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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07화 (307/1,108)

307화

하지만 순간 최후의 공격을 펼친 검수 때문에 범한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이번에 상대편은 경국 황궁에서 십 년이나 매복해 있던 첩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얼마나 대가를 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흰옷의 검수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경국에서 십여 년 동안 자기희생을 불사하며 힘들게 작업을 해놓고, 홍 태감까지 자리를 비우도록 만든 후 모든 조건이 완비된 시점에 움직여 지금과 같은 완벽한 형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 9등급 검수는 최종 공격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저 스산한 흰옷의 검수도 최종 공격자가 아니었다.

최종 공격을 펼칠 검수는 경국 황제 뒤쪽에 있었다.

앞서 국화주 술상을 내온 수려한 이목구비의 어린 내관이었다. 황제가 흰옷의 검수 때문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됐는데 그게 하필이면 검수 앞으로 다가간 것이었다. 어린 내관이 술상을 뒤엎고 손을 뻗어 복도 기둥 안을 더듬었다. 그러자 무슨 도술이라도 부린 듯 갑자기 나타난 회색의 비수를 들고는 황제의 등에 인정사정없이 내리꽂았다.

비수는 현공 사당의 나무 기둥 안에 숨겨져 있었다. 나무 기둥과 똑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이 흉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물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렇게나 오랫동안 경국 황제의 암살 계획을 준비해 온 줄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인내심을 발휘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건 상대방이 얼마나 강하게 필승의 의지를 다져 왔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어찌 되었든 일국의 군주를 죽이려면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라기보다는 결심과 용기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경국 황제 앞쪽으로는 경천동지할 기세의 예스러운 장검이, 뒤쪽으로는 고물 느낌이 물씬 나는 음산하고 매끈한 비수가 있었다. 황제에게는 그 어느 쪽으로도 도망갈 틈이 없었다.

범한에게는 환생 후 가장 위험한 시험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습지대에서 해당타타와 싸울 때보다 훨씬 더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한탄할 여유조차 부려서는 안 되기에 그의 무의식은 스스로가 가장 정확하다고 여길 만한 선택을 했다. 검은 비수가 범한의 손을 떠나 어느새 상대방의 두 눈을 향했다.

범한은 자신이 신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죽 아저씨나 4대 종사가 나타나 주지 않는 이상 앞에 있는 검수들을 물리쳐 3 황자를 구하고, 흰옷의 검수와 싸운 후 다시 충분한 시간을 확보 해 황제 폐하 뒤쪽에 있는 어린 내관까지 무찌르는 건 불가능했다.

어린 내관은 무공을 익힌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오래된 단검 비수는 사람의 목숨을 취하기에는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에 범한은 먼저 3 황자를 구하고 다시 황제 폐하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이 선택 때문에 나중에 대역 죄인으로 몰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모두 앞에 있는 3 황자가 그에게는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아서였다.

사람을 구하려면 당연히 아이가 먼저니까.

* * *

검은 비수는 시커먼 뱀처럼 처음 나타난 검수의 미간으로 향했다.

상대방은 이번 계획을 정말 세밀하게 짠 것이었다. 물론 범한이 쓰는 방법 중 가장 무서운 게 바로 이 가늘고 검은 비수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들은 바로는 늙은 괴물인 비개가 직접 준 불경한 물건이어서 9등급 고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이에 반 토막이 난 칼이 번쩍하더니 범한의 비수가 아래층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그 순간 9등급 검수는 세인에게 문무를 겸비했다 칭송받는 범한 제사가 무기를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칼에 대항할지 상상했다.

한데 비수가 난간을 벗어나려 할 때 범한은 몸을 재빨리 돌려 자신의 등을 검수에게 보였다. 그리고 몸을 돌릴 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머리카락을 살짝 집어 올리고는 동시에 뒤쪽을 향해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가느다란 자수용 바늘이 정확히 검수의 새끼손가락 가장자리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겨우 한 개만 들어간 터라 피도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검수는 순간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갑자기 기혈이 원활치 않자 칼을 휘둘러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냈다.

그런 후 고개를 들어 보니 범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유령 같은 범한은 어느새 안하무인 격인 흰옷의 검수 앞에 와 있었다. 검수와 황제 사이에 선 것이었다. 지금 범한이 지니고 있는 무기는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애매한 검은색 쇠뇌의 화살과 연막을 내는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이 둘을 함께 섞어 쓰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오장육부가 썩고 파괴되도록 하는 독 연막을 만들 수 있었다.

순간 노랗고 파랗고 하얀 연기가 현공 사당 꼭대기 층을 채워 나갔다. 참으로 말로는 형용하지 못할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지만 경도에서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평범한 꽃불의 연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한의 음흉한 수단에 통달하고 있던 흰옷의 검수는 어느새 쇠뇌의 화살 세 발을 피했다. 그리고 호흡을 멈추고 검을 쭉 뻗어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 같은 기세로 연기를 뚫고 범한에게 향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범한은 황제 폐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니 이제 검이 누군가를 찌른다면 범한 자신부터 찌르리라. 크나큰 의리를 발휘해 황제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겨우 여기까지 뿐. 황제 폐하 뒤쪽에서 비수를 들고 있는 어린 내관은······ 그래, 부디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검이 얼굴 바로 앞까지 왔다.

순간 패도의 정기가 몸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광폭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범한이 정기를 지휘하는지 아니면 정기가 정신을 통제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범한의 날카로운 울부짖음과 함께 두 손바닥이 재빨리 앞으로 나갔다. 체내 정기가 암석처럼 단단하게 뭉쳐져 팔을 타고 뻗어 나가 빙설처럼 차가운 검을 맞았다.

흰옷의 검수가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계속 이대로 나아가 범한의 가슴을 검으로 찔러 버린다면 가공할 두 주먹에 자신의 흉골도 산산조각 날 게 뻔했다.

촤악, 소리와 함께 신선이 인간계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 듯 고검이 살며시 파동을 일으키며 범한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 흰옷의 검수는 검을 버리고 범한의 손바닥 공격에 맞섰다.

펑! 하는 거대한 소리가 울리더니 기운이 사방으로 진동하며 퍼져 나가고 먼지가 일며 독 연기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한데 흰옷의 검수는 아무리 천재적이라 할지라도 범한을 따라오지 못했다. 범한이 영유아기 때 쌓은 정기의 기본기가 검수의 약한 왼팔로 파고들더니 그의 팔을 부러뜨려 버렸다.

그런데도 흰옷의 검수는 밀려 퇴각하면서도 범한의 어깨에 꽂아 넣은 고검을 손쉽게 뽑아 가 버렸다. 빠른 속도와 신묘한 손놀림. 순간 범한은 섬뜩했다.

헛맞은 일격과 즉각적인 퇴각. 그야말로 일류 검수다웠다. 흰옷의 검수는 발끝으로 난간 한쪽을 밟더니 범한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하얀 도포 자락이 나풀거리는 모습은 흡사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학이 훨훨 나는 것만 같았다.

* * *

흰옷의 검수와 범한이 손을 맞부딪친 순간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범한에게 당한 9등급 검수가 얼굴과 산산조각이 나버린 양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는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절망감을 토로하며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왈칵 검은 피를 쏟으며 바닥으로 엎어진 9등급 검수. 바닥에 몸이 떨어졌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검수 뒤쪽에는 어느새 홍 태감이 와 있었다.

구부정한 몸의 홍 태감은 그 자리에 평온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아무 공격도 하지 않은 것처럼 소맷자락에 들어가 있었다.

그 순간 범한은 결정적 한 방을 노리고 있는 검수가 생각나 절망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수년이 지나도 생각날 정도로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비수를 들고 찌르려던 어린 내관이 이미 바닥에 혼절해 있었다. 게다가 그의 머리 근처에는 나무 부스러기 같은 게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어린 내관의 공격 목표였던 경국 황제 폐하의 손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잔이 놓여 있던 쟁반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혼란한 상황에서 그가 집어 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던 것이다. 황제가 발아래에 있는 어린 내관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짐이 섭류운은 아니나 겨우 너 정도에게 살해당할 수는 없지!”

이 장면만 봐도 경국 황제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천하 통일을 하러 나섰던 용자였고 싸우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으니 이쪽으로는 잔뼈가 굵었던 것이다.

범한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조각난 나무 쟁반을 들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전생에 인기 있었던 액션 영화 <고혹자(古惑仔)>가 떠오르는 걸까. 정말 멋진 쟁반 공격이었다.

* * *

현공 사당 아래쪽에서 미친 듯이 소리치는 소리와 욕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흰옷의 검수가 도망가고 있어서 소란이 인 게 분명했다. 이제 보니 경국 권문귀족들은 용감하고 성격도 화끈했다. 흰옷을 입은 이가 황제 폐하를 노린 검수란 걸 알고는 속속 그자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걸 보니 말이다.

이내 놀란 소리와 끄응, 하는 소리가 지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당 꼭대기 층까지 들려왔다.

아직 논공행상할 만큼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터라 범한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고 살펴보았다. 경도 수비 섭중이 입을 가리고 서 있었다. 범한의 눈에는 그가 피를 토한 게 똑똑히 보였다. 분명 조금 전 흰옷의 검수와 겨룰 때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섭중은 경국 경도에 있는 몇 안 되는 9등급 고수였다. 한데 그가 기습 공격을 받아 피를 토할 정도라면 흰옷의 검수는 더 많이 다쳤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국화가 가득 피어 있는 곳에서 흰옷의 검수는 한껏 느려진 속도로 도주 중이었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사고검에게 아우가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떨어져 살아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지내는지 모른다고 했지.”

황제 폐하가 범한 뒤에 서서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범한아, 짐에게 저자를 잡아 오너라. 저들 형제가 똑같이 바보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봐야겠구나.”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경국 황제가 연달아 일어난 공격에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범한이 무언가를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홍 태감도 이미 올라와 있으니 이제 황제 폐하의 안전은 그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비록 어깨 부위에서 피가 흐르고 있지만 범한은 난간을 뛰어넘어 새카만 새처럼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사당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은 범한이 뛰어내리자 이번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경났습니까!”

범한이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검수에게 당했던 경도 수비 섭중도 기운을 회복하자 이내 사나운 얼굴을 하고는 흰옷의 검수가 도망간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궁전의 사형이었다. 만약 저 검수를 잡지 못하면 섭씨 가문은 강물에 뛰어들어도 씻어 내지 못할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그러니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직접 검수를 잡아 와야만 했다. 그것도 산 채로.

이내 호위병 중 경공의 고수들도 화살처럼 공중을 가르며 언덕으로 날아갔다.

산 아래에서는 금군이 층층이 포위하고 있었고 산에서는 범한과 섭중이라는 두 명의 9등급 고수, 그리고 눈이 시뻘게진 한 무리의 호위병들이 추격에 나선 상태였다. 이런데도 과연 흰옷의 검수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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