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뭐라?”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냐?”
황제는 범약약 발 옆에 놓인 평범한 손잡이가 달린 함을 주시했다.
범약약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라버니가 깨어나지 않아서입니다. 호위 말로는 오라버니가 제게 평소 사용하는 해독 환약을 들고 오라고 했답니다. 분명 혼절하기 전에 무슨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데 태의가······ 제 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는 묵묵히 계단에 서 있었다. 어의는 분명 자신의 방법에 따라 치료를 하고 있을 터. 그러니 범약약의 청을 거절하는 건 정상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과거로부터 그 수많은 날이 있었는데도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평소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낳은 여러 아들 중에 지금 이 안에 있는 녀석이 가장 잘난 녀석이란 생각 말이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아이만 자기 자리에 연연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현공 사당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범한이 목숨을 걸고 황제를 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의심이 습관으로 밴 황제는 범한이 자기 욕심 때문에 꼭대기 층까지 올라와 환궁 요청을 했으며, 이는 권력을 쥔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심을 내보이기 위해 한 행동으로만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황제란 직업을 가진 이에게는 범한의 행동이 충성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범한이 3 황자부터 구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든다면 도찰원에서 이 사실을 물고 늘어지며 범한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고 탄핵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세세한 부분들을 통해 범한의 내면이 따스하고 선량하다는 걸, 그 여인과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범한은 그 순간 그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는 황제가 그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어찌 되었든 황제는 기쁘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범한이 중상을 입어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자, 지금껏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황제의 마음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범한을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닌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범건을 향한 이유 없는 질투와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이리 뛰어난 젊은이가 대체 왜······ 너의 아들로만 남아야 되는 것이냐!’
그렇다면 황제에게 다른 아들들은 어떠했을까? 첫째는 너무 직선적이고 둘째는 너무 가식적이고 셋째는······ 너무 어리고. 그렇다면 태자는? 황제는 속으로 싸늘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근본도 없는 놈 같으니 네가 일부러 술잔을 밟았다는 걸 짐이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러니 황제가 범한을 황궁에 남겨 둔 건 한편으로는 속히 범한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중년 남성이 뼛속 깊이 박혀 있던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려서 한 짓이었다. 어려서부터 황제와 함께 자란 범건은 아마도 그의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가장 잘 이해한 것 같다. 그러니 아들이 중상을 입었는데도 입궁하지 않고 집안 서재에서 묵묵히 있었던 것이다.
* * *
황제 폐하의 전갈을 받은 태의정이 쉬고 있는 어의 하나를 데리고 광신궁 밖으로 나오면서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 지혈에는 성공하였나이다. 하오나 칼에 찔릴 때 범한 대인의 내장도 함께 상했습니다.”
황제가 살며시 턱을 치켜들어 범약약의 존재를 그에게 알렸다.
“범씨 낭자는 왜 들여보내지 않은 것이냐?”
태의정은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직업 정신을 잊지 않았다. 이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환약들은 성분을 알 수 없기에······. 검수의 칼날에 독이 있다 하더라도 독소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하여 막무가내로 복용했다가는······.”
“꼴값하는군!”
그 순간 줄곧 계단 아래 의자에 앉아 있던 정왕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찰싹, 소리와 함께 태의정의 따귀를 때리며 욕을 했다.
“이 몸께서 너에게 두 시진 주겠다! 살리겠다고 했으면 적어도 지금쯤이면 범한이 깨어났어야 하지 않느냐! 저 아이가 깨어나면 어련히 제 의술 실력으로 알아서 고칠 것을! 네 그 늙어 빠진 머리통보다는 훨씬 믿을 만할 것이니라!”
따귀를 얻어맞은 태의정은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고 분노가 치밀어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황제는 순간 정왕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현재 비개가 경도에 없는 상황에서 독을 가장 잘 치료하는 이는 범한이었다. 이에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되었든 어떻게든 범한부터 깨어나도록 만들라!”
말을 마친 황제는 그제야 범한이 다재다능한 완벽한 인재란 걸 깨달았다. 더군다나 범한이 자신과 황자가 독에 중독되었을 걸 염려해 약 주머니를 던져 놓고 가지 않았다면 자신은 검수의 검에 있던 독에 당해 지금 여기에 없을 터였다. 이에 다시 한번 범한의 장점을 발견한 황제는 속으로 탄식을 하며 생각했다.
‘이 아이의 어미가······ 그녀가 아니면 좋았으련만.’
황제가 고개를 내젓고는 내관들의 인도를 받으며 어서방으로 돌아갔다.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은 정왕은 어의들의 간언은 무시하고 범약약과 궁문 입구를 지키는 호위병을 데리고 범한이 누워 있는 곳으로 밀고 들어갔다.
임완아는 퉁퉁 부은 두 눈을 하고서 조용히 있었다. 범한의 싸늘한 손을 꼭 쥐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창백한 범한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느라 자기 뒤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몰랐다.
이 광경을 본 범약약은 마음이 아파 왔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대단한 오라버니가 이렇게 간단히 죽을 리 없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깨워라.”
오늘 정왕은 더 이상 꽃이나 키우는 농부가 아니었다. 그가 살벌한 결단력을 지닌 대장군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약을 먹였는데도 소용이 없다면 내가 저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릴 것이니라.”
범약약은 이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함 안에서 크기가 각기 다른 몇 개의 나무 상자를 꺼냈다.
정왕야가 말했다.
“어떤 걸 먹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냐?”
정왕야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어의들이 몽땅 바보는 아닐 터. 그러니 저들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약을 잘못 먹이기라도 한다면 무언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더군다나 겨우 숨만 붙어 있는 범한은 그 자리에서 숨이 멎게 될 것이었다.
범약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중하게 상자를 열어 연한 노란색의 환약을 꺼냈다. 환약에서는 매운 내가 났다.
범약약이 환약을 형수의 손에 건네주었다. 두 여인은 모두 냉정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임완아가 손을 잠시 떨더니 묻지도 않고 환약을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그런 후 내관으로부터 따뜻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셔 입 안에 있는 약을 묽게 만들었다.
옆에 둘러서서 긴장한 채 신기하게 지켜보고 있던 어의들은 이 두 대담한 여인들이 약을 주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에 어의 하나가 서둘러 앞으로 나와 이럴 때 쓰는 나무 도구로 범한의 치아를 벌렸다. 막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돕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임완아가 고개를 숙이고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줄곧 말이 없던 정왕이 갑자기 손바닥으로 범한의 가슴을 한 대 친 후 손바닥을 아래쪽으로 쓸어내렸다.
그런 후 모두 긴장한 상태로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범한의 긴 속눈썹이 살며시 떨리더니 그가 무기력하게 눈을 떴다.
* * *
“범한 대인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일찌감치 관심을 갖고 있던 내관이 소리치며 광신궁에서 나가 황제 폐하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황궁 내부가 잠시 술렁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범한은 가장 먼저 ‘분명 많은 사람이 실망할 거야!’라는 생각부터 했다.
그런 후 옆에서 긴장하고 흥분하고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베개요.”
임완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너무 긴장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임완아는 상공이 자기 가슴에 난 상처를 보려 한다는 걸 알았다. 이에 베개로 목을 괴어 줄 때 하나를 더 넣어 범한이 고개를 높이 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범약약은 어느새 불빛이 밝은 촛대를 들고 와 공격을 당해 처참하게 상처가 난 가슴팍을 비추어 주었다.
범한은 두 눈을 감고 매운맛이 나는 환약의 약효가 몸에 퍼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말라 버린 기운이 조금 회복되자 천천히 두 눈을 뜨고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고 살짝 아래쪽으로 나 있었다. 가슴 쪽을 보고 있었지만 실제 상처가 난 위치는 위장의 상단이었다. 외부 상처는 어의들이 치료를 잘해 놓은 상태였다. 범한이 봤을 때 트집을 잡을 게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위장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정기가 완전히 흩어져 버렸으니 정기로 자가 치료를 할 수도 없고······ 만약 체내에서 피가 계속 흐르도록 둔다면 범한이 보기에도 자신은 오늘 밤을 넘길 수 없었다. 이 세계의 의학 수준으로는 내장 손상을 치료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의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닦아 줘.”
지금 범한의 체력으로는 간단한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범약약은 갑자기 떨어진 명령에 끓는 물로 소독한 거친 천을 가져다가 오라버니의 가슴에 있는 가루약을 모두 닦아 냈다. 그걸 본 어의들은 모두 경악했다.
역시나 가슴에 있는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침.”
범한이 힘없이 한 단어를 내뱉고는 겨우겨우 손을 움직여 온몸을 떨고 있는 아내의 차가운 손을 잡아 주었다.
범약약이 장침 몇 개를 꺼냈다. 범한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이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왕야를 바라보았다.
“천돌, 기문, 유부, 관원에 침을 2할 깊이로 꽂아 주세요.”
시침을 할 때 정기로 보완을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걸 할 수 있는 이는 옆에 있는 정왕야뿐이었다.
범한은 깨어난 후에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앞서 약을 복용한 후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쳤을 때 얼마나 오래 연마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심후한 정기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왔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왕야는 자신이 의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긴장은 했어도 범한이 말한 순서에 따라 가느다란 장침을 혈도에 꽂아 넣었다.
침이 피부 속으로 파고들자 피가 멈추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어의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 * *
“3처입니다.”
범한이 무력한 목소리로 정왕야에게 말을 했다.
정왕은 그 뜻을 알아차렸다. 감찰원 3처가 독약 제조에 전문이었다. 자신과 황제 폐하가 관심을 가지면 소란스러워지기 때문에 3처를 불러들여 해독 작업을 시키는 걸 잊고 있었다. 이에 정왕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사람을 시켜 감찰원 3처 책임자와 관련 관원에게 입궁해 사람을 치료하게 하라는 말을 전했다.
한데 3처 관련자는 이미 황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3처 수장은 이미 여러 차례 범한을 구하기 위해 입궁하겠노라 황제에게 알린 터였다. 하지만 오늘 밤 황궁 안이 너무 혼란스러웠던 탓에 금군 관계자 몇몇이 감찰원의 청을 듣고도 감히 황제 페하께 알리지 못했다. 이에 그 누구도 3처 관원들을 감히 황궁으로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왕이 황제 폐하를 대신해 명령을 내리자 감찰원 사람은 그제야 한숨 돌리고 입궁해 곧장 광신궁으로 향했다. 3처 사람은 물건을 잔뜩 들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금속으로 만든 것이었다. 침대 누워 있는 범한에게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외쳐야 할 것 같은 감동적인 소리였다.
3처 수장은 비개 사형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3처 수장은 범한에게는 사형이었고 감찰원에서 범한과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처참한 몰골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제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그런 그가 범한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팔목에 대고 진맥을 했다.
그러자 어의를 포함한 모든 이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잠시 후 3처 수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범한을 바라보았다.
“사제가 먹은 약이 정말 약효가 좋군. 한데 이 독은 동이성 쪽에서 온 것이야. 감찰원에서 가지고 있는 걸로 일단 해독해 봄세.”
범한은 가슴이 살짝 떨려 왔다. 위약 효과 때문인지 진짜 약효 때문인지 몰라도 정신이 조금 더 좋아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