뗐다.
“당신이 보기에 섭씨 가문은 이번에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방 안에는 단둘뿐인 터라 범한은 거리낌 없이 말을 이어 갔다.
“궁전은 분명 황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낙주로 간 걸 테지요. 게다가 분명 그것은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궁전은 황제 폐하께서도 감싸 주실 수 없는 사실을 말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범한은 순간 한기가 들어 몸이 떨렸다.
“황당한 방법이긴 하나 그래도 먹혀들었어요. 황태후마마께서 궁전을 낙주로 보내셨으니 그는 금군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였어요. 하지만 그 때문에 현공 사당에 검수가 출현했죠. 만약 심문 때 궁전이 황태후마마의 밀지로 경도를 떠났다고 강변한다면, 이는 곧 천하에 황태후마마께서 황제 폐하를 죽이려 했다고 알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만약 궁전이 9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할 생각이 아니라면,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자기 혼자 짊어지고 갔어야 하는 비밀이었어요.”
임완아와 범약약은 총명했기에 황태후께서 현공 사당 사건을 주도했다고 믿지 않았다. 이에 임완아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에는 궁전이 낙주로 간 건 외할머니와 황제 폐하께서 함께 계획한 일이란 건가요?”
범한이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범약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신 걸까요?”
그러자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궁전은 금군 대통령이면서 섭중의 사제야. 이번에 그가 잘못을 뒤집어쓰면 섭씨 가문도 자연스럽게 죄를 뒤집어쓰게 되어서야.”
임완아가 친구 섭령아 걱정을 하며 탄식했다.
“섭씨 가문은 그동안 충성을 바쳐 왔어요. 그런데 왜 황제 폐하께서는······.”
범약약이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모두 그녀가 말하려는 뜻을 알아차렸다. 이에 범한은 한숨을 내쉬며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황제 폐하께서 섭씨 가문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선택은 당연히 하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의심이 든 이상은 섭씨 가문을 근신하도록 하는 선택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적어도 경도란 주요 지역을 섭씨 가문의 두 형제에게 지키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였죠. 제일 중요한 문제는 섭씨 가문에 경국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대종사가 있다는 거예요. 섭류운만으로도 섭씨 가문은 하룻밤 사이에 죽지는 않으니까요. 이 정도의 잘 알려진 이유만으로도 섭씨 가문은 건드릴 수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니 황실의 체면을 크게 깎을 수 있는 그런 수를 쓸 수 있었던 거예요.”
범한이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신하들이 냉담하게 돌아설 건 걱정하지 않으셨던 걸까요?”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왜 섭씨 가문을 의심하신 거죠?”
“그거야 간단해.”
범한이 설명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2 황자와 섭령아를 혼인시킨다고 하셨잖아. 만약 섭중이 정확히 판단했다면 그때 혼사를 거절했어야 해. 설령 혼사를 받아들인다 해도 가장 먼저 경도 수비 자리를 내려놓았어야 했어. 아니면 변방으로 옮겨 가거나. 그렇게 해서 황제 폐하께서 안심하시도록 만들었어야 했지.”
“그런데 그분은 이 둘 중에서 단 하나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임완아와 범약약이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범약약이 못 참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사정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있었군요.”
“북제에 있을 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한데 황제 폐하께서 이런 옹색한 방법을 쓰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한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던 임완아가 끼어들었다.
“이제 보니 현공 사당의 검수는 황제 폐하의 의중을 파악해서 일을 벌인 거였군요?”
범한이 임완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다 계획적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중 하나는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만드셨단 거예요.”
임완아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위험을 무릅쓰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불을 낸 정도만 하셨을 거예요.”
부부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처럼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공 사당의 불을 만약 황제 폐하께서 직접 놓으신 거라면 그 후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은 대체 누가 한 짓인 걸까.
범한이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검수가 정말 우연히도 때를 잘 맞춘 거군요. 나조차도 한 곳 아니면 여러 곳에서 내놓은 단일 계획이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때를 잘 맞췄어요.”
“그냥 우연이었을 뿐이에요.”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단지 황궁 안 여러 곳에 숨어 있던 검수가 현공 사당에서 어떤 일이 터지니까 때는 이때다 싶어 봇물 터지듯 공격을 해온 걸 거예요. 그러니 이번 검수 공격은 어떤 모의 없이 그냥 갑자기 일어난 것뿐이에요.”
범한이 마지막 혼잣말을 했다.
“분명해. 이건 정말 신선국(神仙局)이야. 그러니까 우연의 일치일 뿐이란 거지.”
* * *
황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우중충한 건물 내부,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은 한마디도 않고 있었다. 일곱 수장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검수의 공격을 받은 건 금군이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했지만 금군을 빼면 감찰원이 가장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어서였다.
만약 황궁 안에 누워 있는 범한 제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어쩌면 감찰원 역시 섭씨 가문처럼 황궁에서 내려오는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4처 수장으로 등극한 언빙운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밀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서호가 호위병 속에 잠입시킨 검수, 15년 전 경도 피의 밤에 도망친 어린 내관, 소문만 무성한 사고검의 아우, 이들이 서로 계획을 모의한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불은 대체 누가 놓은 것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각 처에서 올라온 정보를 보면 북제 금의위는 혼란 중에 있다고 하니 그런 일을 벌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동의성이 이번 일을 모의했다는 정황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6처의 수장 임무 대행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사고검에게 아우가 있다는 건 소문만 무성할 뿐······ 그자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이는 없습니다.”
정보 수집과 분석을 맡고 있는 2처 수장이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수치스러워했다.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소인이 업무를 소홀히 한 것이겠으나 이러한 살인 사건을 계획하려면 오가는 정보가 분명 있어야 합니다. 하오나 저희는 그와 관련해 아무런 실마리도 잡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 생각으로는 암살을 모의한 사람들 간에 서로 접촉한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더 과감히 추측해 보건대 그 검수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이 서서히 눈을 뜨더니 혼탁한 눈빛으로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불은 황제 폐하께서 놓으라 하신 거니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한데 서호 검수하고 그 용감한 어린 내관하고 신출귀몰했던 자가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어찌 알겠는가. 황제 폐하와 이 몸이 신선도 아니고 말이야.’
“이건 우연히 맞아떨어진 신선국일 뿐이네.”
노인이 하품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냥 모든 게 우연 아닌가. 그런데도 뭘 그리들 많이 생각하는 것인가.”
경국 감찰원 조례의 보충 설명 부분은 일단 무시하고 감찰원 내부의 참고 자료 제5권 마지막 쪽을 살펴보겠다.
제5권은 감찰원이 다년간 기록해 온 사건 모음집이다. 몇십 년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안건들에 대한 최종 분석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각종 안건의 계획부터 심화 단계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변수, 영향력 및 최종 결과가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제5권에는 사건 관련 기록이 많이 담겨 있으며 그중에서도 감찰원 정보 체계 및 사건을 조사하면서 찾은 증거와 관련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음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인류의 상상력은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정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의 안건에서 사람의 힘으로 찾아낼 수 있는 원인은 기껏해야 하나 또는 두 개 정도이며 모든 상황을 다 아우르는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다. 이에 제5권의 맨 마지막 쪽에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으며 그 세 글자는 범한과 진평평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신선국(神仙局).
* * *
이른바 신선국이라 함은 사건에서 상식만 가지고는 알아낼 수 없는 변수를 이르는 것으로 신선도 예단할 수 없는 국면을 불러왔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를테면 과거 진평평이 흑기를 몰고 천 리를 이동해 북위 국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아들 혼례에 참석하기 위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소은을 잡을 때 바로 이 신선국이 펼쳐졌었다.
당시 감찰원은 사전에 모든 세세한 부분을 계산해 둔 상태였으며 심지어 더 심각한 대가를 치를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은은 혼례를 위해 비개가 정성스레 준비한 맛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북위 밀정 두목은 냉정함을 넘어선 냉혹한 수준에서 음식을 비롯한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경국 사람들이 음모가 계획처럼 흘러가지 않을 거라 여겼을 무렵, 정말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소은이 신방에서 흘러나오는 다투는 소리에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찾았다. 소은은 자신이 마시는 술은 가죽 주머니에 담아 두었다. 그런데 때마침 주머니에 술을 채워 두는 일을 하던 근위병 대장이 술이 너무 당겨 그 안에 있는 술을 모두 마셔 버린 후였다. 이에 자기 책무를 저버린 친위대 대장은 소은이 술을 찾자 너무 당황해 혼례를 위해 준비된 술을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결국 소은은 독에 중독이 되고 진평평과 비개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 진평평 쪽에서는 그 당시 소은이 왜 답답해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그의 아들이······ 남자 구실을 못 해서였다.
이와 같은 변수는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국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건 분명했다.
그리고 또 20년 전에 남쪽의 어느 소금 상인이 생일잔치를 연 후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도 신선국이라 할 수 있었다. 형부에서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 감찰원 4처로 이관해 조사를 하다 보니 그날 밤 현장에 있던 혐의자 수만 해도 무려 열네 명이었다. 소금 상인의 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 갑부가 빨리 죽어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구였을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어느 가난한 늙은이가 구운 떡을 훔치다가 관아에 잡혀가는 일이 일어났다. 그자는 살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3년 전 소금 갑부를 죽인 게 자신라고 털어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감찰원 4처는 전문가인 자신들이 진짜 혐의자를 놓쳤다는 이유 때문에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에 서둘러 남쪽으로 내려가 심문을 해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노인과 소금 상인은 어려서부터 이웃 간으로 함께 자란 사이였다. 훗날 노인은 오주로 이주해 살았고,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소금 장수가 생일잔치를 하는 걸 보고는 왜 그런 나쁜 맘을 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원으로 숨어 들어가 돌을 집어 들고 술에 취해 있는 소금 상인을 내리쳐 죽여 버렸다고 했다.
당시 감찰원은 담벼락에 쓸린 흔적이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한데 귀향한 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정원으로 기어 들어가, 그것도 호위 무사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나쁜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당시 4처를 책임지고 있던 언약해는 궁금해서 노인에게 물어보았었다.
“나중에 사건 기록을 보니 당신에게도 물었더군. 그런데 그때는 왜 전혀 긴장하지 않았던 거지?”
그러자 노인이 답했다.
“긴장할 게 뭐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언약해는 그렇게나 흉악한 사람은 태어나 처음 봤다. 그래도 여전히 궁금한 게 있어 더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자를 왜 죽인 것인가?”
그러자 노인은 너무나도 떳떳하게 답했다.
“어릴 때 그놈이 내 따귀를 한 대 때렸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