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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06화 (306/1,108)

306화

드디어 말을 멈춘 황제가 몸을 돌려세우고는 있는 힘껏 난간을 내리쳤다.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지만 범한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도가 튼 터라 옆에 있는 대 공공을 향해 입을 오물거렸다. 천자께서 대차게 화를 내시느라 목이 마르시다고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알려 드린 것이다.

대 공공은 태극전에 있다가 늦게 도착해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범한 제사가 황제 폐하께서 갈증을 느낀다는 걸 알려 주자 신이 나서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옆에서 대기했다.

“술로 다오.”

황제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데도 범한 저 녀석이 뒤에서 뭔 짓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난간 밖 경치와 하늘 위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싸늘한 가을빛에 시 천 수를 읊고, 찬 향기가 담긴 술 한 잔을 땅에 붓는다. 높은 누대에 올라 국화를 감상하는데 어찌 술이 빠질 수 있겠느냐!”

3년에 한 번 열리는 국화 감상 모임에서는 언제나 국화주가 곁들여졌다. 그러니 술은 옆에 준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의문의 화제는 이내 모두 잊힌 일이 되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명령에 담당자인 수려한 외모의 어린 내관은 서둘러 술상을 준비해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어찌나 조심하는지 발끝으로 걸으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범한은 황제가 시를 읊기 시작하자 순간 속으로 뜨끔했다. 그 시는 《석두기》 38회에 등장하는 것으로 가보옥의 국화 시였다. 황제 폐하는 자신이 범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은근슬쩍 알려 준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언제까지나 세인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던 터였다.

“《석두기》에는 오로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만 나와 수준이 낮은 글이기는 해. 한데 문장은 그런대로 괜찮단 말이지. 한데 또 아까처럼 시는 수준이 조금 떨어지고.”

황자들과 수행원들은 황제 폐하께서 뜬금없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시자 살짝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굽힌 상태에서 말했다.

“소신, 재미로 한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보실 줄은 생각도 못 하였는데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 짐은······ 네가 원작자인 걸 밝히지 않기를 바라는 줄 알았구나. 하여 시가 나오는 부분에서 일부러 실력 발휘를 안 하는 유치한 짓을 했다 생각했지.”

그러자 범한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내쉬었다.

한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민간과 황궁에서 유행하는 《석두기》가 작은 범 대인의 손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너무나도 놀라 각자 반응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담박서국에서만 출간되고 있는 그 책은 대중적인 작품이기는 했지만 문체가 수려했다. 이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새 명문장으로 천하를 놀라게 한 작은 범 대인의 작품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진짜 작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황제가 술잔을 들고 술에서 감도는 국화 향을 맡았다. 그런 후 살짝 맛을 보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난감해하는 범한과 깜짝 놀란 황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술상에는 술잔이 두 개 있었다. 황제 본인과 황태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한데 그중 한 잔은 자신이 마셨고 한 잔이 남았으나 어마마마께서는 아래로 내려가셨다. 하여 황제는 순간 이 술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황제는 먼저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1 황자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펴는데 그의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범한을 가리키려 했다.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린 황제가 얼른 손가락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손가락은 한쪽 구석에 숨어 놀란 얼굴로 웃고 있는 3 황자를 가리켰다.

아직 나이가 어린 3 황자가 얼굴을 구겼다.

“부황, 소자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황명에 거역한 죄를 물을 수 없었다.

황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술보다 더 독한 것도 해놓고 이깟 술 한 잔 가지고 뭘 그러는 게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3 황자는 부황의 싸늘한 기운에 눌려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하지만 서둘러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난간으로 가 자그마한 손을 뻗어 잔을 받아 들고는 술을 마셨다.

* * *

턱, 하는 소리와 함께 3 황자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멀리 굴러갔다. 그 순간 3 황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이 벌어진 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싸늘한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냥 술 한 잔 마신 것뿐인데 왜 호위병이 내 목을 치려는 거지?’

황자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복잡하면서도 위험한 상황에서 자라 온 그였다. 그래서인지 몸이 곧장 반응했다.

‘검수이다!’

3 황자 뒤쪽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러니 그가 머리를 감싸 쥐고 쥐새끼처럼 내뺀다면 저 서릿발 같은 칼날은 곧장 황제를 찌를 게 뻔했다. 물론 3 황자에게는 고하 대종사처럼 눈밭을 발자국도 안 남기고 걸어가는 심후한 무공 따위는 없었다. 섭류운처럼 강한 손날 격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부황을 위해 아무리 용맹하게 막아선다 해도 이 경천동지할 칼날은 그를 두 동강 낸 후 황제의 머리를 취할 게 뻔했다.

피하든 그냥 칼을 맞든 결과는 피차일반이었다. 이에 3 황자는 가장 올바른 선택을 했다.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칼날을 통해 보이는 검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리를 떨며 아랫도리가 몽땅 젖은 채로 냅다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비명이 꼭대기 층에서 울려 퍼졌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검수가 출현했음을 즉각 알아차렸다. 한데 이제껏 경국 황궁에서 호위를 맡고 있는 대내 시위 가운데 검수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에 칼날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난간 쪽에서 술잔을 쥐고 있는 황제를 베려 하는데도 누구 하나 달려들어 막지를 못했고 결국 칼날은 호위병들의 방어선마저 뚫어 버렸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순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어깨를 한 바퀴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 검수는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던 터라 급습이 가능했고 칼을 휘두르는 기세 또한 강력했다. 이에 범한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대응했다. 그러자 허리 쪽 설산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정기가 거대한 강물이 되어 범한의 오른팔을 타고 쏟아져 나가 그의 주먹으로 모였다. 그런 후 몇 걸음 떨어진 허공에서 검수의 칼날을 부수어 버렸다.

참으로 대단한 일격이었다. 주먹이 일으킨 바람이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데 천둥이 낮게 흐느끼는 것처럼 소리까지 났다. 그리고 정기의 바람과 검이 부딪치자 새하얀 서릿발 같았던 검은 어느새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범한은 가슴이 답답해져 너무나도 놀랐다. 칼을 휘두른 자가 9등급에 달하는 고수였던 것이다. 한데 이게 맞는 거였다. 천하의 최고 권력자인 군주를 죽이려 하는데 9등급 고수가 아니라면 어찌 공격할 깜냥이라도 되겠는가. 주먹에서 정기가 소리를 내며 나간 순간 범한은 어느새 3 황자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왼손으로 다리 쪽에 숨겨 두었던 검은 비수를 꺼내 들고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것을 검수의 하복부를 향해 찔렀다.

검수가 쥐고 있던 칼은 절반이 날아가고 없었다. 이에 칼의 기세는 형편없어졌지만 반면 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져 버렸다. 검수도 범한의 공격을 사력을 다해 막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호위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범한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9등급 강자인 검수에게 맞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현공 사당 앞쪽 하늘에서 구름이 열리며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도 작열하는 태양이 말이다.

햇살이 비추자 사당 내부에 초췌한 흰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새하얀 옷을 입고 흰색의 고검(古劍)을 든 검수가 등장했다. 한데 그 누구도 이 검수가 어떻게 꼭대기 층에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가 햇빛의 엄호를 받으며 황제 바로 앞까지 접근했는데도 알지 못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그사이 황제 곁에 있던 호위병 둘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고 황제를 뒤쪽으로 끌어 피신시켰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바람을 가르는 검 소리와 후두부 파열이었다. 파열된 후두부에서는 선혈이 솟구쳤고 칼날이 채 뽑히기도 전에 그들의 몸은 바닥으로 거꾸러져 버렸다.

하얀 옷을 입은 이는 어느새 옛 사연이 담긴 듯한 고검을 들고 곧장 황제에게 향했다.

* * *

황제는 앞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 없다 했었다. 한데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듯 나타난 검수가 공격을 해오자 목숨 바쳐 호위를 한 시위들에게 이끌려 뒤로 몇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간 검의 끝은 그 순간 황제로부터 한 척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에 모두 곧 검이 황제 폐하의 목을 관통하리라 생각했다.

경국 황제가 무공을 못 한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에 호위병 여럿이 미친 듯이 황제 앞으로 달려와 막아섰다. 너무나도 급작스레 일이 터지자 황제의 안위를 걱정한 이들이 가장 즉각적으로 효과가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즉 자신들의 몸을 던져 검에 대신 찔린 것이었다.

무수한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데도 황제의 두 눈은 차분함 그 자체였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검과 하나가 되어 직선으로 공격해 들어오고 있는 흰옷의 검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 * *

호위병들도 실력이 충분히 고강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게는 검수를 막을 시간이 모자랐다. 현공 사당 아래에는 홍 태감도 있고 섭씨와 진씨 가문의 유일한 9등급 강자 두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목숨을 보호하려면 바로 이 순간 흰옷의 검수를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누가 막는단 말인가. 호위병들은 이미 그들의 본분을 다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 중에서 검수가 나왔기에 자신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집에 있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던졌다. 그리고 이제 황제 폐하를 대신해 칼을 맞아 줄 사람은 여기에 있는 아들들뿐인데······.

앞서 일어난 상황은 모두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펼쳐진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3 황자가 놀라 손에서 떨어뜨린 술잔은 아직도 바닥을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의 1 황자는 살기충천한 고검(孤劍)을 막으러 부황 곁으로 달려가기 위해 이제 막 두 발짝 내디디고, 아직 마지막으로 내디딘 발은 땅에 닿기도 전이었다.

그 순간 범한은 검수와 몇 치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가느다란 검은 비수를 들고 호위병으로 위장한 검수의 하복부를 찌르려 할 때였다. 그리고 동시에 순간 뒤쪽에서 나타난 놀라운 검의 위력을 감지한 후였다.

허공으로 튄 피들이 산에 활짝 핀 꽃처럼 허공에 피어 있었다. 죽어 눈도 감지 못한 호위병들의 수급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분명 확실히 조사를 마쳤는데. 흰옷의 검수가 어떻게 현공 사당 위쪽에 숨어 있을 수 있었는지 호위병들은 죽으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범한의 눈앞에서 이 모든 장면이 느린 화면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고 살 떨릴 정도로 끔찍하게 펼쳐졌다.

범한은 곁눈질로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래서 처절한 표정으로 황제 폐하에게 달려가고 있는 태자의 충성스러운 모습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태자 전하는 동생이 바닥에 떨어뜨린 술잔을 밟아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엎어져 버렸다.

이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황제 폐하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던 범한이 가장 빨리 반응해 가장 충성스러운 효자로 등극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목덜미의 털이 갑자기 쭈뼛쭈뼛 서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나타난 검의 살기가 앞쪽에 있는 9등급 검수의 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더욱 광포하게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찰나, 범한 내면 깊은 곳에 있던 난폭한 기운을 흥분시켰다. 그 순간 범한은 황제 폐하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3 황자도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에 뒤쪽에서 나타난 흰옷의 검수에게 자신이 중상을 입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범한은 싸우기로 결심했다. 이리 좋은 기회를 인색한 범한이 놓칠 리 없었다. 이리도 강한 적을 승부욕이 강한 범한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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