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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14화 (314/1,108)

314화

범한은 누워 있던 터라 고개를 돌리기 힘들었다. 이에 곁눈질로 여인들과 아이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성아의 도움으로 천천히 동충하초 탕을 마셨다. 성아가 그릇을 가져가면서 범한의 손바닥을 꼬집듯이 빠르게 만졌다. 순간 범한도 날카로우면서도 매끈한 그녀의 손가락 끝을 느꼈다.

범한은 약간 당황했지만 성아가 자신을 희롱하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님을 금세 알아차렸다. 의 귀빈이 자신과 단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다는 뜻이어서 범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완아, 3 황자마마와 함께 정원 산책 좀 다녀와요. 약약아, 너도 함께 가거라.”

아가씨와 형수가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봤지만 그들도 이내 의 귀빈이 할 말이 있어서 그럴 것이란 걸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기 싫어하는 3 황자와 시중을 들고 있던 내관과 궁녀까지 모두 데리고 정원 먼 곳까지 갔다.

이렇게 되면 음풍각에는 범한과 의 귀빈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한데 청춘기의 신하와 젊은 마마가 단둘이 있는 건 불편한 일인지라 성아가 알아서 자리를 지켰다.

범한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성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의 귀빈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집에서 데려온 아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모님.”

범한이 힘겹게 웃었다.

“무슨 일이시기에 이리 조심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조카, 상처가 심해 깨어난 지 이틀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의 귀빈이 손수건을 내저으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으면 네가 찾아와 줄 것도 아니잖니!”

절대로 이상한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범한이 지금쯤이면 궁 밖 소식에 목말라 있을 거란 걸 알아차려서 한 말이었다.

현공 사당의 검수 사건은 정말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황궁 내 높은 분들도 걱정하고 조정 신하들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경도 백성들도 너무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었다. 이들은 식사 중에, 술을 마시는 와중에 큰 소리로는 검수를 욕하고, 소리를 낮추고는 검수가 어디에서 왔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이렇게 추측만으로도 몇백 개의 답안이 나와 있는 상태였다.

의 귀빈은 황제 폐하께서 범한이 아무 생각 없이 치료에만 매진하기를 바라셔서 그에게 들어가는 모든 정보를 차단한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범한을 돕고 득을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마마를 질책하실 텐데 걱정 안 되십니까?”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때가 되었잖니.”

의 귀빈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그리고 잠시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너 말고는 내게는 희망을 걸 곳이 없구나.”

범한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황궁에 있는 네 명의 마마에게는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황후는 말할 것도 없고 영 재인과 숙 귀비의 황자들은 모두 성인이라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여기 있는 의 귀빈은 훌륭한 집안 여식이고 더군다나 황궁 밖에는 범씨 가문이라는 아군이 있었음에도 3 황자는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다.

범한이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현공 사당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했다.

이미 아들의 입을 통해 한차례 들은 내용이었지만 의 귀빈은 그때 벌어진 일을 무서워했다. 양손으로 손수건을 쥐어짜고 있는 모습은 호위병들 사이에 숨어 있던 검수의 칼에 아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의 귀빈이 이야기를 다 듣고는 증오감을 드러냈다.

“어떻게 검수를 호위병인 시위 안에 숨겨 놓을 수 있었지? 황궁 내 시위 3대 관련자가 정말 샅샅이 조사를 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게 셋······.”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셋째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가 형이니 마음대로 하렴.”

“셋째를 노린 것은······.”

범한이 소리를 낮추고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 검수는 일단 아무나 죽이려 한 거였는데 그게 우연히 셋째였던 겁니다. 그자가 노린 건 황제 폐하였으니까요. 그러니 이모님, 이제 염려 그만 놓으세요. 태자마마께서는 황실 내 자기 위치 때문에 걱정 중이시고 또 둘째는 저와 관계가 좋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해서 검수가 아직 어린 셋째를 가장 먼저 인질로 삼으려 정한 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말을 황궁 안에서 하다니 담이 큰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음풍각 주변에 엿듣는 이가 없기는 했지만 의 귀빈의 낯빛이 살짝 이상해지더니 그녀가 이내 부자연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궁 내부에서 누군가 자기 아들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가장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범한이 분석해 주자 일단 마음이 놓였다. 그러자 그녀는 범씨 가문내 상황과 궁 밖에서의 조사 상황에 대해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범한은 조사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몰랐다. 그런데 의 귀빈의 경우 친정의 배경 덕분에 수많은 감시자를 두고 있는 터라 그녀가 가져온 내용은 실제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궁전이 이미 잡혔다는구나.”

범한은 정말로 많이 놀랐다. 하지만 “그렇군요.”라고 대답만 할 뿐 겉으로는 놀란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의 귀빈이 ‘잡혔다’라는 단어를 썼다는 건 조정에서 이미 이번 사건과 관련한 성질을 규정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금군 대통령이자 시위의 총책임자가 정작 현공 사당에서 검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폐하 곁에 없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는 금군 대통령직을 땅바닥에 던져 버린 것도 모자라 발로 짓밟은 것이었다. 즉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이 더 궁금했던 건 대체 이 멍청하기 그지없는 금군 대통령이 그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냐는 점이었다.

* * *

“그는 경도에서 40리 떨어진 낙주에 있었다는데 그자의 말로는 황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러 간 거라고 했었다는구나.”

이 말을 하는 의 귀빈은 의혹에 찬 눈을 하고 있었다. 그자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한 말일지라도 ‘황명’이란 단어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되었다. 이 말이 황제 폐하께 들어간다면 그는 즉시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감찰원이 이틀 동안 심문을 하면서 거기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 알아내려 했는데 알아낸 게 없다고 했어.”

범한이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쉬더니 탄식했다.

“궁전은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군요.”

“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황제 폐하께서 그에게 낙주로 가라 한 게 아니라도······ 그건 분명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검수 사건이 발생했어도 굳이 그분을 언급하면서까지 자신의 결백을 밝혀야 했을까요? 궁전이 그리 말해도 황제 폐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실 테니 그건 자기 목숨을 재촉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요.”

범한의 대담하고 직설적인 말투에 의 귀빈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신경 끄자꾸나.”

“그렇군요. 제게는 관여할 자격이 없었군요.”

범한이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섭씨 가문이 이번 일로 정말 큰 고초를 당할 텐데 검수의 신분은 밝혀졌습니까?”

“처음 공격한 검수가 9등급 고수였대.”

의 귀빈의 눈에서 두려움이 살짝 스쳤다.

“듣자 하니 서쪽 오랑캐인 서호 좌현 왕부의 검수라고 했어. 경국에 잠입한 지 14년이나 되었고.”

“어떻게 또 서호와 관련이 있을 수 있는 거죠?”

범한이 이상히 여기며 더 질문을 했다.

“오랑캐들이 어떻게 그리 오래 황궁에 숨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말입니다.”

“그 서호 사람의 내력이 정말 대단했어.”

의 귀빈이 어찌 말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고는 설명을 해나갔다.

그제야 범한은 홍 태감의 손에 죽은 서호 검수가 옛날에 경국이 개국할 때, 그러니까 서호와 경국이 화친을 맺을 때 보내온 ‘가짜 공주’의 후손인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경국인 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때 당시 서호와의 화친은 정말 유명한 사건이었다. 서호가 경국에게 가장 처참하게 깨지고 있을 때였다. 서호에서는 자발적으로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고 그때 화친 파들이 후손들을 경도로 보냈다. 하지만 경국 사람들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의 귀순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그때 화친 파들은 비참하게 서호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고수 하나가 돌아가지 않고 경도에 남아 있다가 이런 사달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황궁까지 숨어들어 시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까? 대체 그때 일 처리를 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 일을 처리한 자는 이미 죽었단다.”

의 귀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 일이 이렇게 커진 거겠지.”

범한이 속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번 일에 대해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린 내관이 아직 살아 있으니 감찰원이라면 알아냈을 텐데요?”

범한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의 귀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사야 다 끝냈지. 어린 내관은 15년 전에 경도에서······ 그때 풍파 때 죽은 왕공의 후손이었어. 그때 경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거든. 한데 왕공부에서 종 하나가 아이를 안고 도망친 거야.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부에 빠져 있었던 거고······ 아이를 안고 나온 종은 자살했다나 봐. 아이는 경도 외곽의 어느 농부의 손에서 자라 나중에 입궁을 하게 된 거였어.”

“그렇다면 비수는 어떻게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까?”

범한이 보기에 그게 진짜 큰 문제였다. 어린 내관으로서는 내놓을 수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의 귀빈이 이어서 말해 준 내용에 범한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3년 전, 그 어린 내관이 국화 감상 모임이 있기 전에 현공 사당 꼭대기 층을 청소했대. 그때 비수를 숨겨 둔 거였고. 감찰원이 비수를 만든 자를 찾아서 시간을 확인했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내관은 15년 전 경도에서 피바람이 불던 날 밤 살아남은 아이였다. 범한은 피로 물든 그날 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황제, 진평평, 아버지가 어머니 복수를 하기 위해 직접 계획한 일이었다. 그때 경국에서 최대 열 곳에 달하는 왕공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대체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심지어는 황후의 가족도 모조리 참수형에 처해져 지금은 그녀 혼자만 살아남았다. 어찌 되었든 그 어린 내관에게 대체 어떤 게 더 숨어 있는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서호, 왕공······ 이들은 황제에게 검수를 보낼 만한 동기와 용기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한데 모일 수 있었을까.

“섭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까?”

범한이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반응을 보이겠니?”

의 귀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섭중이 벌써 여덟 차례나 죄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단다. 그리고 정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지금 저택에만 박혀 있대. 경도를 수비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가문 내부에 있는 근위병에게 맡도록 한 상태고 말이다. 황제 폐하의 처분만 기다리며 말도 못 할 정도로 조심해서 행동하고 있어.”

“황제 폐하 말씀입니까?”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섭류운이 경도로 돌아올지 말지 봐야겠네요!”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매화 정원 한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화제를 바꾸어 말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가장 먼저 포월루 일부터 물었다. 그런 후 의공(毅公) 가문 사람이 다친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의 귀빈은 국공 가문을 대표하고 있던 터라 친분을 떠나 범한이 용감하게 자기 아이를 일깨워 준 점 그리고 장래 국공 가문이 예기치 못한 추락을 할 수도 있는 걸 막아 준 데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둘은 이렇게 환담을 하고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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